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제비

캘리포니아 그녀 11화

by 이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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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코리아타운 늘봄식당에 조셉이 왔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기까지 아마도 일 년 남짓 걸리지 않았을까?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사람은 나 말고도 베트남 여자애도 있어. 응옥찐이야, 이민 3세. 사이공 함락 이틀 전에 응옥찐의 할아버지가 미군 헬기를 탔대. 인민군이 정부군을 몰아냈지만 여전히 북부와 남부의 갈등은 엄청나.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처럼 말이야.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지역감정이라며 단순하게 넘어가기 힘들 정도야.


오랜 시간을 두고 마음 안에 쌓인 것들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 사상이 생겨나기 전에 이미 사람은 존재했었는데 말이야. 프레임을 만들고 그 속에 사람을 집어넣으려는 짓은 멍청한 헛수고야. 당장은 기세등등할지 몰라도 멀리 보면 잘못이었다는 걸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아무튼 조셉은 자기보다 훨씬 덩치 큰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응옥찐의 테이블에 앉았어.


웨이트리스는 저마다 자기 구역이 있거든. 응옥찐은 흑인이라면 겁부터 집어먹어. 무슨 트라우마인지 자세히 몰라. 등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내가 주문받으러 다가갔어. 조셉은 싱글벙글 웃는데 같이 온 친구는 어떤 결심으로 마음을 다잡고 있는지 사뭇 심각한 얼굴이야. 그렇거나 말거나 주문받는데 허리춤에 찬 권총을 봐버린 거야. 캘리포니아는 항상 법보다 주먹이 먼저야.


나쁘게 말하면 총 맞아 죽는 사람만 바보야. 죽고 난 다음에 원상회복이 안 되는 것은 분명하고 뒤늦게 찾아온 법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지 죽은 사람에겐 가혹해. 추모는 한참 뒤늦은 아우성이야. 아저씨와 여주인은 바짝 긴장했어. 물론 응옥찐도. 조셉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물론 검고 윤기 나는 메기는 잊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 별다른 일은 없었어.


문제는 조셉이 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까지 에스코트해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던 거야. 난감해하는데 때마침 멜라니가 왔어. 룸메이트고 항상 나를 데리러 온다고 뻥 쳤지.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조셉이 뭘 어쩌겠어? 그들이 식당에서 나가자 비로소 아저씨는 김철수만 있었더라면 한 줌도 되지 않는다며 허풍 떨었어.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김철수는 법이 정한 총기 소지 나이가 되자마자 권총부터 샀대. 야외 사격장에도 뻔질나게 들락거리고.


어릴 때부터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버린 탓일까? 쉽게 짐작할 수 없지만 산다는 것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봤던 사람들은 우리랑 뭔가 다를 거라는 건 추측은 할 수밖에 없잖아? 꽃제비였다잖아? 함흥에서 혜산까지 멀고 길고 지루한 그 길 위에서 형과 누나를 잃은 기억까지 덧붙인다면 어쩌면 지옥의 끝까지 가본 것은 아닐까? 그것도 어린 나이에. 그러나 나는 생각해.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조셉의 차가 움직이지 않아.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 캘리포니아에는, 더구나 여자에겐.


멜라니는 허쯔와 달리 강단이 있어. 프랑스와 캘리포니아가 비슷해서일까? 신경조차 쓰지 않아. 단지 응옥찐을 처음 봐서 신기해하더라. 같은 동양인데 나와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냐고 귓속말로 묻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어? 솔직히 외모 가지고 놀라워하는 게 낯설지 않지만 적응이 되는 것도 아니야. 멜라니가 아저씨도 여주인도 가보지 못한 평양 얘기를 들려줘.


아저씨와 여주인은 감탄과 놀라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간단한 한국어와 영어와 불어까지 뒤섞인 얘기를 얼마나 알아듣는지 알 수 없으나 아저씨와 여주인은 조셉과 친구가 만들어낸 두어 시간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마움 때문인지 아니면 캘리포니아 여자애들과 조금 다른 금발과 훨씬 반듯한 이목구비 때문인지 멜라니에게 더없이 싹싹하게 대했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운전하며 멜라니가 말하더라. 대부분 남자들은 용기 없는 허풍 덩어리들이라고. 세게 나오면 더 세게 받아쳐야 한대. 물론 일부러 져줄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는 거야.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어쩌면 그런 자기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내가 볼 때 아닌 것 같아. 결혼도 아니고 단지 동거할 뿐인데 다른 여자와 눈이 맞은 남자 친구를 감쌀 필요는 없잖아?


시(詩)를 쓰고 싶어.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닌지 써지지 않아. 기다릴 수 있어, 끈기 있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멜라니는 훌러덩 옷을 모조리 벗고 샤워하고 전신 거울 앞에서 생쇼를 하기 시작했어, 느리지만 부드러운 샹송을 틀어놓고. 몸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아름다움을 즐기는 중이라나 뭐라나. 저마다 자기애(自己愛)를 갖는 방법이 다르잖아? 영사관에서 연락 왔어. 한국문화원에서 한국 영화 보기를 하는데 일주일 동안 알바할 수 있느냐고.


당연히 식당 알바와 시간이 겹쳐. 고작 일주일 하려고 그만둘 수 없어 고민이야. 얘기하면 아저씨가 일주일 정도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염치가 없잖아? 응옥찐한테도. 여긴 다 주급인데 페이가 센 쪽은 문화원이야. 모르겠어, 어떻게 될지. 내일을 알 수 없는 게 사는 거잖아?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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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배신하지 않지만 인철수를 떠올리면 역시 선택과 집중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광산골 골짜기 끝자락 여기저기 사슴벌레처럼 웅크리고 있는 막사며 행정실, 식당과 종교시설, 복지시설 따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폭설 내리던 겨울 깊은 밤, 넉가래로 종횡무진하던 연병장도 이제 막 돋아나는 나뭇잎 새싹에 화들짝 놀라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천천히 꿈틀거렸다. 지나온 2년 3개월이 곳곳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빠릿빠릿하던 초짜 중대장은 어느 사이 능글맞아 대대장 앞에서는 군인정신 투철한 표정 짓곤 하지만 중대로 돌아오면 군인의 시간이 따분한지 느릿느릿 중대 여기저기 산보하듯 걸어 다녔다.


전역한 인사계를 외출 나가 백의리 좁은 동네에서 맞닥뜨렸을 때는 버릇처럼 거수경례했다. 출근할 곳을 잃어버린 인사계는 폭삭 늙었지만 습관이 늘그막을 지탱하고 있었다. 인사계는 골목골목을 순찰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특히 하나뿐인 여인숙이 주로 점검 대상이었다. 노가다가 전역한 이후로 동기들 중에서 전역이 가장 늦은 허스키는 신기하게도 노가다를 닮아 후임들을 화장질 뒤로 집합시키곤 했다.


말리기도 했으나 막무가내라 이내 포기했다. 초소 근무 마치고 다시 잠들기 전 푸세식 화장실에서 아랫도리 발가벗고 쭈그려 앉아 힘을 쓰다 보면 화장실 뒤편에서 허스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대란 말이야…, 까라면 까는 거야.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고 가는 신음도 가끔 들렸다. 유구한 전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짜 중대장은 능글맞은 중대장이 되어버려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았다.


이 병장님, M60 수리는 어떻게 합니까? 인계인수하기 위해 병기고(兵器庫) 쇳내 어색해하는 후임이 물었다. 권총도 있습니다. 처음 만져봅니다! 재고목록을 들고 후임병과 실사했다. 수량과 품목이 일치했다. 후임병의 사인을 받고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총기 수리는 다 똑같아. 닦고 기름칠하고. 다만 종류에 따라 분해와 결합이 다르지. 결합이야 분해의 역순이니까 유의하면 되는데 가끔 공이(Firing Pin)를 빼먹는 경우가 있어. 특별히 조심해야지. 특히 너는 개인화기 수리할 때도 공이를 자주 잊어버리니까 조금 걱정은 된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취사병이었던 후임은 바뀐 보직이 마음에 들어 약간 들떠 있었다. 애당초 후임은 취사병 주특기도 아니었다. 중대 형편에 맞춰 보직 받은 것인데 때마침 취사병 보직이 알파 중대로 배치받아 왔던 터였다. 이런 식의 돌려막기는 너무 흔하고 때론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대대장도 인사계의 부대 운영에 참견하기 어려웠다. 분해와 결합은 며칠 시범 보일 테니까 날마다 총기 만지면 익숙해질 거야.


다음은 탄약고. 병기고를 나와 부대에서 골짜기 쪽으로 좀 더 들어간 4부 능선으로 올라갔다. 만일의 사태를 위해 탄약고는 부대의 각종 건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병기고에 보물을 숨겨놓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생기면 찾아봐. 보물이요? 정말입니까? 저는 총기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후임은 의아해했다. 초식(草食)이나 전환 시대의 논리, 전태일 평전 따위를 병기고 여기저기,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은밀하고 깊은 곳곳에 숨겨놓았다.


일과(日課) 없는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가끔 일과를 땡땡이치면서 병기고에 몰래 들어와 안에서 밖으로 손을 뻗어 자물쇠를 채워놓고 읽곤 했다. 전태일 평전 읽다가 불현듯 인철수를 떠올릴 때면 더없이 씁쓸했다. 전후 사정이야 자세히 모르지만 현사반을 박살 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의정부 교도소로 붙잡혀간 박철수가 무엇 때문에 인철수에 대한 경계심을 놓아버렸는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캘리포니아 그녀 탓은 아니지 않은가.


박철수는 단순히 그녀를 가운데 둔 경쟁자라고만 여겼을 터이니. 사람은 사람을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그녀 말이 생뚱맞은 건 아니라는 판단을 가까스로 하고서야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탄약 상자를 열어 일일이 점검했다. 온갖 종류의 실탄과 클레이모어(M18A1), 수류탄은 총기류보다 엄격하게 관리해야 했다. 하지만 탄창에 꽂힌 실탄은 수를 헤아리기 귀찮았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유격장에서 강철수가 실탄을 구한 것은 5분 대기조 출동 때 탄창에서 몰래 실탄 하나를 빼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면서 브라보 중대 인사계는 물론이고 중대장 역시 문책당했다.


사실 중대 행정실 당직 사병이 5분 대기조 출동 후 부대로 복귀했을 때 일일이 점검해야 했다. 작고 대수롭지 않아 쉽게 넘어갈 일들이 모여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었다. 어쩌면 박철수 역시 입만 열면 캘리포니아 그녀 얘기만 줄곧 해대는 인철수를 그저 만만한 경쟁 상대로 여겼을 터였다. 탄약고 실사가 끝나고 다시 후임병의 사인을 받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병기고에도 보물이 있지만 탄약고에도 있어. 나중에 잘 찾아봐. 정말입니까? 저는 안 보였습니다. 탄약고 후미진 은밀한 곳에 강철서신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주세죽(朱世竹)처럼 강철서신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목적으로 몰아붙여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일당들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3주 후 대대마다 돌며 전역 대기병 태운 다찌차 타고 연대 향해 광산골을 떠났다. 군 복무도 이제 멀리서 보게 되니 희극일까…, 캘리포니아 그녀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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