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다. 김선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짓고서, 며칠 기다려보면 반드시 바람에 실려 오는 이야기라도 들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돈암동 밤은 깊어 갔다.
"목숨이 얼마나 모진데 말이 되는 소리야?"
"미셸 푸코에 따르면 정신병동 역시 감옥이지. 어쩌면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했어."
"마녀사냥도 그렇고, 조선 시대 무당에 대한 지배층의 시선도 마찬가지야. 웰컴 투 동막골에 등장하는 여일도 일종의 광녀잖아? 광녀 캐릭터는 남북 모두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이 미친놈들이라는 감독의 숨은 의도였지만."
저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그녀에 대해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작년 12월 22일 자정 한참 지난달 없는 깊은 밤, 강릉 경포대 모래사장에서 바다 쪽으로 곧장 걸어 들어간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더는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어느 작은 해변에서도.
2
그녀는 평범한 유년을 보냈다, 적어도 우리가 들은 바에 따르면. 무남독녀에 놀이터가 없는 동네에서 자라긴 했으나, 노을이 보현봉 정상에서 붉게 피어나는 저녁이면 골목 초입까지 달려가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렸으며, 악몽으로 잠을 설치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이 나이에 걸맞은 생활이었다. 대부분 어린 소녀들이 그렇듯 그녀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오로라를 좋아했으며, 공주풍의 드레스를 즐겨 입었고, 엄마의 엄한 표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이따금 눈물을 흘렸다, 떼를 쓰거나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막무가내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비비 인형을 닮은 미미를 파는 문방구 앞에서도 결코.
"애가 이쁘기도 하네요, 어쩜 저리도 착할까!"
동네 이웃들은 그녀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치원 선생들 또한 그녀를 특별히 눈여겨보지 않았다, 모든 어린 소녀가 그렇듯 그녀는 순종적이고,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며, 상황에 따라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정확하게 구분했다. 이 무렵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딱히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으나 박은혜와 연결된, 나이와 관계없는 질투에 관한 이야기다.
유치원 놀이방에는 많은 장난감이 있었다. 서부영화의 잔인한 인정사정없는 총잡이 악당, 혹은 배트맨의 조커나 해리 포터의 볼트모어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없는 이철수가 놀이방 지배자였다.
"내 꺼야!"
커다란 장난감 바구니를 힘에 겨워도 질질 끌고 다니며 남자아이들의 공룡이나 자동차, 레고 블록 따위들을 쓸어 담았다. 저항해보지만 이철수는 이미 쪼인트 까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뒤꿈치로 정강이를 정확하게 걷어찼다.
단순한 동작이고 효과는 엄청났다. 몇 명은 지나치게 크게 울음 터트리며 선생에게 고자질하지만, 상처가 없어 묵살당했다, 그는 유치원 원장의 하나뿐인 외손자였다. 모든 남자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은 뒤 한 명씩 호명하며 장난감을 한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절대로 주지 않았다. 쥐라기 시대를 살며 온갖 공룡들을 마음껏 호령하던 아이는 느닷없이 인류세(人類世)로 넘어와 포뮬러 원(F1) 레이싱에 참가하거나, 토착 왜구를 앞세운 본토 왜구들이 공성전(攻城戰)으로 진격하는 것에 맞서기 위해 레고 블록으로 산성(山城) 쌓는 임진왜란을 살다가 느닷없이 쥐라기로 떨어졌으니,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정강이 맞는 쪼인트를 이겨낼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이철수에게 잘 보이는 것. 간식으로 나오는 과자를 주머니에 아껴두었다가 주기, 자리 양보하기, 칭찬하기, 먼저 인사하기, 말대꾸하지 않기….
남자아이들의 변화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여자아이들에게 은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철수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남자아이들보다 빠르게 눈치챘다. 대부분 여자아이는 그 사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박은혜는 달랐다. 권력의 오른쪽에 선다는 것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와 철수 사이에 앉기, 눈웃음치기, 비음 섞어 말하기, 치마 입기. 유치원 밖에서 만나기, 이쁜 척하기…, 철수에게 무조건 복종하기. 그러나 결국 그날이 왔다, 질투의 대환장 파티 저녁, 꿈에도 없는.
*
"삶은 그 순간이 지나면 후회하면서 사는 것이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 모든 철수가 그렇듯 이철수도 내게 말했다, 멋진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물론 나는 그를 만날 때 예의를 지켰으나, 내게 일본식 예의를 요구했다. 나는 늙은 아버지가 있었고, 풍기 장날 할아버지를 기억하기에 거부했다. 또한 이철수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것조차 지금은 기억하지 못했다.
3
"이거 가져."
철수가 등 뒤에서 내보인 것은 상처 없는 미미였다. 그녀는 동그랗게 눈 뜨고 상처 없는 미미와 철수를 번갈아 보며 고개 갸우뚱거렸다. 놀이방에 하나뿐인 상처 많은 미미가 아니라, 문방구 종이상자 안에서 그녀에게 날마다 손짓하던 순결한 고결한 미미, 오로라였다. 그녀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시작하는 우아한 떨림이 손가락 끝마디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비록 느꼈다고 할지라도. 철수의 행동이 프러포즈라는 걸 단박에 알아버린 쪽은 박은혜였다.
"내가 가질래!"
철수의 손에 들려 허공에 잠시 멈춰 선택받기를 기다렸던 미미는 찰나에 박은혜의 손으로 넘어갔고, 방글방실 웃었다, 은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라 철수는 수줍음도 잊은 채 미미를 다시 낚아채지 못하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살짝 달아올랐던 홍조(紅潮)를 애써 감추며, 소유권이 넘어간 미미, 오로라 공주를 힐끗 넘겨다보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허둥대던 철수는 난처한 상황을 피하려는 의도로 뒤돌아 냅다 원장실로 도망갔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의 눈이 그녀와 박은혜로 모아졌고, 몇은 미미를 보았다.
모래바람이 비장미(悲壯美)마저 불러일으키는 서부영화의 황량한 언덕 위 마주 선 두 총잡이처럼, 그녀와 박은혜는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순종적이고 눈물 많은 그녀가 아니었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손톱 세우고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었다. 박은혜도 미미를 가슴 깊숙이 파묻고, 그녀를 쏘아보았다.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누군가 침을 꼴깍 삼켰다. 턱수염도마뱀처럼 박은혜는 어깨를 최대한 부풀리고 절대 지지 않겠다는 듯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가 또 생침을 꼴깍 삼켰다. 팽팽한 긴장감이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마저 멈추게 했는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너 가져!"
박은혜가 돌연 미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승리를 선언했다. 철수가 없는 놀이방 방바닥에 꼬꾸라진 미미는 더 이상 애정의 징표도, 프러포즈의 선물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도 문방구 종이상자의 성(城)에서 순결하게, 고결하게 손짓하던 미미, 오로라 공주가 아니었다. 모든 여자아이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며 온몸이 엷은 손때로 반들반들 해지고 옷은 여기저기 뜯어지고, 머리카락 빠지는 상처 많은 미미보다 못한 실패한 고백의 상징일 뿐이었다.
모든 아이에게 거인으로 각인된 뚱뚱한 원장이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고, 역시 천천히 미미를 집어 올렸다.
"에그, 사달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이렇게 내동댕이칠걸."
원장은 먼지라도 털듯이 엄청나게 큰 손으로 미미를 쓱쓱 닦더니, 아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기계적인 미소를 한 번 짓고는 원장실로 걸어갔다.
*
박은혜의 승리가 분명했다, 그녀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녀 탓이 아니었다. 도망친 이철수의 비겁함이 낳은 참사였다. 지붕 낮은 술집에서 그녀에게 전말을 듣던 우리 중 장욱진은 다소 엉뚱하나 기발한 말을 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너가 세상에 맞서지 않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원장 앞에 당당히 서서 철수가 나한테 준 건데요? 그리곤 빼앗는 거야. 울어버리는 거지. 그러면 실패한 고백의 상징이 아니라 삽시간에 쟁취한 사랑의 증표가 되는 거지. 그거야말로 박은혜의 질투에 대한 철저한 복수이면서 동시에 비겁한 철수의 명예 회복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비록 거인이라도 말이지."
김용덕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주를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안동역의 그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4
"너 또 경희를 생각하지? 인마, 버스는 이미 떠났어. 정신 차려!"
장욱진은 버럭 화를 냈다. 이충환은 슬쩍슬쩍 웃었다. 삶은 우리를 지나가는 것, 내가 발 딛는 곳이 과연 우리 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