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경험 첫편지

캘리포니아 5화

by 이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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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욱진과 김용덕은 은근슬쩍 신입들의 뿌리내리기를 유도하는 칭찬 쏟아냈고 이충환은 못 마땅 표정 숨기지 않았으며 김선미는 살벌한 평소와 달리 분위기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낌새 눈치채고 연신 그녀를 힐끔거렸다. 습작 토론회라기보다는 독서 토론회에 가까웠다.


가령 김수영과 서정주를 비교하면서 민족이나 공인으로서 시인, 시가 삶에서 괴리하는 현상, 선전도구로 전락한 시…, 등등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을 마구잡이로 꺼내놓으면서 서정주에 대한 심판자인 듯 악담 퍼붓는, 자리에 없는 이를 상대로 하는 뒷담화는 누구에게도 상처가 아니어서 설레는 여행길 신바람 나는 휴게소 트로트에 어깨춤까지 불러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좋은 게 좋다…, 시(詩)야 한두 편 가지고 잘 썼네 마네 떠는 것도 우스운 꼴이고 더구나 배우는 단계가 아닌가…, 무뚝뚝하고 반항기 많고 제 잘난 맛에 찌든 이미지로 덧칠해진 문창반에 가입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인연이 중요하지 그깟 시(詩) 나부랭이가 무슨 대수냐….


"초등학생 수준이야."


이윽고 그녀가 한마디 하자 분위기를 더없이 냉랭해져 살얼음판 걷는 듯 신입들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 어딨냐?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지. 욱진아, 그렇잖냐?"


김용덕은 그녀에게 너무 거칠게 나간다고 눈짓하면서 도움 요청했다.


"당연하지. 짐승도 아닌데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나."


장욱진도 대충하라는 눈짓 그녀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보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수는 무대에 올라가면 눈빛부터 달라져. 우린 시 앞에서 당연히 그래야 하고."


"저도 동감이요!"


김선미가 덧붙였다. 장욱진과 김용덕은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해버려 입도 뻥긋하기 어려워졌다. 아무리 반항기 많다 해도 여기서 혼잣말이라도 투덜거리면 그녀에게서 날아올 예리한 단검들이 수도 없이 가슴에 마음에 사정없이 꽂힐 것이 분명했다, 비록 뒤풀이 때 풀어지긴 하지만.


"아무리 초등학생이라도 자기 시선이 있어. 엄마나 아빠의 시선이 아닌 자기만의 것. 자기만의 배고픔, 자기만의 고독, 자기만의 간절함, 자기만의 기쁨. 그런데 이건 받아쓰기한 것 같잖아? 신문 기사에 갇혀서. 말하자면 인식의 한계가 뚜렷해서 웬만한 충격요법으로도 평생 고치기 힘들어. 평생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서 목책에 갇힌 양 떼처럼 살 수밖에 없어."


냉정하다 못해 더할 나위 없이 쌀쌀맞게 말하자 그녀에 대한 달콤한 환상과 섣부른 상상이 삽시간에 사라지는 걸까, 신입들의 표정이 일사불란한 제식 동작처럼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순직은 연거푸 불시착하는 비행기에도 실망하지 않고 뒤포를 향해 비행 멈추지 않으면서도 탁자 위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기 싸움 흥미롭게 힐끔거렸다.


당장이라도 자리 박차고 나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신입들은 딱딱해졌다, 굳어졌다. 분위기 무겁게 가라앉았다. 옆방 현사반에서 크고 시원시원한 박철수의 웃음이 검은 분위기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누군가 뒷수습을 해야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한 수 배운 거라고 생각해. 넓게 보면 우리 메이퀸 판단도 하나의 자기 시선이자 관점이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만 끝낼까?"


이충환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두 손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벼운 고갯짓 했고 두 시간 지났어, 그만하자, 장욱진과 김용덕도 덧붙였다. 이순직은 마지막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역시나 불시착. 뒤포로 갈까, 송백으로 갈까. 누군가 말했고 가방 챙기고 어지러워진 탁자 위 대충 정리하고 이리저리 모두 부산하게 움직였다, 문이 슬그머니 열리는 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막걸리에 파전이면 뒤포야. 닭볶음탕에 소주는 어제도 먹었잖아? 그래, 오늘은 뒤포다. 왁자지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문창반 빠져나와 긴 복도 지나고 계단 내려가 학생회관 빠져나와 뒤포로 방향 잡아 두세 명씩 걸음 맞춰 이런저런 얘기 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내려가는 그들 옆에 형설재가 버티고 있었다.


형설재 입구에 서너 명씩 모여 앉아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사법고시 준비생들. 육법전서가 삶의 유일한 나침반이라 여기는 것까지야 저마다 선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나침반이라고 꼴리면 떳떳한 정당한 기준 없이 멋대로 확대해 굵어진 머리통 막무가내로 들이밀며 떠벌리고 주장할 터인데 과연 저들에게 시(詩)는 무엇일까, 행렬 맨 뒤에서 혼자 걷던 이순직은 더듬었다.


아니 저들 각자에게도 법은 평등할까. 문학을 만지는 손보다 법을 만지는 손이 과연 더 깨끗할까…, 그녀 말처럼 자신들의 바운더리 안에서 목책에 갇혀 일생을 주먹 휘두르며 산다 해도 그것이 과연 죽으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자신의 진정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독재와 권력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기 십상인데 조금도 의심 없이 삶의 승자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 믿는 어처구니없는 청춘은 또 무엇인지….


"신입들 다들 어디 갔어? 너랑 오지 않았어?"


장욱진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신입들의 행방에 대해 마치 죄수 풀어준 교도관 질책하듯 이순직에게 따져 물었다. 김용덕과 이충환도 어이없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토론회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부러 딴전 피웠으니 당연히 신입들 다독이며 토끼몰이하듯 데리고 와야 한다는 당위론에 선뜻 반박할 수도 없었다. 이순직은 난감했다. 당연히 그녀가 벌려놓은 신입 축출 사태를 적당히 안전하게 수습하리라 믿은 모양이었다.


"탓하지 마. 일부러 그랬으니까. 안 그래도 벌떼처럼 달라붙으려는 떠중이들이 많아서. 메이퀸이 뭐라고…."

그녀는 무심하게 툭 내뱉고는 먼저 미닫이를 열었다. 앉은뱅이 기다란 직사각형 탁자 네다섯 개 놓인 풍경 속에 인철수와 박철수가 마주 앉아 술잔 기울이고 있었다. 빈 탁자가 없어 그들 옆 탁자에 자리 잡았다.


"야, 문창반! 니들은 맨달 책 속에 고개 처박고 살잖아? 육체의 고통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하회탈춤 가르쳐줄 용의는 있다!"


살짝 오른 술기운 빌려 인철수는 그녀가 들으라는 듯이 호기롭게 말했다. 이미 지난해 여름 몇은 배운 터라 인철수의 말이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수작임을 다들 알고 있었다. 오늘은 어긋나지 않았네, 뒤포로 올 줄 알았어. 박철수가 실실 웃으면서 혼잣말했다. 평소보다 더 아프게 얘기하긴 했어. 내일 문창반에 신입들 나타날까? 나라면 종적을 감추지. 해가 내일 떠봐야 알 수 있는 거 아네요? 심하긴 했어.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이순직은 물 만난 붕어처럼 연거푸 막걸리를 들이켰다. 낮술로 시작한 탁자는 패잔병처럼 온몸이 흐느적거렸고 미닫이 밖 골목에 땅거미가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은 하루가 저물고 있다는 걸 누구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15


"우리는 저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연결되어 있어."


이충환은 장욱진의 말투를 흉내 냈다, 말함으로써 단정 짓고 확신하는. 아련한 눈빛으로 창밖 한강 내다보는 표정은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커피는 이미 식었다. 김선미는 도착할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 오지 못할 거라는 짐작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출입구 뻔질나게 쳐다보던 장욱진은 못내 아쉬운 표정, 괜한 심술 나는지 입술 삐쭉 튀어나왔다.


"돌싱이 너무하네. 하긴 바쁘다고 했으니…."


장욱진은 못내 아쉬운 표정, 석 달 전에 보았으니 얼굴 보고 싶을 만도 했다. 딱히 그렇다고 확신하거나 결론 내릴 수 없지만 김선미가 무슨 철수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철수와 결혼한 것이나 돌싱으로 돌아온 것도 그녀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둘은 눈에 띄게 붙어 다녀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오해까지 살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영향 관계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그다지 황당하지 않았다.


또한 그녀가 UCLA로 훌쩍 떠나버리자 김선미 역시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는 군 생활하던 우리에게 의아함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녀 뒤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소문부터 애당초 청강생이라 옆 동네 대학을 기웃거린다는 얘기,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한다는 떠다니는 말들…, 믿을 수 없는.


교환학생으로 떠나기 몇 주 전에 만났던 그녀는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시작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나 셀렘보다 피곤과 우울이 얼굴 가득했다. 훨씬 나중에 미국에서 보내온 편지에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 되돌아보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인데 막상 당시에는 여러모로 마음이 쓰였던 모양.


"전화할까?"


장욱진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동의 구하는 눈빛으로 김용덕을 바라보았다.


"사정이 있겠지, 못 갈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허전해서, 앞니 빠져 헛바람이 들락날락하는 기분이라니까!"


"다음에 만나면 되지, 애인도 아니면서 보채냐?"


"사랑하는 후배잖아. 혹시 오다가 교통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


"작작 좀 해라!"


장욱진은 김용덕의 핀잔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에 몇 방울 겨우 남은 커피 홀짝이면서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처럼 단단하게 이 땅에 박혀 있는.


16


친구들아, 군 생활 빡빡하게 보내고 있냐? 언니는 요즘 정신이 없다. 겨우 구한 아파트도 너무 허름해서 말이 아니다. 조셉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지만 불안하지만 동양인은 처음이라며 소용돌이치는 눈빛 너희들은 모를 거야, 게다가 난 여자잖아.


해가 지면 위험해. 다행히 허쯔를 룸메이트로 만들었지. 그 애도 나처럼 혼자 왔는데 나름 이곳 생활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거든. 남쪽으로 두 블록만 가도 낮에도 위험해. 처음엔 몰랐지. 조깅한다고 며칠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가 숨이 차서 멈춰 헐떡이고 있는데 조셉을 만났어.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이 미친놈이 느닷없이 보란 듯이 고추 꺼내 오줌 누는 거야. 아침 햇살 때문인지 크고 검은 고추가 메기처럼 보였어. 온몸에 참기름 바른 것처럼 어쩜 그렇게 윤이 나서 반들반들할까. 물론 모든 흑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야.


조셉만 유독 그래. 아무튼 요즘 오후에 알바도 한다. 한국인 부부가 하는 식당인데 서빙하는 일이야. 양강도 혜산이 고향이래. 걸핏하면 고향 이야기를 꺼내놓는데 내가 볼 때 혜산시 당 자금을 삥땅 쳐서 이곳으로 튄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식당을 차려? 더 재미있는 건 뭔지 알아? 허쯔가 학교에서 한국인 행세를 한다는 거야. 한국말 하나도 못 하면서.


그런데도 다들 속아 넘어가. 자기는 오리지널 한족이라고 믿는데 내가 볼 땐 만주족이 아닐까, 짐작해. 여진족이라고도 하잖아? 그렇게 따지면 한국인 행세를 해도 뭐라 말 못 하잖아? 너희들이 이 편지 읽을 즈음 나는 또 어떤 생활 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워낙 변화무쌍하거든. 한국 떠나기 전에 이철수 만났는데 날 엄청 힘들게 했어. 참, 이철수를 너희들은 모르겠구나. 암튼 박은혜 끌어들여서 둘이 짝짜꿍하라고 했지. 시간 나고 힘들고 너희들 생각나면 또 편지할게. 총총총….


부대 복귀하기 전 플라스틱 생수병에 소주 담아 민통선 밖에 있는 장욱진 면회 가서 받아 든 편지, 연병장 끄트머리 나무 의자에 앉아 읽는데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조셉, 양강도 혜산, 여진족, 크고 검은 윤이 나는 메기…, 따위들이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에 두 발 디디고 무사히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 그녀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로지 허쯔가 남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쯔(子)가 남자아이를 뜻하는 말이 아니던가, 쯔(姿)를 쓴다면 다행이지만. 설령 남자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햇살이 따가웠다.


"넌 보직이 뭐냐?"


"다찌차 몬다. 운전병이지. 넌?"


"측지부대잖아. 측량하러 돌아다녀."


그녀와 아무 상관 없는 말들만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서둘러 민통선 안쪽 깊숙한 골짜기에 똬리 틀고 있는 부대로 복귀했다. 두 번째 편지는, 문창반 후배가 복사해서 보낸 것이긴 하지만, 하루 종일 땅바닥 뒹굴고 나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어스름 속 유격장 야영지에서 반합에 짬밥 먹으면서 읽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와. 가뜩이나 비좁은데 걸핏하면 남자를 데리고 와, 허쯔가. 조용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둘이 끌어안고 아주 발광들을 해. 뭐, 자기 피에는 마피아가 흐른다고? 이젠 하도 겪어놔서 그러려니 하지만 가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 서. 허쯔를 쫓아내고 싶지만 월세가 만만치 않아 이럭저럭 견디려고 해. 한국은 날씨가 어때? 여긴 계절이 없어.


들은 얘기론 태평양 때문이라네. 어제는 금문교에 갔다 왔어. 볼만 하더라. 그런데 정작 놀란 건 햄버거였어. 너무 커서 다 먹지도 못하고 쩔쩔매는데 한 푼 주세요, 누가 외치는 거야. 식당 여주인이 엄청 괄괄한 데다가 목소리가 크거든. 돌아보니까 미국 거지가 우리를 보고 있었어. 홈리스라고 하잖아? 이번엔 눈을 맞춰서 다시 한 푼 주세요, 그러는 거야. 한국말로. 갑자기 무섭더라. 미국 거지가 한국말로 한 푼 주세요 하니까. 여주인이 일 달러 주고는 도망치듯 걸음아 날 살려라, 냅다 자리를 피했지.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도 자본주의야.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나쁜 마음먹으면 어떤 해코지 할지 모르잖아? 동네 건달들이 권총 가지고 다니는 나라가 미국이야. 그래도 아직은 여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 허쯔가 알래스카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얘기했나? 오로라 보고 싶데. 하긴 나도 보고 싶긴 해. 시(詩)를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아. 삭혀야 할 감정들이 너무 많아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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