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2화
5
"떠난 버스는 분명해. 기회는 늘 있는 건 아니야."
이충환은 우리 중 입이 가장 무겁지만, 또한 거침이 없다. 그녀가 가장 신뢰하는 사심 없는 이충환, 구례 역장실에서 나보다 먼저 눈 맞추고 웃는.
"그런데 말이야, 요즘 떠도는 소문이 있던데? 물론 거짓일 수 있어. 인철수가 침을 흘린다고. 뭐, 너는 이뻐. 나도 인정. 그렇지만 인철수하고 너하고? 어울릴까?"
장욱진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까지 살폈다. 그녀는 일곱 잔째 소주잔에 맹물을 마시고 있었다. 마당발 장욱진과 나는 인철수를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 들었다.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자리까지 잡아주고 집까지 에스코트한다며?"
"바람이야, 스치고 지나갈."
그녀는 단호했다, 박은혜에게 미미를 빼앗기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마지막 여덟 잔 맹물 소주를 들이켜고 막차를 놓치기 싫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빼고 젊은 우리는 시간과 상관없이 살고 있었다.
"중앙도서관이랑 중앙 모텔이랑 뭐가 다를까?"
장욱진은 그녀가 비운 자리를 힐끔거리며 미묘한 엷은 입웃음을 지었다. 녀석의 설레발은 늘 핀잔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우리는 중앙 모텔이라는 말에 이미 홀려 다들 남자라 저마다 엇비슷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
문을 열자 모멘토 옴므가 은밀하게 몸을 감쌌다, 인철수는 익숙했지만 그녀는 낯설었다. 숱한 연인들이 거쳐 갔을 더블침대는 지저분했고 욕실은 깨끗했다. 물론 연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방에 들어오면 누구나 굶주린 짐승이 되기 때문. 침대 벽면이 커다란 거울, 천장도. 인철수는 형광등 끄고 침대 머리맡 수면등을 켰다, 창밖은 칠흑 어둠이 벽돌처럼 겹겹이 쌓여갔다.
"먼저 씻을게."
인철수가 욕실로 들어가자 그녀는 어제 침대에 누웠던 여자처럼 천장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반듯하게 누워있는 한 여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살짝 바른 립스틱 분홍색, 빨간 재킷, 튼튼한 청바지, 가늘고 긴 다리.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인철수는 벌써 흥분한 걸까, 그녀는 입술을 조금 얼어본다, 빨갛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미미를 낚아챈 박은혜 바라보는 이철수의 멍한 얼굴이 비로소 귀엽다는 생각에. 시간은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빨간 재킷에서 오른팔을 꺼냈다, 살냄새와 엷은 땀 냄새. 느닷없이, 사람은 모두 늙는다…, 나도 인철수도 이철수도. 그녀는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낮게 되살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울 안에 갇힌 한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씻어?"
팬티만 입은 인철수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철수의 젖꼭지 옆 가늘고 긴 서너 가닥 털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침대 벽면 거울에 인철수는 보이지 않았다.
"철수야, 거울 속에 누가 있지?"
"자기하고 나하고."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작고 단단한 물방울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철수는 수건으로 연신 문지르면서 버럭 짜증을 냈다. 이런, 씨발! 신경질적으로 젖은 수건을 내팽개치고 마른 수건을 집어 들었다.
"철수도 거울 속에 있는 거야? 정말?"
"그럼, 자기하고 나하고."
그녀는 침대 벽면 거울을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누워있는 여자뿐,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서 어둠보다 무서운 시간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철수의 다부진 어깨와 핏줄 살아있는 팔과 튼튼한 종아리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안 씻어?"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방울들은 여전히 마른 수건조차 비웃으며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수면등은 은은했다. 그녀는 침대 벽면 거울을 바라보며 거울 속에 없는 철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우리 사랑하는 걸까, 몸이 궁금한 걸까?"
6
"딱, 거기까지!"
김용덕은 단호하고 절도 있는 손사래까지 치면서 모두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선을 넘는 것은 불경죄와 다름없다는 강경한 눈빛 탓에 저마다 고개 끄덕였으나 장욱진은 특유의 장난기 가득 섞인 짓궂은 표정을 감추거나 멈추지 않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몰라? 사람은 어쩔 수 없어! 분위기에 인생 흘러가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일이든 일단 단정 짓고 끝까지 고집부리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비록 어느 정도 무의식적으로 저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모두 난감했다. 어떤 핀잔 따위도 아랑곳하지 않는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중 가장 똑똑하고 꼼꼼하다는 사실도. 게다가 오지랖 넓어 정릉골 불량배에게 회칼 맞을 때도 용감했다.
"수상한 건 인철수가 왜 거울에 없는 거야? 귀신도 아니고."
머리칼 짧게 단발로 커트하고 청바지에 넉넉한 티셔츠 입어 드러나지 않게 유방 감추며 사는, 항상 남자들과 어울려 어느 사이 우리 중 하나가 되어버린 강선미가 오른손으로 턱 괴며 김용덕을 건너다보았다, 빚쟁이 투로.
"당사자한테 물어야지, 내가 어떻게 아나?"
연대보증인도 아닌데 왜 해명해야 하느냐고 되받아친 김용덕은 그제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아리송하긴 마찬가지였다. 시쳇말로 유령이 아니고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온갖 과학이 발달한 요즘 세상이 아니더라도 거울은 예로부터 있으면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그대로가 아니던가.
"이야기하면서 실은 이야기를 감추는 거 같은데? 그녀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 않아?"
장욱진은 자신의 말에 꽤 흡족해하며 의기양양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중앙 모텔, 그 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미 한껏 달아오른 몸뚱이가 두 개에서 하나로 변신 로봇처럼 합체가 되었는지도. 몸이 하나니 천장 거울을 아무리 훑어본들 두 개일릴 리는 없잖아?"
이충환 역시 그럴듯한 해석이라며 주석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씻지도 않고? 강선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혹시 상징 아닐까?"
"무슨 상징?"
"안드로겐과 에스트로겐 알지?"
"남성과 여성 호르몬이잖아?"
뜬금없는 호르몬 얘기에 장욱진도 호기심이 돋는 모양인지 강선미의 쌍꺼풀 눈을 바라보았다. 장욱진은 오래전부터 강선미가 남방계 핏줄이라 믿고 있었다.
"여자에게도 안드로겐이 생성되고 남자에게도 에스트로겐이 만들어진다는 거 다들 알지? 비록 미량이나마. 하지만 날씨 따라 기분에 따라 미량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다량이 된다는 것도 알겠네?"
강선미는 자신의 추론이 가장 합리적이고 신뢰할 수 있을 거라 순간적으로 확신했다.
요컨대 김선미의 논리는 간단했다, 안드로겐 속의 에스트로겐처럼 또는 에스트로겐 속의 안드로겐처럼 사람은 저마다 수시로 바뀌는 이상형이 있으며 실체로서 인철수와 심리적 생물학적 형상으로서의 인철수가 있다…, 실체 인철수는 눈에 보이지만 심리적 생물학적 인철수는 거울 속에 없다…, 거울 속에 없는 인철수는 이상형이 아니다….
"사람 무지 헷갈리게 하네. 그렇다 치고, 무슨 상징?"
이충환은 짜증을 내고 장욱진은 이것 봐라, 잘도 갖다 붙이네, 혼잣말했다.
"원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피해 갈 수 없는 성인식이랄까? 무의식 깊이 뿌리 박힌 그 어느 날의 성인식을 이야기에 담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 사랑하는 걸까, 몸이 궁금한 걸까 중얼거린 거라고?"
장욱진은 탐탁잖음을 한껏 담은 목소리였다.
"맞아!"
"박은혜의 질투 대환장 파티와 무슨 관계가 있는데?"
김용덕은 얼토당토않은 추론이며 뚜렷한 대안도 없이 그녀를 잘못 읽고 있다 믿었다, 그녀와 같은 여자로서 김선미가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가설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 이상 오리무중이야. 더구나 그녀 이야기가 아직 한참 남았잖아?"
나는 중재자처럼 모두의 동의를 구했다. 고개 끄덕이는 쪽도 있지만 의혹의 눈빛 내보는 쪽도 있었다. 어쨌든 사람 머릿수만큼 제각각 해석이 있을 것이고 그녀에 대한 판단 역시 해석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각인될 것이 뻔했다. 특히 이철수와 인철수의 희비극적 만남을 어쩌면 내가 설명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직 그녀로부터 나만 들었던 이야기라 모두 모르고 있어, 괜한 부담감마저 들었다.
7
외나무다리, 마주 선 두 검객, 안개꽃처럼 제각각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팽팽한 긴장감, 멀리 조금씩 흐릿해지는 저녁놀, 산중에서 들려오는 허기진 올빼미 울음…. 맞선 두 철수는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황량한 캘리포니아 어느 언덕 위에 마주 선 총잡이 감싸던 죽음의 전주곡 모래바람을 그녀는 짧은 순간 보았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철수는 박은혜에게 느닷없이 미미를 빼앗겨 당황과 황당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르던 수줍음 많은 소년이 아니었다. 이철수에 비해 한 뼘 정도 키가 큰 인철수 역시 떡 벌어진 어깨 으쓱거리며 매섭게 쏘아보았다.
상대가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거침없이 진검(眞劍) 뽑아 들고 바람이 나뭇가지 스치듯 휘두를 기세였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다는 일전불퇴(一戰不退) 결의에 찬 신념이 불타올랐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의 실수도 곧바로 처참한 패배로 이어지는 순간이라 아주 작은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는 철저한 자기 통제를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진검(眞劍)보다 근육이 더 팽팽하게 긴장했다. 잔혹한 살기마저 내뿜는 눈빛,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이 동네 얼씬거리지 마라. 마지막 경고다!"
"택도 없는 소리!"
한 뼘 키 작은 이철수는 기개(氣槪) 굽히지 않았다, 요즘 말로 악바리 근성. 인철수는 여유로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나 계획은 있지, 얻어터지기 전까지. 천천히 중얼거리며 고개 살짝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진검 손잡이에 손을 슬그머니 가져갔다. 이철수 역시 진검 손잡이를 잡고 한술 더 떠서 슬쩍 당겼다. 날카로운 칼날이 노을을 받아 붉은 핏빛 내뿜었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코미디에 가까운 지금 상황이, 두 철수의 명예와 목숨 건 대결이 가져오는 팽팽한 긴장감과 잠시 후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마구 뒤엉켜 말 그대로 엉망진창인 철수들의 정신 상태를 보자 현기증이 느닷없이 몰려왔다. 철수들의 날카로운 대결이 헬리콥터 앞에서 비현실적으로 쉼 없이 도는 커다란 팽이처럼 다가왔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단 한 번 아주 작은 판단이나 실수가 도도한 강물의 거대한 흐름을 바꿔놓는다고 박은혜 질투의 대환장 파티에서 익히 경험한 터라 이철수는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그 저녁의 참혹한 기억은 곧장 엄청난 상실의 공허함으로 이어졌고 자신의 가치를 서슴없이 추락시키는 짓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급기야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표 숱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치욕적인 뼈저린 아픔을 잊을 수 없었다.
인철수 역시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냄새를 일찌감치 포기할 수 없었다. 골목 깊은 길을 걸으면서 어둠과 섞인 머리칼 향기를 맡을 때는 자신에게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아주 오래된 본능이 불끈불끈 아랫배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지금껏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다는 엄청난 발견에 아드레날린이 치솟았다.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과 환희가 눈앞에서 춤추고 있었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외나무다리, 마주 선 두 검객, 안개꽃처럼 제각각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팽팽한 긴장감, 멀리 조금씩 흐릿해지는 저녁놀,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그때 누군가 벌컥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왔고 살갗 아리는 예리한 겨울바람 한 줄기가 칼날처럼 빠르게 목덜미를 스쳤고 두 검객은 거의 동시에 진검을 칼집에서 빼내 상대에게 휘둘렀다. 거의 같은 순간에 서로를 공격했지만 벌러덩 의자 뒤로 넘어져 뒤통수에 엄청난 통증을 느낀 쪽은 이철수였다, 뇌진탕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과 뒤통수가 부딪쳐 내는 그 엄청난 마찰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녀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지금 뭔 지랄들이야!"
"나가서 싸워!"
"요즘 젊은것들은 세상 무서운 게 없다니까, 말세야, 말세…."
야비한 관극평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와 잦아지기도 전에 이철수는 의외로 입가에 엷은 웃음을 담고 천천히 일어섰다, 흡사 배트맨과 맞서는 조커의 그것과도 같은. 더럭 겁을 집어먹은 쪽은 그녀였다. 이철수에게서 마조히스트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어갔다.
"끝장 봐야지? 나가자. 재미있겠어."
이철수는 출입문 쪽으로 서너 걸음 천천히 걸으면서 고개 돌려 뒤를 보았다. 엉거주춤 당황한 기색이 분명하고 또렷한 인철수는 이철수의 끈질김 혹은 포기하지 않음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선빵 하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겁먹을 줄 알고? 그래, 나가자!"
인철수는 기 싸움에서 결코 무릎 꿇을 생각이 없었다. 느린 스타카토 박자에 맞춰 끊어지는 철수들의 걸음이 다분히 희극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불현듯 결말이 궁금했다, 소보루빵은 차갑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