닮은꼴 조 팀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국 지사라면 누구든 가지 못해 안달 난 자리가 아닌가. 회사 내에서도 엘리트 코스라고 일찌감치 소문이 돌았다. 비공식적으로, 임원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우물 안 개구리 시야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경험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너 일가와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자리였다.
소문에 따르면 회장의 하나뿐인 늦둥이 막내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귀국하지 않고, 지사에 눌러앉았다. 회장이 걸핏하면 출장 가는 이유가 딸을 끔찍하게 아껴서라나, 뭐라나. 하긴 창사 60주년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달랑 기념사로 갈음했으니.
"화성으로 가는 게 좋겠군. 휴일 편히 쉬고, 월요일부터 화성으로 출근하도록 하세요."
"화…, 성이요?"
"들었으면 그만 가봐요. 이미 결정했으니, 그렇게 알아요."
창고지기로 내쫓겠다는 수작이네. 전략기획팀에서 화성 물류센터 창고지기로?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자존심이 사정없이 찢어졌다. 좌천이었다. 엘에이 어쩌고저쩌고 바람을 넣더니, 멀쩡한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벼운 입으로 나를 세웠다가 엎었다가, 가지고 놀고 있네. 정말 이렇게 무시해도 됩니까?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봉돌처럼 조용히 목구멍 깊이 가라앉았다.
"오후 근무는 하실 필요 없어요. 개인 물품도 있을 테니 챙겨서 바로 퇴근하세요."
인사철도 아니었다. 찍소리도 못하고 여기서 물러나면, 대리 기사도 할 수 없어, 계획하던 기부금 마련은 물 건너갔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보육원 허름한 정문에 버려졌던 갓난아이로 되돌아가는 느낌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갔다. 생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는데, 피가 끓어올랐다. 세상에 홀로 버려지는 느낌, 그 견딜 수 없는 먹먹함. 숨 막히는 어둠이었다. 순식간에 분노가 정수리로 몰려들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럽니까?"
억양에 하극상을 연상하는 어떤 감정도 싣지 않고, 최대한 차분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조직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도려내는 게 정상이 아닌가요? 물론 장백호 씨가 지방 지사에서 본사 전략기획팀까지 승승장구한 사실은 압니다. 하지만 지난 일이죠.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가기도 하죠. 인생이 다 그런 거, 아닙니까?"
인생이 뭐? 날 가르치려는 거야? 진짜 이유는 뒤에 감춰두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인사 문제를 처리한다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지? 팀장인데, 대리한테 뭐가 겁나서? 실무에 밝은 능력이 그렇게 겁나나?
"내 탓이라고 오해할 것 같은데, 여기 발령장입니다."
팀장은 종잇장 하나를 내밀었다. 회장의 직인까지 찍혀 있었다. 인사철이 아니어서 정상적인 과정을 밟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면 팀장이 본부장을 움직였을지도. 까탈스럽기로 자자한 본부장이 이상하게도 유독 팀장에게 살갑게 굴었다. 서로 티격태격할 때도 많지만.
"팀장님! 솔직한 얘기로, 실수한 것도 없고, 농땡이 피운 적도 없는데, 토사구팽이 아닙니까? 팀장님 말처럼 조직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건 업무분장 때문이잖습니까? 그것도 팀장님 지시로."
죽을 때 죽더라도 찍소리는 내야겠어. 손발 모조리 묶어놓고, 투명 인간으로 만들더니 벼랑 끝으로 밀어버리네. 회사가 아무리 이익집단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사람을 완전히 소모품 취급이잖아.
"그러니까, 지금, 장백호 씨가 화성으로 내려가는 게 내 탓이다?"
닮은꼴 팀장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순간적으로 아차, 싶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나? 부당한 인사발령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억울함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도 조직에 순응해야 한다는 체념이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신입처럼 사표를 내던질 수 없어서였다. 취업을 위한 힘겨운 노력과 헛헛한 날들이 방금 찍어낸 판화처럼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니, 팀장님 때문이 아니라…."
뭐라도 둘러대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나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성과자에 대한 회사 방침인데 어떡합니까?"
조 팀장은 <회사 방침>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잠을 줄여가며, 휴일도 반납하며, 아무리 충성해도 회사는 이익집단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날들을 고스란히 불태워 충성하더라도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다가,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내 경우엔 오로지 그런 과정들뿐인가?
"아직 젊으니 권고사직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서…, 다행히 화성에 자리가 있어 가는 거니까, 여기 있을 때처럼 열심히 근무하시기를 바랍니다."
조 팀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낙하산으로 내려오던 첫날부터 나를 보는 탐탁잖은 눈빛은 여전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머리 조아리면서 조 팀장 앞에 있어봤자, 발령장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 눈앞에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신입처럼 그래, 네 똥 굵다! 어디 얼마나 잘 먹고 잘 싸는지, 두고 보겠다! 악담을 퍼붓지 않을 바에야,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왜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팀장은 비로소 등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어서 가지 않고 뭐하냐는 투로 빠르게 말했다. 계급이 깡패라더니, 하나 틀린 게 없네. 업무 처리에 대한 자긍심은 따돌림당하는 순간부터 사라진 터였다. 떠밀리면 떠밀리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달리 뾰쪽한 방법이 없어. 체념하면서도 억울한 감정은 오히려 더욱 또렷해졌다.
"팀장님! 혹시 나한테 감정 있습니까?"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장백호 씨를 어디서 봤다고 감정이 있겠어요?"
"아니면, 닮은꼴이라서…, 불편한 겁니까?"
지금이 아니면 팀장 입으로 들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나요? 내가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분명히 해두죠. 장백호 씨는 부하 직원입니다. 회사 차원의 인사이동을 거부할 유일한 방법은 사표뿐이죠. 아시겠어요?"
닮은꼴 조 팀장은 매우 건조한 목소리였다. 비슷함을 넘어 놀랍도록 같은 닮은꼴은 도저히 눈 뜨고 봐주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차라리 말한다면, 좌천당하는 이유로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보통, 사람들은 엇비슷하게만 생겼어도 서로에 대한 호감을 본능적으로 느끼지 않나? 당연히 쌍둥이는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능글맞은 팀장 입에서 동질감을 찾는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행동에 항상 숨겨져 있으니.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이참에 물류 쪽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기회가 아닌가요? 더 할 얘기는 없지요?"
조 팀장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쭈뼛거리며 더 있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터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지금껏 괴롭혀서 속 시원합니까? 눈으로 욕했다. 뱃속에 능구렁이 열댓 마리는 들어앉아 있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나를 싫어해 밀어내려는 팀장 밑에서 일할 바에야, 차라리 따로 떨어져 그림자조차 보지 않는 게 좋을지도. 악감정에 서로 피곤해하면서 부딪힐 필요가 없지. 사소한 행동에도 신경 쓰이고, 눈에 거슬리기는 피차 마찬가지니까.
"빈말인 줄 압니다. 가보세요."
조 팀장은 냉정했다. 창고지기 발령장까지 준비하고서, 함량 미달이라 엘에이 지사로 보내기에 좀 그렇지 않냐는 혼잣말이 뒤늦게 얄밉고, 거만하게 느껴졌다. 얼마든지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자신의 힘을 각인시키려는 속셈이었다. 업무분장을 한다며 일을 빼앗아 가도, 끝내 사표 쓰지 않은 나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치사하고 아니꼬워서 사표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여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주섬주섬 잡동사니 개인 물품을 챙기는 데도 동료들은 슬쩍슬쩍 건너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흉흉한 소문은 항상 당사자를 비껴간다더니, 팀원들은 나의 발령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오래 버텼어요."
박 주임이었다. 가증스럽게도 안쓰럽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함께 일하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기라도 했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하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쌀쌀맞기 그지없었는데. 아니면, 직장생활은 자고로 자신처럼 능력보다 아부로 해야 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나와 자신을 비교하려는 걸까. 재빨리 분위기 파악해서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더없이 강해야 살아남는 직장 생리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 표정 뒤에 숨겨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가끔, 보고 싶을 겁니다."
"나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