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타운 늘봄식당

캘리포니아 그녀 7

by 이순직

20


믿어왔던 것들의 배신, 싫든 좋든 최소한 겉으로 한때 추종까지 했을지도 모르지만 비단 그녀만이었을까? 그녀를 포함한 우리 모두 같은 부류가 아니었을까, 단지 지금은 이 땅 떠나 믿어왔던 것들의 배신을 경험하고 남은 우리는 언젠가 들이닥칠 배신할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는 것.


인도교 폭파로 서울에 갇힌 사람들 속에서 김성칠 선생 역시 믿어왔던 것들의 배신을 처절하게 목격하지 않았을까. 밤새 대포 소리, 총소리에 시달리면서 날이 밝으면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쌀을 마련하기 위해 돈암동 거리 골목 걷는 서울에 갇힌 사람들….


일요일 오후 연병장에 내리꽂히는 화살 햇살. 김 중사의 배신감은 또 어땠을까. 알파 중대는 물론이고 백의리까지 소문나버린 육 개월 짧고 화려한 아내의 외도 앞에서 느껴야만 했을 믿어왔던 것들의 배신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강철수의 죽음으로 연대에서 혹독한 감찰에 시달렸던 브라보 중대의 험악한 꼴을 목격했던 터라 중대장은 김 중사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노심초사였다, 당연히 알파 중대 전체가 숨죽인 채 더없이 고요하고 조용했다, 태풍의 눈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김 중사는 평소보다 말수 부쩍 줄어들었고 가끔 느닷없이 얼굴이 창백해졌으며 멍한 표정으로 광산골 깊숙한 골짜기를 그 지독한 어둠 속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그녀는 어떤 믿음이 배신당한 걸까. 캘리포니아 하늘 아래에서 느꼈을 서울 하늘의 배신감, 직장이 평생을 책임질 거라는 믿음은 아닐 터이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레드 콤플렉스에 갇혀 미래는 내다보지 못하고 한 목소리로 과거에 묶인 인식을 드높이는 가치관이 만들어내는 삐딱한 현실, 혹은 다카키 마사오에 대한 광신적 추종 세력에 의해 교육받았다는 속죄에 가까운 자신에 대한 배신감….


민통선 안에 거동 수상자가 출몰했다는 첩보, 오 분 대기조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헐레벌떡 단독군장 하고 행정실 간이 탄약고에서 실탄 박스 챙기고 연병장 서둘러 가로질러 60트럭에 올라탔다. 모두 가쁜 숨 몰아쉬고 있었다. 버섯이나 약초 캐러 무단 침입한 민간인이 뻔하지만 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촌각 다투는 긴박감 속에서도 김 중사는 지루한 표정이었다.


며칠 전에 동영상 하나를 봤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아프리카 대초원 세렝게티, 화면 가득 엷게 퍼지는 처연한 저녁 빛들, 오직 한 그루 나무, 잔바람에 쉽게 쓰러지는 풀잎, 그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잎들. 화면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절룩거리는 거대한 일런드를 보여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절룩절룩 느린 걸음으로 걷는 일런드…, 걸핏하면 오른 발목 겹질리는 이순직을 떠올렸어. 감정이입은 아니야, 단순한 연상작용일 뿐. 달리지 못하는 일런드는 느린 절룩 걸음으로 어디로 가는 걸까. 자기만의 안전한 장소로 가는 걸까, 화면 속도는 일런드 걸음만큼 느렸어. 침을 꼴깍 삼켰지. 허쯔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어.


김철수는 북쪽 땅을 혐오하고 저주했어.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지역신문에 디지털 코인이라는 새로움에 대해 기사가 났어. 일런드는 어디로 가는 걸까, 느린 걸음으로 야생의 생존을 위해. 조셉은 오늘도 어김없이 코리아타운 늘봄식당 앞에서 얼쩡거리더라. 일런드에 초점 맞추던 화면이 조금씩 넓어졌어. 일런드는 처연한 저녁 빛으로 길게 그림자 만들어내는 나무를 향해 곧장 느리게 한 발 한 발 힘겹게 옮기며 걸어갔어.


나무 그림자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떠돌이 수사자 한 마리 옆에 반쯤 뜯겨 갈비뼈 앙상하게 드러낸 아프리카 혹멧돼지. 떠돌이 사자는 포만감에 긴 하품 하며 일런드를 바라보았어, 절룩거리며 곧장 다가오는. 나도 모르게 생침이 꼴깍 넘어갔어. 허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사자와 거리 1미터 정도, 이윽고 일런드는 멈춰 섰어. 여전히 땅바닥에 배를 깔고 포만감 즐기는 사자는 일런드를 가만히 바라보았어, 귀찮은 듯 파리 쫓으려는 듯 거대한 머리 두어 번 흔들었어. 일런드는 꼼짝하지 않았어. 사자의 갈기가 바람에 휘날렸어. 진실은 결코 소리나 문자로 드러낼 수 없어, 행동뿐이야. 일런드는 사자와 줄곧 눈을 맞추었어. 사자는 느리게 천천히 일어났어.


게으름과 귀찮음을 포만감과 함께 사자의 느린 걸음에서 느낄 수 있었어. 일런드는 다가오는 사자를 피하지 않고 여전히 눈을 맞추었어.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 일런드와 사자의. 세렝게티의 저녁 빛은 노을이 아니야, 처연함 그 자체야. 느린 걸음과 달리 사자는 단숨에 일런드의 목을 거대한 엄청난 이빨로 물었어. 일런드는 쓰러졌어. 바람에 쉽게 풀이 넘어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났어. 허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


21


물론 김성칠 선생은 마사오가 이렇게까지 망칠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터, 바람보다 풀이 먼저 일어난다. 전태일을 빼먹고 한강의 기적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것 자체가 기만이며 마사오의 허구적 신화가 얼마나 많은 폭력과 속임수에 기초하는지 인사계를 설득할 수 없었다. 물론 김 중사에 눈길 꽂혀 노심초사하는 중대장 역시. 휴가증 주머니 깊이 넣고 민통선 밖으로 걸어가는 길이 더없이 길었다.


신랑 조철수, 신부 김선미. 예식장은 처음이었다. 빈손일 수 없어 만 원을 봉투에 넣었다. 군바리 돈은 사제 돈 세 배다, 이름 옆에 큼지막하게 써서.


"나는 거지입니다 라고 써라, 차라리."


장욱진은 옆에서 키득키득거리며 놀렸고 김용덕은 뒤늦게 도착했다. 5월의 여왕은 하지 못해도 5월의 신부는 꼭 하고 싶다던 김선미는 비로소 여자가 되는 걸까, 예뻤다. 벌써 석 달째 편지가 없었다. 김선미가 우리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 정도면 분명 그녀에게도 귀띔 정도는 했을 터인데 의아했다. 김선미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3막 중 혼례의 합창 속에서 가볍고 들뜬 걸음으로 입장하는 걸 보면서 힘껏 박수 치면서 책장 하나가 넘어간다는 생각에 문득 우울해졌다.


"돌아올까?"

"너라면 오고 싶겠어?"


핀잔하듯 장욱진은 김용덕에게 대꾸했다.


"캘리포니아 햇살이 아무리 모래알처럼 살갗에 박히더라도 머릿속에 맹물 차는 거보단 낫지 않아?"

"하긴…."


김용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들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군복 입은 우리에게 웨딩드레스 입은 김선미가 거수경례하면서 일부러 허스키한 목소리 만들었다. 장욱진은 쉬어, 라고 말했고 김용덕은 빠르게 거수경례를 받았다.


"어디서 주었어? 허우대 멀쩡하고 생긴 것도 나쁘지 않네?"


그 사이 심술보가 터졌는지 장욱진은 이죽거렸다.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군대도 형을 바꾸지 못하나 봐?"


"신혼여행은?"

"샌프란시스코. 오늘 밤 비행기야."

"캘리포니아?"


"금문교 내려다보면서 모닝커피 마시고 싶었거든."

"혹시?"

"만날 수 있으면 좋고. 어떻게 될지 아직 몰라."

"암튼 휴가 나오게 해 줘서 고맙다."


"별거 아니던데."

신랑이 손짓하자 김선미는 가벼운 웃음을 남기고 걸어갔다.

"한 병 더할까?"

"잔칫집에 와서 꼬장 부릴 수 없잖아? 뒤포로 가자."

"그럴까?"


우리는 사람 숲속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거리에는 물컹한 햇살이 출렁거렸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22


허쯔는 돌아오지 않았어, 끝내. 타일러의 말에 따르면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는 거야. 오잉?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글자 그대로 바람을 타고 날아서 떠났다는 거야. 헤어진 거냐고 물으니 다투긴 했어도 헤어진 건 아니라고. 여행 중에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타일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그랜드 캐니언 협곡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 대대적인 실종자 수색에 나섰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어.


물론 경찰이 아파트로 들이닥쳐 허쯔의 물건들을 살폈어. 두 달이 지나도록 생활 반응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어. 허쯔의 부모가 날아왔어. 공산당 간부스러움이 외동딸의 실종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어. CNN 방송에도 나왔어, 학교에서 내가 찍어준 허쯔의 사진이. 허쯔 부모는 납치를 주장했어. 타일러가 허쯔의 마지막 목격자여서 수사를 받았지만 납치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어.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딸을 납치, 감금하고 있으며 이 시간 모진 고문하고 있을 거라는 허쯔 부모의 주장은 코미디 같았어. 아니 공산당 간부스러움이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일까? 돌아오지 않는 허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 동네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인도 남자를 찾는 것뿐이었어. 물론 현관까지 허쯔를 에스코트한 것만으로 의심할 수 없지만 스토킹한 사실은 바뀔 수 없어. 허쯔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고 궁지에 몰린 건 나야.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인도 남자는 어디에도 없었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식당 아저씨가 손을 내밀었어. 내키지 않지만 달리 어쩔 방법이 없었어. 서너 시간 얼굴 마주치면서 할 일만 하는 경우와 한 지붕 아래에서 틈만 나면 눈빛 마주쳐야 하는 거는 완전히 달라. 하지만 길바닥에 나 앉을 순 없잖아? 맞아. 아저씨네로 들어가지 전까지 전혀 몰랐어, 눈치조차 채지 못했어. 아저씨의 마지막 남은 조카가 김철수라는 걸. 더부살이하는 꼴이지만 이상하고 수상한 우리들의 동거가 마냥 편안하고 안락한 건 아니야.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듯이 삼사 년 지나도 바뀌지 않아. 아마도 평생 바뀌지 않을 거야. 이미 몸에 착 달라붙은 습관이나 무의식은 악마처럼 그 사람을 평생 점령하고 마음대로 조정해. 자신이 조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경우에도 눈치챌 수 없어. 습관이나 무의식이 곧 자기 자신으로 완벽하게 변신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김부자 사진만 없지 완전 양강도 혜산이야, 내가 보기엔. 아저씨네 식구들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아. 하긴 어떻게 알겠어? 어쩌면 아들이나 딸이 혼잣말로 투덜거릴 때 가벼운 눈치 정도는 챌까? 알아먹지 못하는 미국 말 때문에. 마음은 한국이고 집에 들어오면 양강도 혜산이고 집 밖은 캘리포니아야, 아주 돌아버리겠어.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김철수야. 일부러 흐트러진 모습 자주 보이지만 김철수 눈빛이 야릇해지면 더럭 겁이 나. 자기 딴에는 매너를 나름 잘 지킨다고 여기지만 양강도 남자 특유의 딱딱함과 직설적인 말들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어. 미국 여자들은 징그러워. 그런 말을 빤히 쳐다보면서 하는데 소름 돋더라. 머리는 하버드 국제정치학을 하는지 몰라도 몸은 영락없이 양강도 남자야.


관광 트램을 타면서 케임브리지에는 없어, 라며 잔뜩 들떠 웃을 땐 영락없이 소년이야. 물론 어쩌다 늦은 시간까지 알바할 때 아저씨가 없으면 집까지 무사히 에스코트해 줘. 뭐, 굳이 나 때문이 아니라 형수인 여주인에 대한 의무감일지도 모르지만. 뭉쳐야 산다는 한국인 특유의 고집이 캘리포니아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야. 늘봄식당이 있는 한인타운에 가면 피부로 느낄 정도니까.


허쯔는 어디에 있는 걸까? 돌아와서 알래스카에 가자고 하면 불평하지 않고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설 텐데…, 과연 살아 있을까, 몇 달째 생활 반응이 없는데? 아파트 살림살이 정리하면서 허쯔 부모는 제국주의자들의 패권과 팽창주의를 박살 내야 한다고 했어, 중국 공산당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며 목소리 높였어. 순수 혈통 한족이라 믿지만 흔들리는 눈빛 속에 만주 벌판 말 달리는 여진족에 대한 향수가 묻어있었어….

keyword
이전 06화걸핏하면 경찰들이 총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