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관에 알바

캘리포니아 그녀 9화

by 이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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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병 달고 서너 달 지나자 군 생활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인사계도 전역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중대장은 진급해서 연대본부로 전출 갔고 말년 병장 노가다는 허스키의 눈치 보며 외줄 타듯 하루하루 숨죽여 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가는 법, 점심 먹고 나면 병기고(兵器庫)에 틀어박혀 이제하의 초식(草食)을 읽었다. 온갖 쇠붙이 틈바구니에 앉아 초식이라, 묘한 이질감에 휩싸여. 책은 세로쓰기에 우종서(右縱書)여서 읽기 번거로웠다, 익숙하지 않았다. 속도는 더없이 느렸고 쇠붙이 냄새는 쉽게 몸을 감쌌다. 허스키는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말했다, 언제 손 좀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받은 만큼 돌려주자고. 옆구리 살살 찌르는 허스키의 꼬임에 넘어간 동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관심 없는 표정이었고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질서를 파괴하는 엄청난 하극상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일 년가량 남은 군 복무를 별다른 탈 없이 무사히 끝내고 싶은 탓이었다. 3개월 혜택받는 이들은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노가다에게는 살얼음판 걷는 날들이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노가다도 눈치채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부반에서 담배 피우기를 그만둔 것이었다. 그러나 허스키는 영리한 놈이었다. 전역 일주일 앞두고 연대로 전출하기 전날 밤, 중대에서 마지막 밤이었다.


내일이면 광산골 떠난다며 갓 자대 배치받은 이등병에게도 살갑게 대하던 그날 밤, 허스키는 동기 두 명과 우격다짐으로 노가다를 화장실 뒤로 끌고 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 실눈으로 어두운 내무반 분위기를 단번에 파악했지만 애써 자는 척했다. 노다가의 허스키 괴롭히기는 중대는 물론이고 연대까지 이미 소문이 자자하던 터라 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고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둬들여야 한다는 동정론까지 힘을 얻고 있었다. 살포시 잠들었는데 불침번이 어깨를 흔들었다. 보초 순번이었다. 단독군장하고 M16 소총 거머쥐고 내무반 나서기 전에 침상을 훑었다.


노가다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당연히 허스키의 자리를 비롯해 몇몇도. 화장실과 정반대 정문 초소까지 걸어가면서 살짝 노가다가 염려스러웠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겨우 일주일 전에 자대 배치받은 이등병은 혼잣말 듣고서 고개 갸우뚱거렸다. 누가 죽나요? 저쪽 산자락에 있는 브라보 중대 보이지? 어떤 놈이 죽었지. 아마도 부모 생각에 머리통은 날리지 않은 거야. 비 내리는 유격장에서. 유격 아직 받지 않았지? 캘리포니아 햇살이 모래알 같다는 거 알아? 아니요. 근데 왜 뜬금없이 브라보 중대 얘기하다가 캘리포니아예요?


넌 몰라. 사람은 말이야 아무도 사람을 알 수 없으니까, 부모 자식 사이라도. 그래서 누군가 이런 시를 썼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처음 듣는 얘긴데요? 뭐 하다 왔어? 나이트클럽 강호동 하다가 왔는데요? 웨이터? 네. 강남에서 아주 잘 나가는 나이트인데 강호동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건 너 사정이고 캘리포니아에는 말이야, 아주 끝내주는 여자가 살고 있지. 쭉쭉빵빵이에요?


그런 물에서 놀았으니 너한텐 어울리는 말이다. 부킹 하면 강호동이거든요. 그래? 언제 한 번 오십시오. 제가 아주 끝내주는 여자로다 부킹 해주죠. 관심 없다. 캘리포니아 햇살을 생각하면 어떤 땐 마음이 아주 헛헛해지기도 하지. 어떤 사람은 마음이 끝도 없이 깊어서 도저히 가늠할 수조차 없거든…. 나성에 가면 편지를 보내세요, 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그래? 나성에서 편지가 가끔 오지.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처럼.


대화가 뚝 끊어졌다. 화장실이 있는 광산골 골짜기 초입에서 부엉이 소리 드문드문 들리는 사이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시간은 더없이 더디게 지나갔다. 정문 밖을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등 뒤 부대 쪽을 경계했다. 보초는 요령이었다. 더구나 새로 전입 온 혈기 왕성한 중대장은 부대 군기 잡기에 몰두하고 있는 터였다, 초짜 중대장이었다. 캘리포니아에 가보실 거예요? 내가 왜? 자꾸 캘리포니아 어쩌구 하니까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캘리포니아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여자에 방점이 있는 거야. 방점이 무슨 뜻입니까? 관둬라. 니가 봤다는 쭉쭉빵빵 얘기나 해봐. 시간이 가지 않잖아.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는 원나잇 즐기려고 오거든요. 강호동 눈빛이 기가 막히게 찾아낸다 말이죠. 여자 여러 명 중에서도 딱 보면 누가 원나잇을 갈망하고 있는지 단박에 찾아내서 굶주린 늑대 한 마리 붙여주죠. 벌이가 쏠쏠했어요.


부동산 중개인처럼 양쪽에서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어요. 포주였구만. 아니죠.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덤비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 절대 포주는 아닌 거죠. 만남을 주선하는 거죠. 그것도 즐거운 추억 만드는 만남인 거죠, 외로움을 덜어내는. 꼴에 갖다 붙이기는 잘하는구먼…, 노가다가 걱정스러웠다. 저만치 보초 교대 조가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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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으로 돌아와 다시 침상에 누울 때까지 노다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허스키와 그 일당들도. 이제 와 화장실 뒤편으로 가서 애써 무마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엎질러진 물, 초짜 중대장이 하극상을 알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 캘리포니아의 그녀는 샘에게 또 어떤 유혹에 시달릴까…, 하릴없는 걱정들 속에서 눈을 감았다.


기상! 잠깐 눈을 붙였는데 불침번 외침에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복장 챙기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노가리는 보이지 않았다. 전역 대기자는 열외인가…, 허스키와 그 일당들은 피곤과 졸음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서 있었다. 아침 점호가 끝나고 내무반으로 돌아오자 노가리는 더블백 속에 꾸역꾸역 개인물품을 집어넣고 있었다.


정오 부식차로 연대에 들어간다며 쓴웃음 지었다. 그 웃음 속에서 곧이어 들이닥칠 엄청난 폭풍의 낌새를 느꼈다. 노가리의 성질머리로 보아 절대로 고분고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판사판 어차피 떠나는 마당이 아닌가…. 중대장에게 전역 신고하고 입맛이 없다며 식당에도 나타나지 않고 몇 시간 눈에 띄지 않던 노가다는 부식차 타고 중대를 떠났다. 허스키는 울상이었으나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에 빤히 보이는 얼차려를 기다리는 불안과 긴장감은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다….


마음이 비로소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아. 잊을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의 항목을 만들어.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남자애가 느닷없이 떠오르더라. 그 애가 왜 떠올랐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름 때문이었어. 강철수.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왕따 당하는 것도 아닌데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이였어. 그렇다고 반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건 아니야. 공부를 엄청 잘했거든. 딱 봐도 한눈에 범생이였어. 어쩌다 한 번씩 얘기를 하곤 했는데 기억에 남은 건 별로 없어. 알베르트, 로테, 베르테르는 또렷하게 기억나. 그리고 자신이 사육당하고 있다고 믿는 어처구니없음도.


강철수가 생각하는 로테는 누구였을까? 자신을 알베르트로 여겼을까, 베르테르로 여겼을까?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강철수는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어. 걸핏하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오른손으로 턱 괴고 초점 잃은 표정을 짓곤 했어. 어린 강철수의 초점은 어디를 보고 있었던 걸까? 베르테르였다면 로테 앞에서 총으로 자신을 부숴버렸을 테고 알베르트라면 절망과 충격에 빠진 로테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겠지.


내가 기억하는 것은 딱 거기까지야. 어쩌면 그 무렵의 나를 강철수에게 투사한 것인지도 몰라. 기억이 뒤틀려서 아주 딴판인 강철수를 되살리고 있는 건지도 몰라. 보통 남자애들처럼 철딱서니 없고 중구난방이고 무슨 사고를 칠지 예측할 수 없는 강철수였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두려웠고 겁에 잔뜩 질려서 조금이라도 내게 다가오려는 세상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저항했어. 어쩌면 아주 길고 지루하고 캄캄한 사춘기 터널이었는지도 몰라, 지금도 여전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메이퀸 역할은 무척 힘들었어.


나 자신이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럭저럭 잘 견뎌왔던 거 같아. 그런 노력들이 지금 보상받는다고 생각해. 요즘 별것도 아닌데 자꾸 신경이 쓰는 일이 생겼어. 김철수가 집으로 전화해서 몇 번 안부 묻더니 아예 편지를 보내와. 답장은 안 해. 봉투 뜯지도 않은 것들도 있어. 어쩌다 읽어보면 쓸데없이 사소한 일들도 적어보네. 그러다가도 함흥에서 혜산까지의 멀고 힘겨웠던 길 위의 날들을 주섬주섬 늘어놓아. 결말은 늘 똑같아.


북쪽 한국에 대한 뼈까지 스며든 증오와 저주. 나보고 어쩌라고? 내 몸 하나 감당하는 게 하루하루 버티는 게 만만찮은 캘리포니아에서 나보고 어쩌라고? 버럭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해. 허쯔가 내 곁을 떠나자 김철수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되돌려 타일러와 여행 가는 허쯔를 한사코 붙잡아 무슨 핑계를 만들어서도 못 가게 했을 거야. 아니면 나도 따라나서든가.


얼마 전 뉴스에서 허쯔 얘기가 나왔는데 실족사 가능성이 큰 건 분명한데 사체가 발견되지 않는 건은 미스터리라고 몸집 거대한 빡빡머리 백인 아저씨가 인터뷰하더라. 25년 동안 공원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사람은 눈과 귀를 막아버리면 아무리 거칠고 조금뿐인 먹거리여도 살아가는 모양인가 봐…, 북쪽 한국에 대한 내 생각. 아무튼 오늘도 남쪽 한국을 지키는 너희들은 고생해…, 이 편지로 괜한 오해 따위들은 하지 않았으면. 가령 김철수가 편지 보내는 것처럼 내가 보낸다는….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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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완전군장으로 연병장에 모인 일곱 명 동기들은 저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따가운 햇살 요령껏 피하고 있었다. 선착순은 잔인했다. 전우애고 나발이고 나부터 살자는 아랫배 안간힘만 남았다. 초짜 중대장은 실실 웃었다. 너희들은 말이야…, 연병장 한 바퀴 선착순 한 명! 덜컹거리는 군장과 손아귀에서 자꾸 빠져나가려는 M16 소총을 감당하면서 연병장 가득 출렁거리는 햇살 속에서 동기들은 냅다 뛰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개미들 행렬처럼 이상하게도 일렬종대. 초짜 중대장은 실실 웃었다. 너희들은 말이야…, 나무야. 기껏해야 잘해봐야 나무일 뿐이야. 그런데 숲이라고 생각해? 다시 선착순 한 명! 마지막 한 명 남을 때까지 선착순은 이어졌고 잔인했다. 실실 웃는 초짜 중대장은 노가다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무가 어떻게 모여야 숲이 되는지 모른다며 실실 웃었다. 동기들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철모가 머리통을 짓이기고 사타구니에 땀이 흠뻑 고였다. 초짜 중대장은 실실 웃었다. 너희들은 말이야…, 나무가 숲인 척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 꼬라박아! 원산폭격! 햇살 속에서 비릿한 땀 냄새가 났다, 캘리포니아 햇살은 서걱거린다는데.


통증이 겹겹이 몸에 쌓일수록 생각은 멀리 보내야 했다. 몇은 면회 온 애인 덕에 외박 나가 백의리 여인숙 꽃무늬 벽지와 퀴퀴한 냄새 뿜어내는 낡은 침대 속에서 한껏 빠져들었던 달콤함에 취해 보려고 애써 기억을 떠올리고 몇은 허스키에 대한 짜증 섞인 은밀한 앙갚음을 계획하고 몇은 피하지 않고 오로지 통증에 집중했다.


초짜 중대장은 실실 웃었다. 너희들은 말이야…, 나무도 아니야, 가지야. 가지일 뿐이라고. 저물녘까지 연병장 구보! 머리통으로 지구의 무게를 감당하다가 두 발로 지구를 연거푸 밟아주면서 우리는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믿음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속절없이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태양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농마국수 먹고 싶다 하더라, 김철수가. 사람을 믿어선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조금씩 흔들려도 입맛은 변하지 않는 모양이야.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 어떻게 농마국수 찾을 수 있겠어? 어림도 없는 소리지. 징그럽다고 노래 부르던 여자랑 데이트한다고 굳이 편지에 쓰는 건 무슨 심보야? 질투라도 느끼라는 건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정말! 다음 주에 이사하려고 해, 멜라니 로랑의 아파트로. 동양에 대해서 엄청나게 신비로움을 느낀다는 프랑스 여자애야.


아저씨는 섭섭하다는 표정이고 여주인은 한시름 놓은 얼굴이야. 하긴 객식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지. 사실 아저씨 집에 머무르면서 사고방식이 북쪽 한국을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어. 마음 답답하고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갇혀 있는 듯한 이상야릇한 기분에서 벗어나는 것이 남쪽 한국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모험이지만 캘리포니아까지 와서 굳이 북쪽 한국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잖아? 물론 얹혀사는 거야. 어쩌면 그게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라. 그렇다고 구질구질하게 부탁하거나 요청하지 않았어.


멜라니가 먼저 제의했으니까. 평양에도 가보고 서울에도 갔었다는 거야. 남자 친구와 동거하다가 얼마 전에 헤어졌다고 하대. 둘이 있다가 혼자서 생활하려니 힘들 거야. 더구나 멜라니 아파트는 애매한 동네이긴 하지만 위험한 동네 쪽에 가깝거든. 경계선에 있다고나 할까. 나야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못 되니까 상관없어. 아저씨가 알바는 계속할 거냐고 묻더라. 해야지 어쩌겠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별로야. 주방으로 들어가야 하거든. 엄청 힘들지.


영사관에 알바 신청해놓았는데 아직 연락 없어. 만일 그쪽에서 일을 잡을 수 있으면 식당은 그만둘 거야. 비록 서너 시간이지만 양강도 혜산이 어디 가겠어? 같이 있으나 섞이지 못하는 건 헤어져 살아온 시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기묘한 이질감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어쩌면 나만 그럴지도 몰라. 아주 오래된 생각들이 불쑥불쑥 들어. 허쯔의 얼굴도 흐릿해져. 테일러를 거리에서 몇 번 봤는데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어. 너무 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지나가니까 어쩔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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