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8화
23
"화장실 뒤로 집합하랍니다."
점호 끝나고 모포 뒤집어쓰고 눈 감고 잠에 빠져 만주 벌판 어디쯤 말 달리고 있는데 불침번이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잔뜩 겁에 질린 이등병 불침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신경질 와락 쏟아져 나왔지만 이등병은 이미 체념한 표정, 주섬주섬 옷을 입고 침상 둘러보니 몇몇 자리가 비어 있었다. 동기들 자리였다. 한 명씩 차례로 불려 나갔을 터.
김 중사의 침묵이 중대장의 예민함으로 겹겹이 쌓여 한껏 위태로운 분위기인데 집합을? 천천히 화장실 뒤로 걸어갔다. 군바리의 시간은 민간인 시간과 달랐다. 광산골 골짜기에서 힘차게 밀려 내려오는 어둠이 끈적끈적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선임들의 기분이 멜랑꼴리한 탓이었다. 재래식 화장실 뒤편에서 일곱 명 동기들이 일렬횡대로 줄 서 쪼인트와 주먹질을 감당했다, 똥냄새가 장미보다 진하게 피어올랐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뭔 짓이야?"
귀찮음이 묻어있는 허스키한 목소리.
"이 새끼가!"
동기들은 모두 얼었다. 허스키는 선임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배를 움켜쥐고 급격하게 무너졌다.
"군대는 계급이야."
선임은 두 명이었다. 입대 전 노가다판에서 잔뼈 굵어졌다는 선임은 평소에도 악랄했다. 서울대 법학과 출신 허스키는 늘 노가다에게 당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나이도 많고 배운 것도 있을 거라 여겨 선임들은 나름 대우해주었다. 사이가 틀어진 건 법대로 때문이었다. 법에 따라서, 법이 그러니까 하는 식의 말들은 눈앞에 놓인 상황을 반전시키거나 호전시키지 못했다.
소대원 전체가 허스키 한 명 때문에 단체 얼차려를 받기가 십상이었다. 법에 따르면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는 대한민국 영토다. 따라서 그 땅에 발 딛고 사는 이들은, 비록 불법 점거하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 국민이다. 국민이 국민을 죽이는 것은 불법이다, 범죄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이 새끼가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자빠졌어!"
이유는 간단했다. 노가다 입장에서 허스키는 책이었다. 책은 말하거나 움직이거나 똥을 싸거나 라면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냥 책장에 꽂혀 얌전히 죽어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고문관 짓으로 소대원을 괴롭혀서는 더더욱 안 되는 것이었다. 중대장이나 인사계도 이미 포기한 터였다.
"앞으로 똑바로 해!"
여러 차례 구타가 끝나고 노가다는 동기들 중에서 허스키를 쏘아보며 윽박지르고 막사로 돌아갔다. 밑도 끝도 없는 노가다의 잔소리가 허무맹랑하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동기들 중 누구도 허스키를 위로하거나 다독이지 않았다. 노가다가 오로지 허스키를 괴롭히기 위해 나머지 동기들을 집합시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허쯔 부모는 누르하치를 알까? 아마도 모를 거야. 문화 대혁명이 뜻하는 것은 중국 공산당 이전의 중국은 없다는 것이지. 공자가 공산당의 선봉장이 되어 있는 것도 당연하지. 김철수가 꽃제비로 지내면서 누나와 형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얘기는 했나? 함흥 비료공장 지배인이었다고 하대, 아버지가.
그런데 국군포로 출신 노동자와 죽이 잘 맞았나 봐. 형 동생 하면서 지냈대. 그게 화근이었어. 어느 날 저녁에 보안원이 들이닥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끌고 가더래. 동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리고 그 푸른 바다 빛을 배경으로 총살당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지 못한대. 양강도 혜산까지 큰형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 누나와 형이 죽었대. 캘리포니아 햇살은 모래알 같아.
장마당에서 엄청 두들겨 맞으면서도 끝내 빼앗기지 않은 두부밥 하나를 주면서 죽었대. 누나는 낯선 누구 꼬임에 넘어갔는지 속옷 찢어진 채로 빙두에 취해 정신줄 놓더니 절벽 아래로 떨어졌대. 혜산 큰형 집 앞에 겨우 도착했을 때 형이 길을 막 떠나던 참이었대. 물컹한 햇살이 그리울 때도 있어. 국제정치학이 상처를 아물게 할까? 시(詩)가 나를 구원할까? 어쩌면 나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하면서 나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허쯔 부모는 결국 먹먹함에 울음을 터뜨렸어. 목놓아 우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 창문 밖으로 캘리포니아의 노을이 어쩜 그렇게 이쁘게 피어나는지…, 세상은 우리와 상관없이 잘도 굴러갔어. 입만 살아있는 장욱진과 때때로 싱거운 김용덕과 허구한 날 절룩거리는 이순직 그리고 금문교에서 오후를 함께 보낸 김선미…, 지나온 날들이 순식간에 스치는 저녁이야. 내내 건강하길. 총총총….
24
벌판 끝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장욱진은 울지 않았다, 어디선가 여름 냄새가 물씬 났다. 접객실은 왁자지껄 붐볐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인사하기에 바빴다, 웃지 않았지만 울지도 않았다, 장욱진은 맏이였다.
"미안해. 먼저 갈게."
김선미는 남자처럼 장욱진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쳤다.
"내가 미안하다. 오지 않아도 되는데."
"더 있고 싶지만 신랑 놈이 지랄할까 봐."
"암튼 고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김선미를 장욱진의 애인으로 지레짐작하고 짓궂은 농담도 했지만 누구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김선미조차. 발인은 내일 아침, 마을 뒷산 선산에 가묘가 있었다.
둘이 죽고 못 사는데 누가 말려? 아는 사람은 다 알았지, 뒤탈 날까 봐 누구도 김 중사한테 귀띔하지 않았던 거야. 백의리 토박이 인사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김 중사는 전역 신청을 했고 중대장은 비로소 시름을 내려놓았다. 팀스피릿 훈련을 끝으로 부사관 신분을 벗는 김 중사는 오랜 고민과 고통에서 가까스로 헤쳐 나와 웃음도 되찾았다.
"민간인이 되면 어느 골목 어느 길목에서 만날지 모르니까 잘 봐줘라."
김 중사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도 있으나 대부분 고개 끄덕였다. 버스는 이미 떠났고 떠난 버스의 뒤꽁무니에 욕설 퍼부은들 속은 후련하고 시원할지 몰라도 실속은 없었다. 오히려 상처 후벼 파는 자학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노가다는 인생 단순하게 사는 게 최고라며 탁월한 선택이라며 치켜세웠고 허스키는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다.
결혼 생활이 애들 소꿉장난도 아닌데 서방 몰아내고 외간 남자 불러들이는 행태는 미풍양속을 헤칠 뿐만 아니라 사회 기강을 심각하게 어지럽히는 것으로써 반드시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중대원들은 노가다파와 허스키파로 나뉘어졌다. 김 중사는 바보처럼 웃으면서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 식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타인의 시선 따위는 자기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조상님들이 살아온 내력이 있는데 아무리 말세라도 순순히 물러나는 게…, 고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가 이해하겠어? 인사계도 허스키파였다. 군인이라면 자고로 돌격할 때와 후퇴할 때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중대장은 노가다파였다. 때는 이미 놓쳤고 놓친 때를 아무리 되돌리려 노력해도 말짱 헛수고에 지나지 않으며 미련 때문에 연연하는 것은 전투의 패배를 낳는 치명적인 요소라며 김 중사의 판단을 존중했다.
목소리 높지 않았지만 중대는 노가다파와 허스키파로 나누어져 세척장에서 식판 씻으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저마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지루한 공방이 두 달째 이어지고 막연히 예상했던 사태가 들이닥쳤다. 팀스피릿 훈련이 끝나고 김 중사가 전역한 날이었다. 인사계는 퇴근했고 중대장은 관사에서 진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장실 뒤로 집합!"
불침번이 아니었다, 노가다였다, 자정이 지났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막사에서 재래식 화장실 뒤편까지 끈적끈적한 어둠 뚫고 동기 일곱 명이 열과 오를 무시한 채 걸어갔다. 광산골 골짜기 깊은 곳에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왔다. 장미보다 짙은 똥냄새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노가다는 손전등으로 동기들 얼굴을 확인했다, 어둠은 두꺼웠다. 요즘 중대 언론이 개판이야…, 노가다가 천천히 말했다. 똥냄새가 코를 사정없이 쑤셔댔다.
"조선일보스러운 놈!"
노가다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동기들은 곁눈질로 허스키를 살폈다. 모종의 결심을 이미 굳혔는지 허스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손전등 빛이 허스키의 얼굴에서 출렁거렸다. 느닷없이 몇 달 전 상여 매고 장욱진의 고향 뒷산으로 힘겹게 올라가던 안간힘이 아랫배에서 불쑥 올라왔다. 노가다는 위밍업이라도 하는 듯 가슴팍을 툭툭 치다가 허스키 차례가 되자 명치에 주먹을 빠르게 내리꽂았다. 허스키는 단번에 무너졌다.
"군대는 말이야, 까라면 까는 거야!"
노가다의 군화가 허스키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허스키는 다시 무너졌다. 부엉이 소리와 똥냄새가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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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 소리가 코로 똥냄새가 귀로 몰려들었다, 광산골 골짜기는 깊었다. 흥분한 노가다는 물불 가리지 않았다. 허스키가 무너지자 동기들 역시 한 명씩 차례로 허물어졌다. 손전등 빛이 광대뼈 근처를 얼쩡거리고 곧이어 주먹이 아랫배 깊숙이 들어왔다. 통증은 빛보다 빨랐다. 캘리포니아 햇살이 모래알 같다고 했던가? 허스키를 두둔할 생각은 없었지만 우리는 동기였다.
"군바리는 말이야, 몸으로 하는 거야…."
맞는 일도 힘들지만 때리는 짓도 힘들었다. 노가다는 쉽게 지쳤다. 인생은 말이야, 몸으로 하는 거야…, 잔머리 굴려봐야 소용없어…, 법이 사는 게 아니라 몸이 사는 거야…. 노가다가 막사로 돌아간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화장실 뒤에서 웅크리고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 김 중사 아내의 찬란한 불륜으로 시작되어 중대의 편 가르기가 이어지고 그 끝에 노가다의 무자비한 폭력이 피어났다고 동기들 누구도 여기지 않았다. 단지 빌어먹을 시대에 태어났고 빌어먹을 시대를 감당해야 하고 빌어먹을 선임을 만났을 뿐이라고 믿었다.
여긴 비가 거의 없어. 늘 모든 것이 서걱거려. 잔디에 눈길 주지 않아 무성해지면 경찰이 출동해. 정상적인 일상을 꾸려가지 않는다고 믿어. 고작 잔디 때문에? 의아할 거야. 가령 이런 거야. 우편함에 온갖 고지서와 찌라시들과 신문이 쌓여 있다면 그 집의 평화가 의심스럽지 않아? 한국에선 경찰이 출동하지 않지만 여긴 달라. 반드시 안부 묻고 여기저기 살펴, 권총 허리에 차고. 나는 금방 익숙해졌지만 식당 여주인은 거의 노이로제 걸릴 정도야.
잔디 관리를 내가 하기로 했어. 비가 오지 않으니 사흘에 한 번씩 물 주고 잔디인 척하는 놈들 뽑아내고 저 잘났다고 눈에 띄게 고개 쳐들고 있는 놈들도 가차 없이 허리를 싹둑 잘라버려. 잔디 마당은 금방 평화로워져. 하지만 노크도 없이 불쑥불쑥 방문을 밀고 들어오는 김철수 때문에 신경 쓰였어. 뭐, 지금은 케임브리지로 떠났지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야. 다시 아파트를 구할까 궁리도 했어.
딸은 전혀 관심이 없지만 아들은 가끔 내게 물어. 남쪽 한국은 어때요? 피자가 있나요? 북쪽 한국은 온통 민둥산인데 남쪽 한국도 그런가요? 여주인은 한국말로 하는 아들의 그런 물음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야. 아들은 남쪽 한국이 궁금한 게 아니라 내가 궁금한 거였어. 쓰다가 버린 시(詩)를 우연히 읽었던 것 같아. 사실 노력은 하지만 시가 되지 못하는 것들 뿐이야.
허쯔는 여전히 소식 없고 깊은 밤에 느닷없이 깨어나면 파도조차 없는 남태평양 죽음의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느낌에 빠져. 살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모든 선원이 꺼리는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 따위는 없어. 마음이 황량해지고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져. 면회소에서 푸석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수상한 표정 짓던 박철수가 인철수는 아무래도 프락치 같다고 말하던 순간이 잊혀지지 않아. 누구에게나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있잖아? 자기 삶을 송두리째 뿌리째 뒤흔드는.
내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너희들에게 끝까지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불현듯 허쯔는 알래스카 페어뱅크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공산당 간부의 위엄과 부모의 억장이 삽시간에 무너지는 순간에 빛나던 노을, 왜 나는 여진족이 그리울까. 넋두리야. 어쩌면 내 속에 있는 것들은 시로 쓸 수 없을 것 같아, 노력해보지만 번번이 파지만 만들어. 벌써 창문 밖이 환해.
버스는 없고 차 살 돈도 없으니 자전거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야, 학교까지 가는 길 위에서 그나마 살아 있다는 느낌을 즐겨. 생각이 많을수록 몸을 움직여야 하나 봐. 학교 우편 사무국에서 편지를 부치는데 샘은 내게 눈웃음 보내는 철수가 아닌 유일한 남자일지도 몰라. 물론 너희들 빼고. 그만 써야겠어. 한두 시간 자고 일어나 학교에 가야 하니까. 캘리포니아에서 나를 지탱하게 하는 건 시가 아니라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 들었어.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일, 나도 모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