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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4

by 이순직 Jul 10. 2023

"늘 꽁무니 빼더니 오늘은 웬일로 참석하네요?"


황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비아냥 섞인 목소리로 고개까지 갸우뚱거렸다. 심야 대리운전을 포기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땐 팀장이 오기 전이었잖아."


"팀장님한테 찍혀서가 아니고요?"


황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몇 달 전 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팀장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기 전에, 잊을만하면 퇴근 후 시간이 남아돈다며 눈웃음쳤다. 말년 팀장이 떠나면 어차피 다음 팀장은 나라는 귓바퀴에 착착 감기는 노골적인 유혹이 달콤하긴 했다. 물론 원나잇 데이트가 없진 않았다.


몸뚱이는 본능적으로 여자를 찾아 헤매는 피 끓는 청춘이었다. 하지만 황과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거대한 강을 바라보자, 데이트는 이어지지 않았다. 잠깐 얼굴을 마주하다 말 것도 아니고, 싫든 좋든 말을 섞어가며 지내야 하는 동료였다.


얼굴도 없는 부모는 물론이고, 구질구질한 보육원의 기억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초라하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깟 밤일로 나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정말 웃겨! 황은 쌀쌀맞고 무뚝뚝해진 나에게 강짜를 부렸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황을 만날수록 비참해진다는 판단은 변하지 않았다. 과거를 침묵해가며, 원나잇을 이어갈 수 있으나, 행복해지지 못할 바에야 포기하는 게 맞았다. 상처받는 쪽은 황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했다.


"회장님이 우리 부서를 유심히 보고 있어요. 지난달 성과를 칭찬하시고. 여러분 덕입니다."


닮은꼴 팀장이 회장 늙은이를 독대라도 했다는 건가? 일개 팀장 주제에 어떻게? 허풍을 쳐도 적당해야 믿어주지. 기획팀에서 대장 노릇 하려고 애쓴다, 애써.


"팀장님이 잘 이끌어주셨기 때문이죠. 감사합니다!"


닮은꼴 팀장 맞은편에 앉은 박 주임은 꾸벅, 고개까지 숙였다. 일찌감치 눈치챘지만, 사회생활 범생이라고 해야 하나, 기회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권력 앞에서 직무에 대한 양심을 지키려는 놈들만 개고생하는 거지.


가진 자들이 더 가지려고 눈알 뻘겋게 뜨고, 아귀와 다름없이 뜯어먹을 걸 찾는 정치판과 뭐가 달라?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악물고 사는데. 양심 하나 지키려고 이러는데. 사람답게 살려는 건데.


"기회가 돼서, 한 턱 자주 쐈으면 합니다. 이제 다들 일어나지요?"


여기저기 지방방송이 탁월한 리더십이 어쩌고 하면서, 용비어천가를 한창 부르는데도 닮은꼴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이 업무 성과에 따른 보상임을 확실히 했다. 물론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팀장님! 벌써 끝내게요? 조금 아쉬운데…."


박 주임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끝을 흐렸다. 팀장을 향해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요? 더 있으실 분은 계시고, 난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미리 계산합니다."


팀장은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손 인사를 했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내 뒤돌아 걸어가는 닮은꼴 팀장의 뒤통수를 멀거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회식 내내 말도 걸어오지 않고, 말을 붙일까 싶어 조금의 틈도 없이 저 혼자 지껄이더니,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팀장과의 거리를 좁힐 사적인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깔끔하게 날아갔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받으며 앉아 있을 바에야, 대리 기사로 뛰었으면! 행패를 대놓고 퍼붓는 손님이라면 자존심 박박 긁힐 테지만.


아저씨! 인생, 뭐 있겠어? 한 방이라고! 뒷좌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느닷없이 지껄였다. 몸 놓고 돈 먹기야! 이따위 머슴 짓은 할 필요가 없다고! 알아들어? 내 말? 밑바닥 인생이 불쌍하다니까! 목소리에 술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의 한껏 풀린 눈동자를 백미러로 말없이 건너보았다. 페라리 운전은 처음이라 조심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 있어. 숨기는 게 있다고."


"입사가 몇 달이나 됐다고 회장을 만나? 그리고 성과가 있으면 보너스를 주던가. 쩨쩨하게 회식이 뭐냐?"


"나도 그게 찜찜해."


"아무튼, 팀장 라인을 타는 게 좋을 거야. 혹시 알아? 실세일지."


용비어천가를 목 놓아 부를 때는 언제고, 뒷담화는 본능에 가깝나? 조금씩 취한 술자리 분위기 탓인가? 황이 스파이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모르긴 해도, 내일 당장, 뒷담화는 팀장의 귓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갈 것이다.


내색하지 않지만, 닮은꼴 팀장은 팀원들의 사소한 성향까지 이미 꿰차고 있었다. 가령 봉지 커피를 극도로 혐오한다든지,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만지면 반드시 물티슈로 손 닦는 결벽증이 있다든지. 그러니 팀원들의 이력서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야 말해 뭐할까.


"먼저 갈게. 천천히 놀다가 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에 대한 추측과 비아냥을 저희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자리에 구경꾼으로 전락한 보릿자루였다. 예전 같으면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 내밀한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물었을 터이지만, 온통 팀장 얘기였다. 권력이 바뀌었다. 세상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었다.


"장 선배가 어디까지 버틸까? 요즘 부쩍 눈치 보는 것 같긴 하지만."


등 뒤에서 들으란 듯이 박 주임이 떠들어댔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팀장이 느닷없이 업무 조정을 했다. 내가 하던 업무를 황과 박 주임에게 나누어주었다. 대놓고 퇴사하라는 압박과 다름없었다. 신입에게 했던 수법과 같았다. 모멸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부하 직원이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팀장의 얼굴은 차가웠다.


"장백호 씨가 할 일을 차차 찾아보지요."


팀장은 일을 빼앗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닮은꼴 팀장을 빤히 쳐다보면서, 거울을 보고 있다는 강한 느낌에 자신이 미워졌다. 닮은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짐작이 들었다. 얼굴을 뜯어고칠 수도 없었다.


낙하산으로 내려오던 첫날, 팀장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기보다 왠지 서늘한 불운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불독에게서 숱하게 겪었던 동물적 감각이었다. 살면서 이처럼 닮은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데, 확실히 뜻밖이네요. 그런 엇비슷한 말을 건네면서 동질감을 찾을 만도 하지만, 팀장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근무 시간 줄곧 텅 빈 책상 앞에 앉아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사표를 내던진 신입을 떠올리다가, 회식을 기회로 친근감을 쌓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업무 관계가 느슨해지면 사람만 보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 간절한 희망을 품어도 지금 당장은 딱히 할 일도 없는 보릿자루였다.


온갖 눈치를 보며, 날마다 치열한 전투에서 패배하던 보육원의 시간을 견뎠는데, 이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힘겹게 가까스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     


"다 알고 있어. 돈 내놔!"


보육원 뒷마당 구석진 그늘 안에서, 불독은 땅바닥에 침을 퉤퉤 뱉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도일과 함께 있어도 불독을 감당할 수 없었다. 험상궂은 표정과 거친 말투에 이미 기가 죽었다.


"참고서 살 돈인데…."


"원장 놈이 준 것도 알아. 대갈통 좋다고 차별하는 짓거리가, 너는 공평하다고 생각하냐? 상식이라고 믿어? 그게 평화야?"


불독은 억울함에 더해, 분하고 괘씸하다는 표정과 억양으로 씩씩거렸다. 원장에 대한 적개심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나 나나, 똑같은 고아 새끼란 말이야. 그런데 너만 특별 대우야?"


"학교에서 범생이 삥 뜯으면 되잖아? 우리끼리 이럴 필요 있어?"


"하, 이 새끼 봐라. 같은 고아라고 끼리끼리 놀자는 거냐? 분명히 말하지만 너하고 난, 틀려. 넌 대갈통 좋다고 원장 놈한테 보호받는 새끼야. 핵우산을 쓰고 있지. 그런데 왜 원장 놈이 우산을 씌워줬겠어? 이용 가치가 있단 얘기지. 하지만 나한테 아무 쓸모 없어. 그까짓 핵우산!"


불독은 금방이라도 돌주먹을 아랫배 깊숙이 꽂아 넣을 듯이 손가락 마디를 꺾어 소리를 냈다. 뚝뚝, 스타카토로 이어지는 마찰음이 명치끝에서 통증을 불러일으켰다.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통증은 언제나 낯설었다.


"원장 놈이 검사하면 짝꿍한테 빌려서 보여줘. 어서 내놔!"


초등학교에 다닐 때처럼 원장이나 동네 교회 성경 교사에게 고자질하면 몇 배 더, 나만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보복은 항상, 언제나 잔인했다. 참고서 사고, 필요할 때 쓰라고 준 돈까지 탈탈 털어 내밀었다. 불독은 일수라도 받는 듯이 몇 장 되지도 않는 지폐를,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세었다.


"한 놈, 두시기, 석삼, 너구리, 오징어…, 삥땅 치진 않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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