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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3

by 이순직 Jul 09. 2023

이건 또 무슨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다는 말투야? 협박인가? 아무도 나와 점심을 같이 먹어주지 않는 현실을 똑바로 알고 있으라는 충고인가? 짐짓 굳은 표정으로 박 주임을 건너다보자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왕따가 어디 학교에만 있나요?"


"내가 왕따란 거야?"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잖아요?"


"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먹는 거지, 왕따라니! 너무 나갔어."


박 주임을 째려보며 말했지만, 아예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선배를 도와주지 못할망정 초를 쳐? 하여간 말 상대만 있어도 정치하려고 잔머리 굴리려 든다니까!


그래서 직장생활이 만만찮은 거지만. 일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살아남으려면. 인사고과 점수가 하늘에서 맥없이 그냥 떨어지나!


"선배. 빈말이 아닙니다. 보세요. 우리 부서 사람들이 없잖아요?"


숟가락을 반쯤 퍼 올리다 말고, 주위 테이블을 살폈다. 박 주임의 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사무실에서 바로 앞서 나갔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혹시 외부 식당으로? 박 주임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자신만만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너 말대로라면 이젠 우리 부서에 왕따가 둘이란 거네? 목숨 걸었으니."


"무슨 섭섭한 소립니까? 난 아니죠."


박 주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입안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렸다.


"보고서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요? 황이 준비한다는 걸, 귀띔조차 하지 않았고. 조 팀장님이 온 후로 갑자기 일이 많아졌지만, 유독 선배는 더 하잖아요? 물론 그전에는 신입이었지만."


박 주임까지 모멸감을 주다니! 확인 사살이 분명했다. 잔인했다. 모래알이 입안에서 아우성쳤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나간 것도 있겠지만, 워라벨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직 젊으니까. 아무튼 달라진 부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선배는 적응 중인가요? 먼저 일어납니다."


박 주임은 반쯤 먹다 말고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달 전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박 주임의 행동이었다. 느닷없이 혼자 먹는 점심이 되어버렸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표정을 살피는 눈짓이며 말투가 완전 간 보는 거네. 확인 사살을 위해서. 황도 그렇지만, 박 주임 역시 닮은꼴 팀장에 적응한 건가? 낙동강 오리알로 나만 남았다는 거야? 나라고 간이며 쓸개도 다 떼어놓고, 코드를 맞추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닮은꼴 팀장이 밀어내서 어쩔 수 없는 거지.


"기분 나쁜 거울 같습니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뱉은 첫마디를 나라고 듣고 싶은 말이겠어? 보육원의 어두운 기억이 지렁이처럼 지금도 겨드랑이에서 꿈틀거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 자존감을 한없이 무너뜨리는 간지러움. 취업하고 나서야 겨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는데, 조 팀장 때문에 다시 느껴야 하나.


엊그제 일은 까맣게 잊어버려도, 생생하게 몸 안에도 남은 보육원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모래알을 우걱우걱 씹었다. 식판에 밥풀 한 알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씩씩하게 씹었다. 스스로 용감해질 것. 하늘에도 땅에도, 세상 그 어디에도 천사는 없다.


과자 부스러기 얻어먹자고 다녔던 보육원 가까이 있는 동네 교회에서 깨달았다. 고로 신도 없다. 신이 있다면 과자 따위로 유혹하지 않을 거다.


퇴근 1시간 전이었다.


"오늘 회식이 있습니다. 팀워크를 위해서 하는 거니까, 한 사람도 빠지지 않도록 하세요."


꼬박꼬박 존댓말이지만, 다분히 명령조였다. 의자가 사람을 만든다는 옛말이 받침 하나 틀린 게 없다니까. 다른 부서에도 이미 도플갱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내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네. 직급이 팀장인데, 나를 견제할 리는 없을 테고.


패션에 민감한데,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불쾌감 엇비슷한 거라도 가지고 있나? 도플갱어를 넘어 쌍둥이라고 해도 그렇지, 사람과 사람이 아닌가. 하긴 의자가 다르니 숨 쉬는 공기마저 다르다고 믿겠지. 썩어 문드러져 없어지지 않는 화석으로 남은 보육원의 내 시간처럼.


*     


나를 포함해 대부분은 녀석을 불독이라고 불렀다.


머리통 하나는 더 올려놓은 키와, 쩍 벌어진 어깨의 우람한 덩치에 더해, 성격도 과격했다. 폭군이었다. 불독의 엄청난 식탐에 쫓겨, 나는 언제나 굶주렸다. 보육원을 나온 뒤에, 여기저기 흩어진 얘기들을 얼추 꿰맞춰 보면, 불독은 겨우 몇 달 빠른 생일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대부분 고아가 그렇듯 나 역시 태어난 날짜에 대한 신뢰감은 바닥이고, 보육원 동기의 생일도 마찬가지였다. 애증의 덩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몇몇은 생모가 쪽지를 남겼다고 박박 우기지만, 보육원의 허술한 서류작성이나 관리를 믿는 건 위험했다.


퇴소할 때, 오래된 서류철에서 자신의 다른 생년월일을 발견한 친구는 신뢰보다 더 많은 불신에 빠졌다. 지금도 드문드문 연락하고, 간혹 만나기도 하는 도일의 경우가 그렇다.


"이미 버려졌는데, 내가 나를 버리지 못할 것도 없지!"


퇴소는 두 번째로 버려지는 날이었다. 네거리에서 헤어지면서, 도일은 침울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돌보지 않겠다는 선언인가? 오직 복수를 위해. 삶이 산산이 부서져도 오로지 복수만 하면 된다는 집요함이 섬뜩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일부러 하는 말이라는 짐작으로 빙그레, 웃었다. 보육원만의 엄격한 규율과 수상한 질서에 더해 불독까지. 언제나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벗어나는 것은 내겐 일종의 해방이었다.


"무슨 소리야?"


"불독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도일은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헤어지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알 수 없을 터인데, 꽁무니라도 쫓겠다는 건가? 퇴소해서 볼 일이 없으니, 화끈하게 앙갚음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앞으로 만날 일이 없으니 깡그리 잊고 살아야 한다고 내게 에둘러 부탁하는 건가? 의아했다. 설령 만난다 해도 덩치에서 밀릴 터이고, 당연히 주먹도 마찬가지여서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언감생심이었다."


"혼자 걷는 밤길이라도 노리겠다는 말이네."


"당연하지. 불독에 대한 복수는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을 거야. 그전에 먼저, 또 다른 불독이, 있거든."


도일은 한 마디씩 뚝뚝 끊어 말했다. 표정은 더없이 단단했다. 몸과 마음을 옥죄이던 보육원의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났다는 자유로움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결의 또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차가운 복수심이 이글거리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넌 대학이라도 가잖아. 난 그 새끼부터 찾을 거야. 딱 3년 전에 찾아왔었어. 5만 원 주고 도망가더라."


"누구? 아버지?"


"그 새끼! 배를 탄다고 했어."


"그래서, 포항으로 가려는 거야."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만나겠지. 잘 살아라. 내 몫까지."


도일은 옷가지 몇 벌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질끈 둘러메고 버스를 탔다. 큰 키에 꼬챙이 같은 몸을 흐느적거리며. <내 몫까지>가 귓가에 맴돌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버지를 만나면 부둥켜안고 울음부터 터뜨릴 거라고 짐작했다. 세상으로 다시 내던져졌는데, 쓸쓸한 마음을 묶어둘 나뭇가지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나야말로 부모에 대한 정보는 먼지조차 없으니, 오히려 녀석이 부러웠다. 당장 허름한 고시원 원룸을 알아봐야 하고, 알바를 찾아야 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는 결코 세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다짐하고 결심해도 마음이 헛헛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십여 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졸업을 앞둔 세밑 초저녁,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취업을 위해 계산대에 앉아 이력서를 쓰는데, 문이 열려 찬바람이 밀려왔다.


인기척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이력서에 집중했다. 동네 장사여서 단골이거나 가끔 오는 손님이거니 했다.


"나 모르겠어?"


포스기 앞에 서서 내민 물건을 계산하는데, 사내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튼튼한 몸집은 확실히 낯설었고, 이목구비는 어디선가 보았던 느낌은 분명했으나, 선뜻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빙그레 웃는 눈빛에 혹시? 하는 어림짐작이 퍼뜩 떠올랐으나, 실수할 수 없었다.


"누구신지?"


"도일이야. 몰라보겠어?"


잔바람에도 등 떠밀리는 막대기 몸으로 낡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버스를 타던 도일은 아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얼굴에서 제법 개기름마저 잘잘 흘러내렸다. 말끔한 양복 차림이, 누가 봐도 보육원 출신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옷차림에 적잖은 거리감이 느껴져, 보육원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시간이 허무했다. 녀석의 어느 구석에서도 버려진 아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힐끔 봐도 팔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목구멍까지 궁금증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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