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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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저마다 때가 있는 거 같아. 이사의 절실함과 필요는 충분히 느끼지만 이런저런 형편이 갖추어지지 않으니 그림의 떡이잖아? 시(詩)를 쓰고 싶다고 해서 써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발버둥 치고 지랄 발광해도 시는 써지지 않잖아?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시가 내게 다가오잖아? 나는 그걸 받아들일 뿐이잖아?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내게 와서 완성되잖아?
멜라니의 제안이 그런 경우야. 메이퀸도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사람들은 저마다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지만 막상 때가 왔을 때, 때를 모르고 그냥 지나쳐. 때를 모르거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거지. 유치원 다닐 때 이철수의 미미를, 박은혜가 중간에 가로채기 전에 얼른 받지 않은 것도 어쩌면 때가 아니라는 막연한 판단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어려도 세상 살아가는 나름의 기준은 있기 마련이거든.
오늘따라 유난히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서걱서걱, 사람들이 뜨거운 아지랑이 속으로 걸어가. 마치 신기루에 홀린 것처럼. 창밖 거리는 금세 텅텅 비여, 권총 허리춤에 비스듬히 꽂은 동네 건달 몇 명이 낡은 차를 타고 돌아다닐 뿐. 총기 사용만 놓고 보면 서부 개척 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어.
평화로운 마을에 흙먼지 날리면서 악당이 등장하는 것처럼 캘리포니아 곳곳이 위험해. 허리춤에 총 꽂은 건달과 대놓고 총질하는 보안관이 득실거려. 그 사이를 사람들은 위태롭게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녀. 개미가 페로몬을 따라 행진하잖아? 이곳 사람들도 그런 페로몬을 따라 하루하루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런데 비가 오면 페로몬은 씻겨져 없어지고 개미들은 우왕좌왕하지. 어쩌면 그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캘리포니아에는 비가 거의 없는 걸까? 서걱거리는 햇살은 오랫동안 페로몬을 남겨두지. 어제는 파티했어. 알바는 계속하지만 집을 떠나니까 한사코 해야 한다며 아저씨가 우겼지. 하나원 생활까지 합하면 대략 육칠 개월 남쪽 한국에서 살았나 봐. 소주를 꺼내놓는 거야, 귀한 소주를. 첫 잔 마시는데 뒤포가 떠오르는 거야. 너희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그런 회상에 잠겨 있는데 아저씨는 계속 말했어. 도저히 살 수 없다고. 깔보고 얕보는 눈총도 그렇지만 말도 반쯤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고 눈이 아플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는 게 도저히 자신이 없었데. 캘리포니아 은행 비밀계좌에 넣어둔 돈도 있겠다, 업신여김당하면서 살 바에야 가자. 양강도 혜산에서도 살았는데 캘리포니아라고 별거 있겠냐?
그렇지만 본질적인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남쪽 한국과 북쪽 한국의 경계인. 아저씨는 두 한국에다 캘리포니아까지 뒤집어쓴 꼴이지. 슬쩍 집 떠나는 이유를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뒀어. 나 역시 아저씨와 마찬가지로 경계인이 되어가고 있다며 동질감 느끼게 하고 싶었지만 밀도는 달라.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지. 아무리 자세하게 말해도 몸으로 익힌 경험은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아.
허쯔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힘껏 과장해서 글로 표현한다고 해도 너희들은 내 헛헛한 마음을 느낄 수 없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거나 속내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완벽하게 속이면서 살아가는 거야, 자신까지도. 얘기했잖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왜 섬이 있겠어? 왜 그 섬에 가고 싶겠어?
입에서 단내가 났다. 몸은 땀으로 질척거렸다. 군장과 소총은 점점 더 거추장스러워졌고 구보가 아니라 거의 걷다시피 발걸음 무거워졌다. 초짜 중대장은 허수아비처럼 꼿꼿하게 서서 노려보았다. 똑바로 햇! 고함을 내질렀다. 철모가 자꾸만 앞으로 쏠려 눈길을 막았다.
연병장 흙바닥 내려다보며 다시 걸음 빠르게 재촉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편지가 왔었어.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미워해도 좋고 저주해도 어쩔 수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난 축복해 줄 거야. 나타난 놈이 좋은 남자이길 바란다고.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거야. 백의리 여인숙 낡은 침대에 누워 천장 올려다보면 빨갛게 피어있는 장미처럼…. 뒤따라오던 동기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이사이에 내뱉었다. 태양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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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난 기억에 없는데?"
김용덕은 비스듬히 고개 기울이며 금시초문이라는 표정, 실실 웃는 장욱진.
"왜 그래, 선배! 벌써 치매야? 아니면 선택적 기억으로 살아?"
김선미가 놀렸다. 김선미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며 다시금 크게 웃는 장욱진 옆에서 잊어도 충분히 좋을 노가다 사건을 얼핏 떠올렸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는데 태양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던 연병장 흙먼지 위로 쏟아지는 햇살들, 백의리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는 습관….
"허쯔에 대한 얘긴 처음 들어. 룸메이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자세히 편지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김철수도. 하버드라…, 괜히 심통 나는 걸."
김용덕은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형들 말년 휴가 나왔을 때, 뒤포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지?"
김선미가 회심의 미소 지으면서 장욱진을 건너다보았다. 장욱진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용덕인 선택적 치매야. 조금이라도 흠집 나는 짓은 하기 싫어하잖아? 이미지 관리가 그땐 실패했어."
장욱진은 키득거렸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종이비행기 날리면서 후배들의 독서 토론을 멀찌감치 떨어져 듣고 있던 군복 입은 우리는 슬그머니 문창반을 빠져나갔다. 지나고 보니 헛발질이라고 여기지만 우리 역시 여전히 헛발질 멈추지 않고 있다는 자각까지 닿지 못했다. 아직 젊고 군바리였으며 그녀를 잊지 않고 있었다.
"공산당 간부 외동딸이라면 빨갱이 아니야? 그런데 룸메이트라고?"
북진통일 군인정신 투철한 해병대 김용덕은 커다란 두 눈 부라렸다. 비록 가까운 친구이고 흉금 없이 속내 털어놓던 사이일지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투였다. 주먹 불끈 쥐고 탁자 힘껏 내려쳤다. 막걸릿잔이 흔들렸다.
"빨갱이 물 금방 들어, 붙어 있으면. 더구나 같이 사는 거잖아? 육이오를 잊을 수 있어? 카프카는 잊는다고 치더라도."
"그건 좀 찜찜하네. 허쯔라고 했던가?"
장욱진은 김선미에게 확인하듯 눈길 맞추며 물었다. 삽시간에 분위기는 그녀를 법정에 세워놓고 재판하는 꼴로 바뀌었고 그리움이나 타국 생활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 건강하게 귀국해야 한다는 바람 따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공산당이나 공화당이나 똑같은 거 아니냐? 공화당이 어째서 빨갱이 마음대로 캘리포니아 휘젓고 다니게 가만 놔둘 수 있지? 우리만 외톨이인 거야?"
평화롭고 고즈넉한 마을로 예고 없이 느닷없이 탱크 앞세워 무지막지 밀고 내려왔다고 믿으라는 분단시대 삐뚤어진 통치술에 갇혀 있는 군바리여서 어쩌면 분노가 당연한지도 몰랐다. 걸핏하면 북쪽으로 쳐들어간다고 설레발치는 이승만은 이승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김철수가 하버드에? 빨갱이가 하버드에 다니게 공화당은 가만히 놔뒀다는 거잖아? 뭔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우리는 군에서 뺑이치는데."
"빨갱이가 어디 캘리포니아만 휘젓고 다니겠어? 온갖 거짓 치장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공자 앞세워 북미점령 작전을 손 놓고 구경만 하잖아? 하긴 사마천이 공자를 띄어주긴 했어. 최소한 겉으로 볼 땐 말이야, 공자 죽은 지 삼백 년이나 지나서."
"여기에 공자가 왜 나와?"
"같은 공산당이잖아?"
"아무튼 허쯔랑 살고 있다면 더구나 김철수랑 편지도 주고받는다며? 캘리포니아에서 포섭당해 난수표 방송 들을지도 모르겠네!"
김용덕의 마구잡이 투덜거림이 친구 이상의 선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그녀에 대한 섭섭함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김용덕의 말대로 노다가 사건으로 연병장 흙먼지 위로 제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는 태양 아래에서 뺑이칠 동안 그녀는 난수표 방송 들었다는 것인데 아랫배에서 자꾸 웃음이 올라왔다.
김용덕의 헛발질이 최소한 장욱진과 김선미의 판단을 잠시나마 흔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얘기가 어쩌면 이다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질까….
"난 먼저 갈게. 신랑 놈이 지랄하기 전에."
김선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분에 휩싸인 장욱진은 흔쾌히 고개 끄덕였다. 김용덕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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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 열풍이 다시 불었으면 좋겠네!"
"내 말이!"
김용덕 한 마디에 맞장구쳐주는 장욱진은 한동안 죽이 맞아 캘리포니아와 그녀를 이죽거리다가 뒤늦게 김선미의 빈자리에 눈길 꽂혀 마음이 헛헛해지는지 입술 굳게 다물었다. 팔각모 사나이는 말이야…, 김용덕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제 말에 취해 쉬지 않고 떠들었다.
공산당이 무서운 건 사회 시스템이 이원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문제는 독재야. 회사에 사장이 왕초 아니야? 그런데 공산당 사회에선 아니야. 회사에 정치위원 있어. 사장이 자기 돈으로 회사 차려서 경영하더라도 회사에 정치위원이 들어와. 끗발이 더 좋지. 사장 위에 있으니 사사건건 정치위원 허락을 받아야 해. 노조는 당연히 없고. 군대도 마찬가지야.
대대장이 있으면 대대장 위에 정치위원이 있어. 대대를 마음대로 운용하지 못해. 이게 말이 되는 거냐? 학교도 마찬가지. 교장이 왕초잖아? 그런데 아니야. 정치위원이 있어. 그놈이 왕초지. 당연히 정치위원은 충성심 높은 열성 당원이고 사소한 것까지도 중앙당에 보고해. 독재가 그런 식으로 유지되지. 팔각모 사나이는 말이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회 시스템을 박살 낼 천하무적 귀신 잡는 해병이야….
"야! 오랜만이다."
"이게 누구야? 반갑다. 그런데 복학한 거야?"
"짧게 다녀왔지. 지루하잖아? 어떻게 몇 년씩 짬밥 먹나."
"수상한 소문이 돌던데? 네가 프락치라고."
인철수는 아주 짧게 표정 굳어졌으나 이내 능글맞은 얼굴로 되돌아와 고개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문이야. 말 그대로 풍문이지, 바람결에 떠도는. 병장인 걸 보니 말년 휴가구나?"
인철수는 말머리 돌리려고 했다. 장욱진은 쏘아보았다.
"프락치가 아니라 정치위원이야. 현사반 아작낸 것도 너 솜씨라며?"
김용덕은 이죽거렸다. 얼렁뚱땅 자리에 앉으려던 인철수는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약속 있다는 걸 깜박했네. 다음에 또 보자."
인철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팔각모 사나이는 말이야…, 비열하게 살지 않아. 저 새끼 침 질질 흘리면서 캘리포니아 그녀 꽁무니 졸졸 쫓아다닐 때부터 얍삽하다고 생각했어. 생긴 것도 꼭 기생오라비야. 뭐, 짧게 다녀와? 지나가던 개도 웃겠다….
"다녀오긴 한 거야?"
장욱진은 고개 갸웃거렸다.
"내가 아나? 들리는 말로는 몇 달 학교에서 안 보이더라고 하더라."
뒤포에 어둠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 몇 명이 어깨에 묻은 어둠 툭툭 털어내면서 들어왔고 신입생이 분명한 앳된 얼굴의 무리가 왁자지껄 떠들면서 뒤포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아, 제대는 했냐? 편지 받고 깜짝 놀랐어. 인사계가 편지 미리 뜯어보고 준다며? 군대가 교도소도 아닌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하긴 북쪽 한국이나 남쪽 한국이나 오십 보 백보야. 멜라니가 그러더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대. 나는 너네가 더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
말이 박애지 완전 중구난방이라고 말하진 않았어. 얹혀사는 주제에 눈치 봐야 하지 않아? 아무리 여자 둘이 산다고 해도 팬티만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게 보기에 민망해. 자기는 집에 들어오면 무조건 벗어야 한대. 답답하대. 하긴 프랑스 남부 해안가에 누드 비치가 많다더니. 나보고도 벗으라는 거야. 자유를 느낄 수 있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있다는 거야. 자신 안에 꼭꼭 숨겨져 있던 영혼이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거야.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싫든 좋든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았다고 여기잖아? 몸을. 그렇게 생각하잖아? 그런데 멜라니는 그렇지 않아. 멜라니뿐만 아니라 유럽 애들은 그렇지 않아. 물론 캘리포니아 애들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렇게 자유를 좋아하는 애들이 식민지 만들고 수탈하고 약탈하는 과거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기도 해.
솔직한 얘기로 앞뒤가 맞지 않잖아?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네. 암튼 멜라니 말에 따르면 옷을 벗고 태어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진정한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거야. 어떨 땐 팬티마저 홀라당 벗고 전신 거울 앞에서 온갖 생쇼를 다해. 그래야 몸을 사랑하게 된다나 어쩌구 하면서. 그러면서도 대중목욕탕을 이해할 수 없대. 여자들이 알몸으로 모여서 단체로 때를 벗기는 풍경은 그야말로 경악할 일이라는 거야. 당연히 멜라니는 때라는 개념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