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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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친구들아, 한국에서 사는 게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건 알아? 할 말은 많지만 나중에 또 편지할게. 총총총….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판초 우의를 뒤집어쓰고 질척거리는 유격장 야영장 한구석에서 나는 울지도 못했다. 반합을 설거지하면서 산자락에 오래전부터 서 있었을 노송이 어쩌면 내 운명을 거머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들….
우물 안 개구리라도 동학혁명의 이순직 접주가 없었다면 그 정신이 없었다면 숱한 이름 남김 없었더라면 우물 자체가 없을 터인데 이제 와 우물 안 개구리라고? 왈칵 그녀가 얄미워졌다. 조셉의 메기나 미국 거지나 금문교나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새 발의 피가 아닌가. 빨간 모자 유격 조교가 판초 우의 어깨에 걸치고 서둘러 대형 천막 막사로 달려가고 있었다.
이어 개미들이 당뇨 환자의 오줌발에 모여들듯 천막 막사로 모든 조교가 달려갔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판초우의 틈바구니 비집고 뚫고 몸으로 스며들었다. 슬금슬금 천막 막사로 다가갔다. 이 새끼가 누굴 엿 먹이려고 여기서 죽어! 어떡하죠? 일단 대대장님한테 보고해! 이 친구가 가장 열심히 훈련받던데 알 수가 없네. 대체 실탄은 어디서 구한 거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짧고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들렸던 아주 잠깐 사이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브라보 중대 이등병, 강철수. 갈비뼈 드러나 지혈조차 할 수 없는 넓고 깊은 피투성이 상처, 얼굴엔 엷은 미소. 토요일 오전이면 연병장 흙먼지 날리며 하는 전투 축구에서 늘 경계 대상이었던 강철수, 씩씩한. 불현듯 엷은 미소에서 그녀가 보였다. 죽어야 사는데 굳이 몸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보안 철저히 하고 남은 유격훈련을 계속하라는 대대장님 지시야. 이 일병! 이건 일급 보안이야. 입도 벙긋하지 마, 명령이야. 어서 막사로 돌아가! 중대장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엉겁결에 거수경례를 했다.
조셉이 골치야. 마피아 피가 흐른다는 타일러한테 조셉의 노상 방뇨 사건을 얘기했더니 헤죽헤죽 우기기만 하데. 그리곤 날 빤히 쳐다보는 거야. 스캔하는 거지. 허쯔가 있었다면 단박에 수상한 눈빛 눈치채고 달려들어 침대로 끌고 갔을 테지만 이상하게 난 아랫도리가 촉촉해지는 거야, 힘이 빠지고.
유리창에서 쏟아지는 햇살 때문일 거야. 캘리포니아 햇살은 유난히 따갑고 서걱거려, 모래알 같아. 서울 햇살은 물기가 잔뜩이잖아? 암튼 난 긴장해서 타일러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현관문 열고 냅다 도망치려고 생각했던 거 같아. 물론 오해일 수도 있지만 타일러는 허쯔를 진심 좋아하는 거 같아.
허쯔가 중국 음식 잔뜩 사 가지고 왔어. 여진족의 후예다워.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보다 캐나다 옐로나이프가 더 아름답다며 타일러가 허쯔를 설득하는데 꼼짝도 하지 않아. 타일러는 이유를 모르지만 난 알고 있거든. 페어뱅크스에 허쯔의 막냇삼촌이 살아. 중국인들이 없는 곳이 없어. 언젠가 짜장면 얘기를 했더니 허쯔가 막 웃는 거야, 그건 음식도 아니라고 하면서.
하지만 막냇삼촌이 결국 짜장면을 메뉴에 넣었대. 젊은 아이누들이 좋아한대. 아이누족이라고 하면 홋카이도만 떠올리잖아? 알래스카에도 있어. 물론 지금은 엄청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습이 바뀌었지만. 그런데 허쯔는 정말 알래스카에 가려고 할까? 모르겠어.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애야. 왜냐면 며칠 전에 현관까지 허쯔를 에스코트한 남자는 타일러가 아니었거든.
생김새로 보아 인도 쪽 남자 같았는데 허쯔가 코맹맹이 소리까지 하더라.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겁을 잔뜩 집어먹은 소심한 작은 여자아이처럼 보였는데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알 수 있어. 식당 여주인과 아저씨가 요즘 냉전 중이야. 어디서 귀동냥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저씨가 비트코인을 잔뜩 샀다는 거야.
여주인은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걸 왜 사냐고 앵무새처럼 맨날 쫑알거려도 아저씨는 모르쇠로 일관해. 사실 아저씨는 맛이 약간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러니 당 자금 주머니에 넣고 양강도 혜산에서 튄 거겠지만. 피자 배달시키면 1비트코인을 주는데 나도 아저씨한테 50센트에 팔았어.
화생방을 마지막으로 유격훈련이 끝나자 유격장에 왔던 것처럼 완전군장으로 부대에 복귀하는 행군, 비포장도로 양쪽 가장자리에 한 줄로 줄지어 걷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전투식량으로 저녁밥 먹고 쉬는 시간도 잠시, 달빛 받아 가며 행군하면서도 앞사람에게 또 그 앞사람에게 강철수의 죽음을 알리는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비록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브라보 중대와 알파 중대 사이의 교류는 전투 축구를 빼면 이렇다 할 것이 없던 터라 강철수에 대해서 딱히 아는 사실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우리 소대 사이에선 흉흉한 말들이 오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허수아비처럼 강철수는 정말 볼품없이 버려져 있었다, 빗속에.
한 달 전에 여자 친구가 결별 선언했더래, 고참한테 엄청 괴롭힘을 당했더래, 고문관이라고 하던데? 개죽음이야, 벼엉신이지. 여자 친구든 고참이든 살아서 싸워야지! 나는 한쪽 귀로 흘려보냈다. 그녀는 이런 고통을 조금이라도 알고서 우물 안이라고 했나? 눈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녀가 더없이 얄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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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바리 얘기는 그만해라."
잔디밭에 벌러덩 누워 가늘게 눈 뜨고 있던 김용덕은 실구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군대 얘기라면 졸린 눈도 번쩍 뜨는 김용덕, 막강 해병 출신의. 장욱진은 김선미의 빈자리가 여전히 아쉬운 표정, 한강은 말이 없었다.
인도교 폭파 사건, 서울에 갇힌 사람들, 목놓아 김일성 장군 만세를 외쳤던 조선일보, 서울에 갇힌 김성칠(金聖七) 선생, 아리랑 고개에서 미아리 고개 방향으로 포신 날카롭게 빛나던 국군이 버리고 간 대포, 만고역적 이승만 도당의 괴뢰 집단 전면적 궤멸, 이완용의 정신적 후예인 매국노 이승만 타도…, 따위의 벽보들.
드문드문 돈암동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서울에 갇힌 사람들, 정릉에서 미아리 고개 넘어 학교로 걸어가던 김성칠 선생.
"선미가 아무래도 연애하는 거, 같은데?"
장욱진은 햇살에 반짝이는 비늘 같은 물결 보며 아쉽다 못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연애? 그거 좋지. 나도 시꺼먼 니들 만나는 시간 아까운 연애 한번 해보고 싶다."
김용덕은 늘어지게 하품했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깔까지 맞춰 입은 열댓 명의 자전거 패거리가 줄지어 뚝섬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혼자 생활하게 됐어. 허쯔가 그랜드 캐니언에 갔거든, 타일러랑.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는데 괜히 미운털 박힐 필요 있어? 허쯔와 타일러 사이에 내가 끼면 그림도 이상하잖아? 게다가 타일러는 내 타입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이철수야말로 정말 내 타입이 아니야. 지금쯤 박은혜랑 짝짜꿍 잘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궁금할 일도 아니지만. 엊그제도 식당 여주인과 아저씨가 한바탕하더라. 보나 마나 비트코인 때문인 것 같은데 사실 여주인 고집이 이만저만 아니야. 양강도 여자들 원래 억세다고 아저씨가 귀띔은 해주었지만 암튼 보통은 아니야.
밀수를 했었데, 아저씨도 모르게. 양강도에선 얼굴 없는 돈주라고 유명했던 모양인가 봐. 그런데 꼬리 길면 잡히기 마련이잖아? 창고 가득 숨겨놓은 전기밥솥이며 노트북, USB 메모리 따위들을 모조리 압수당하게 되어서야 아저씨한테 이실직고했다나. 당에서 무역일꾼 관리하던 아저씨 역시 쫓겨날 판이잖아, 전거리 교화소로.
그래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도 없이 튀었다고 하더라. 딸하고 아들이 있는데 완전 미국 놈이야. 한국말 알면서도 절대로 하지 않아. 알바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마음이 조금 우울해져.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 들어가 혼자 식탁에 앉아 피자 먹을 땐 서울이 사무치게 그리워. 향수병일까? 아니면 허쯔가 남겨둔 빈자리 때문일까?
인사계 말에 따르면 브라보 중대장은 보직 해임당했고 대대장은 대령 진급이 물 건너가서 오늘내일 전역일만 기다리는 처지, 하루아침에 쑥대밭이 되어버린 중대 분위기. 일요일 종교행사로 민통선 밖 천주교 성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민간인들의 눈길도 예전 같지 않았다.
금지옥엽 하나뿐인 아들 알뜰살뜰 키워 나라에 맡겼더니 일 년도 되지 않아 홀라당 목숨 까먹어? 예로부터 웃대가리들이 백성 귀한 줄 모르더니 아직도 이 모양이야? 여기저기 수군수군.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내장들, 시뻘건 핏덩이, 빗물에 씻기는 흩어진 조각난 살점들…, 군 복무 내내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검은 문신을 마음 안에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성당 널찍한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느닷없이 그녀와 단둘이서 알래스카 페어뱅크스 작은 언덕 위에 서서 오로라를 올려다보는 상상…, 이 열 종대로 줄지어 부대로 복귀하는 내내 우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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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 거야, 향수병도 허쯔의 빈자리도. 내 몸 어느 구석에서 무언가 아우성치고 있어. 사실 한국에서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엄청 많아서. 사는 방식도 완전 달라. 오래전부터 내려온 특유의 약탈 문화가 생활 여러 곳에 여전히 남아 있어. 죄책감 따위는 없어.
걸핏하면 경찰들이 총질해. 내 몸 무언가가 아우성치고 있어. 사람들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어. 문화 충격에서 오는 후유증일 수도 있지만 상당히 위험해.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면 무슨 일을 당하든 준비조차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해. 여긴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어. 안전한 동네, 위험한 동네, 애매한 동네. 문제는 사람과 돈에 따라서 안전과 위험이 다르다는 거지. 마약에 취한 동네들, 한국에서 상상할 수 있겠어? 어쩌다 보니 태어났고 어쩌다 보니 흑인이고 어쩌다 보니 엄마가 마약쟁이고 어쩌다 보니 반건달이 되어 있고…, 조셉이야.
내가 사는 아파트는 안전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아, 애매한 동네지. 때에 따라서 위험하고 상황에 따라 위험한. 가령 조셉은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겼어. 하지만 어느 땐 눈이 풀려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곤 하지. 하긴 타일러도 마찬가지야. 이 동네 남자들은 다 똑같아. 궁금했지. 이 사람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저항하지도 않고 있어.
물론 몇십 년마다 한 번씩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하지. 그땐 아수라장이야. 약탈은 기본이고 폭력은 평범하지. 아우성치고 있어, 몸의 무엇이. 벽을 타고 끈적끈적하고 간드러진 여자 목소리가 들릴 때는 더욱. 굵은 남자 목소리가 이어지면 짜릿한 전율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 정신이 말짱할 때 조셉은 어떻게 날 꼬셔보려고 애쓰지만 자꾸 크고 검고 윤이 나는 메기가 떠올라서 징그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동네 건달들이 동양 여자라며 시비 걸 때 조셉이 나타나서 도와준 탓에 매몰차게 대하지는 못해. 너무 가깝지도 않고 모르는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사이로 지내려고.
자꾸 아우성치고 있어. 시(詩)를 쓰고 싶은 걸까? 하지만 아직은 겁이 나, 시를 통해서 변한 나를 발견한다는 것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캘리포니아 생활이야. 아직은 돌아갈 마음이 없어. 위험하고 생뚱맞은 경험을 하더라도 이제까지 무의식적으로라도 믿어왔고 추종했던 많은 가치관이 허상일 수도 있다는 확실한 깨달음이 생기면 돌아갈 거야. 학기 끝나 학생비자가 만료되면 식당 아저씨 도움을 받아야 하겠지만. 아저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교회에서 강연회 한다고 통역해달라고 하더라. 아저씨나 여주인은 아직 서툴거든. 일상에서 불편은 없어. 만나는 사람 대부분이 한국인이거든.
얼마 전 핵실험으로 이 동네 시의원도 관심이 생겼나 봐. 암튼 김철수를 만난 건 강연회 때였어. 자기는 꽃제비 출신이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을 배우고 있데. 멀끔하다 못해 조각이야, 얼굴이. 강연회가 끝나고 간단한 다과회가 이어졌는데 언제 왔는지 조셉이 다가왔어, 김철수와 얘기하는 도중에. 둘을 서로 소개해 주었지. 김철수를 바라보는 조셉의 눈빛이란! 참 남자들은 알 수 없어.
사실 문창반에서 홍일점으로 있을 때 나를 두고 너희들끼리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했다는 건 이미 알아. 여자들은 대부분 느낌으로 알거든. 식당 아저씨랑 김철수가 친한 사이야. 비트코인도 김철수가 옆에서 부채질한 모양이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통역을 김철수가 해도 되는데 왜 부탁했는지 막연하게 짐작이 가. 아저씨는 나를 김철수와 엮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솔직히 조셉도 부담이지만 김철수도 마찬가지야.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니까. 정서적인 교류가 쉽지 않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견고하고 거대한 성벽을 맞닥뜨린 느낌이랄까? 간혹 식당에서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걸 볼 때가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들이 겪은 경험을 이해하고 동감하는 데 한계가 있더라. 그건 김철수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박철수 얘기를 했더니 표정 변화가 전혀 없어. 피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싸우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더라. 갑자기 의정부 교도소가 생각나. 박철수는 잘 지내고 있겠지? 내가 듣기로 빡센데 배치받았다던데. 공수부댄가?
지금도 아우성치고 있어. 어쩌면 아우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 지병처럼 그림자처럼 평생 끌고 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시는 쓰지 못해도 이렇게나마 마음에 있는 말들 쏟아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다들 그립다. 만나는 그날까지 잘 지내. 총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