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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자수성가했다. 1

by 이순직

"엊그제도 얘기했지만, 팀장님을 빼다 박았어요. 도플갱어에요."


황이 말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믿을 수 없었다. 쌍둥이라고 놀려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인데, 나와 상관이 없다니. 확신에 가까운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혹시나 하는 설레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고통스러워했다.


살다 보면 뜻밖의 행운을 발견할 수 있다지만, 나는 예외였다. 유전자 결과지를 멍하니 내려다볼 때, 희한하게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형제 살인이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 탓일까?


물론, 어릴 적 동네 교회의 성경 수업에서 숱하게 들었던 카인과 아벨의 잔인한 관계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방원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이나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처럼 지금, 현재, 곳곳에서 일어나는 형제 살인은 재벌가에서부터 기생수(기초생활수급자)의 가족까지 광범위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다.


닮은꼴 조 팀장에 대한 살의를 불현듯 순간순간 품었다는 솔직한 고백일 수도 있지만.


"퇴근 한 시간 전에 보고서를 작성하라니, 죽이겠다는 작정이잖아요? 팀장님이 단단히 작정하긴 했네요. 괜찮아요?"


황은 은근슬쩍 엉망진창 뒤집힌 내 속내를 떠보려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리액션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밀정이었다. 딴에는 그 짓마저 보람찬 업무일 수도 있으니, 대놓고 신경질 부리거나 호통치기도 애매했다. 일거수일투족이 거의 실시간으로 닮은꼴 조 팀장의 귀에 들어간다는 의심이 확신에 가까운 이상,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입사 몇 달 만에 사표를 내던지고, 깔끔하게 떠난 신입이 이 순간만큼은 부러울 따름이었다.


"길거리에서 그 새끼 마주치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맹세코!."


사표를 내던지면서 동물의 세계여, 안녕히! 제멋에 쾌재를 부르던 신입은 회사 밖도 동물의 세계임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가방끈이 길어도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욱하는 다혈질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나도 가볍게 사표를 내던지다니! 인생은 돌고 돌아도 어차피 돈으로 꾸려가는데.


"진작에 엑셀을 배워뒀으면 퇴근 시간을 맞출 수 있잖아요."


황은 앉은 자리에서 손거울에 얼굴을 집어넣고, 화장을 고쳤다. 예전 같으면 내 옆에서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더 이상 나를 남자로 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황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설었다. 비록 내가 먼저 방어막을 치긴 했지만.


"알아요? 엑셀에도 단축키가 있다는 거?"


충고인지 비아냥인지 알 수 없지만, 황은 룰루랄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 문 앞까지 걸어가더니 뒤돌아 툭 내뱉었다. 황의 비웃음에 가까운 엷은 미소를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껌딱지처럼 달라붙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대놓고 빈정거림까지! 인생 그렇게 살지 마라! 버럭,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지만, 당장 내 코가 석 자였다.


세상에 지름길이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엘리트 코스라고 부르든, 부모 찬스라고 부르든. 그 빌어먹을 지름길이 세상을 더욱 엉망진창으로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모 찬스로 대통령까지 해 먹는 경우가 어디 필리핀뿐이랴!


하긴 여전한 왕정국가들은 어쩌고? 태어나보니 어라? 왕자네! 공주네! 재벌가 외동아들이네! 딸내미네! 애당초 출발선부터 다른데다가 흑마술을 비롯한 온갖 제도들 역시 그들에게 맞춰져 있으니, 한번 기생수는 영원히 기생수에서 벗어나기 힘들지. 태어나자마자 자결할 수 없는 노릇이고, 어찌어찌 자의식이 생겨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나, 둘러볼 때는 이미 늦었다.


*


"선배! 이건 발설하면 모가진데, 사표 던진 마당에,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 상관없겠죠? 팀장이 낙하산이랍니다. 늙은이 회장하고 어떻게 얽혀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괜히 선배한테 올가미 씌우는 거 같기도 하고. 행운의 편지라고 생각하세요. 있잖아요? 영국에서 시작하여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준다는. 물론 불행도 있죠. 그나저나 팀장이 지금, 선배인 척하는 거, 아니죠? 나 퇴사했어요."


신입은 웃자고 농담했다. 불쾌했다. 비교할 게가 없어서 생김새로 사람을 가지고 노느냐고 윽박지를 수도 없었다. 신입은 이미 회사 밖 사람이라, 개미지옥에서 탈출한 여유로움을 드러냈다. 욕받이로 지낸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아무튼, 팀장한테 밤길 조심하라고 전해주세요. 벌써 막잔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포장마차를 나오면서 신입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나와 다를 바 없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주제에 얻다 대고 위로질이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었다.


"포도청은 어떻게든 해결되겠지요. 확실한 건 선배보단 목숨이 연장됐다는 거잖아요?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수 있겠죠?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신입의 뒷모습은 씩씩했다. 새파랗게 젊어서 허세가 틀림없다고 스스로 자신을 위로해도 우울했다. 전철에서 버스로 옮겨타고, 동네에 도착할 때까지 우울은 흔들바위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입사 동기인 신입과 팀장의 엇갈린 행보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닮은꼴 팀장은 탄탄대로를 걷지만, 신입은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권고사직이나 해고 통보라는 칼날이 언제 모가지를 위협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회사 분위기는 몇 달 전부터 심상치 않았다. 당연히 공채는 씨가 마른 터에 특채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팀장과 신입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신입이야 좌충우돌 어리바리 삽질하는 게 우습지 않았지만, 팀장은 달랐다. 나와 엇비슷한 나이인데도 날카롭게 눈빛을 갈고 다듬어서 신입에게 생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내 지시는 저마다 개인의 발전, 우리 부서의 뛰어난 실적, 나아가 회사의 번창을 위한 거니까 군말 없이 따르도록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놈이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쪽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말 뒤에 숨은 행동을 읽어내지 못하면 루저로 곤두박질칠 뿐이었다. 그렇다고 신입이 루저란 얘긴 아니었다. 서너 달 치 땟거리는 충분히 장만해뒀다는 신입의 호언장담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도전정신을 얼핏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내 눈이 삐었거나. 위기가 기회라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입은 충분한 자격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더욱 짙었다.


영양가 없는 그런 생각들을 너저분하게 늘어놓으며 터덜터덜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안쪽에서 노인을 발견했다. 보안등도 없는 골목 구석 음습한 어둠 안에서, 그림자처럼 인기척도 없이 꾸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도움이 필요한 간절한 눈빛이었다.


"어르신! 도움이 필요한가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네. 집까지 가야 하는데, 이를 어쩌노!"


노인은 내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아닌, 어중간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도 늙을 텐데요."


노인은 내 말에 얼굴을 똑바로 보며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런 놈도 있었어? 하는 표정이었다. 노인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고 보폭을 맞추었다. 천천히 걸었다. 요놈으로, 조놈으로 하는 노인의 손가락 방향 지시에 따라 골목길을 걷다가 낯선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어둠 속에서도 대문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우리 동네에 이런 집이 있었나…, 사뭇 의아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사 온 지난해 이후로 틈만 나면 산책이랍시고 팔다리 흐느적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렸어도 처음 보는 신기하고 이상한 대문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만 보는 나쁜 습성을 아직도 마저 버리지 못했구나! 자책까지 했다.


"젊은이. 고마우이. 내가 보답으로 준 건 요긴하게 쓰게."


"네?"


노인은 지그시 웃으며 바라보았고, 나는 받은 게 없어, 의심할 여지 없이 치매 노인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눈빛은 맑고 깊었다. 살만큼 충분히 살았을 나이인데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겠나? 젊은이?"


막무가내로 다짐을 받겠다는 투여서 암요, 그럼요,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인이 혹시라도 나 모르게 은근슬쩍 주머니에 뭐라도 찔러넣었나 싶어,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불 꺼진 집에 도착하자 노인은 까맣게 잊었다.


내일 또 팀장이 무슨 꼬투리를 잡아 못살게 괴롭힐까. 걱정이 앞섰다. 월급 받아 잘 먹고 잘살려고 다니는 건지, 급여란 허울 속에 숨은 스트레스를 받으러 가는지 알쏭달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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