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그녀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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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어. 여행이라 생각했어. 남쪽 한국 떠나 캘리포니아 햇살 맘껏 즐기며 바보 같은 캘리포니아 애들처럼 지내리라 생각했어. 실제로 많은 날을 바보로 살았던 거 같아. 캘리포니아 애들이 얼마나 바보인지 너희들은 모를 거야. 그런데 벌써 2년 지나 진짜 바보가 된 거 같아, 마음만 먹으면 아프리카든 중동이든 얼마든지 요리할 수 있다고 대충 믿어버리는.
흑인 애들보다 남미 쪽 애들이 더 무서워. 간단해. 흑인은 돌아갈 땅이 없어. 조셉만 해도 그래. 아침 햇살에 검고 윤기 나는 메기를 꺼내 보여주고 늘봄식당까지 찾아오기까지 거의 일 년이 걸렸어. 아마도 침대까지 가려면 십 년이 걸릴지도 몰라. 일주일쯤 됐나? 하이스쿨에서 사건이 있었어. 학생은 아니고 직원이야. 선생은 아닌 걸로 기억해. 수업 중인 교실로 들어가서 드르륵 갈겼대. 탕탕탕 쏘았다고 해야 하나?
현장을 보지 못했지만 영화는 저리 가라야.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긴 하는데 처음엔 멋있다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야. 현실은 고통스러운 거야. 뉴스 화면에 나온 빙그레 웃는 총잡이는 남미 사람이야. 바보 같은 캘리포니아 애들은 서둘러 둘러대지. 정신병자라고. 사실 이런 수법은 남쪽 한국에서도 유행했잖아? 누구도 눈앞의 현실을 맞닥뜨리려고 하지 않아. 변명하고 둘러대고 거짓을 퍼트리지.
한 명 한 명은 똑똑하고 착해. 멜라니만 봐도 그래. 하지만 모이면 다들 바보야. 물론 멜라니는 프랑스 여자애야. 집에 들어오자마자 훌러덩 벗어버리고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을 확인해. 가끔 커튼 활짝 열어젖힌 창문 앞에서 한동안 밖을 내다보기도 해. 누군가 보겠지? 하지만 대부분 신경조차 쓰지 않아. 나만 안절부절 눈길 둘 데가 없어 허둥지둥 혼자 얼굴 빨개지고 곤혹스러워하지.
그거 알아? 정작 신경 써야 할 것은 남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거. 어차피 사람은 타인을 제멋대로 만들어서 인식하잖아? 그러니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를 신경 쓸 필요가 있겠어? 말짱 헛수고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간혹 멜라니가 없을 땐 나도 벗어. 맞아. 아직 멜라니 수준까지 가려면 멀었어. 멜라니가 외박하는 건 나 때문이야. 허쯔처럼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아, 동거했던 남자 친구는 아닌 것 같고. 멜라니가 말하지 않으니 굳이 내가 궁금해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신경 쓰지 않아.
하지만 간혹 멜라니의 몸에서 싱싱한 남자 냄새 맡는 건 피할 수 없어. 맞아, 처음엔 단순하게 여행이라 생각했어. 북쪽 한국 사람들을 만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양강도 혜산의 비좁고 더러운 골목을 막연하게나마 떠올릴 거라곤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어. 함흥에서 혜산까지 멀고 먼,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황량하고 척박한 그 길 걷고 있는 꿈을 꿀 때마다 화딱지가 나, 버럭. 아저씨는 내게 잘 해주만 김철수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우린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사귈 필요는 없잖아?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작고 소박한 영화제에 스텝으로 참가해. 며칠 됐어. 아저씨와 여주인이 왔었어. 반공영화를 상영했어. 나는 무척 곤란했어. 아저씨와 여주인은 잔뜩 골이 난 표정이었고. 물론 캘리포니아 사람들도 있어. 문화원 원장은 낙하산이야. 듣기론 대령 출신이래. 무슨 배짱으로 반공영화를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지 의도가 수상해. 우리는 이렇게 멋지고 깔끔하게 아무리 형제일지라도 공산당은 처리한다?
빨간당이나 파란당이나 오십 보 백 보가 아닐까? 모르겠어. 페이가 좋으니까 그냥 모른 척해. 비겁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아저씨와 여주인의 분통은 충분히 이해해. 자기 입장만 내세우고 자기 입장만이 올바르고 자기 입장이 유일한 세계 인식의 기준이라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오류이고 실수이며 잘못이야. 시인이 말했잖아? 이렇게 비켜서 있는 것이 얼마나 비겁한지 알고 있다고.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작으냐고 한탄했지. 모래알보다 작다고…, 집으로 돌아왔어.
멜라니는 외박 중이야. 캘리포니아 애들처럼 나도 바보가 되어 가는 건 아닐까, 답답했어. 옷을 벗었어, 씻김굿 하듯이, 천천히. 조금씩 드러나는 거울 속의 나를 봐, 한때 메이퀸이었던. 그러나 숱한 남자들이 넋 놓고 바라보거나 훔쳐보거나 하며 침 흘리는 메이퀸은 없어. 검은 머리에 작고 어깨 좁은 동양인이야. 탐스러울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몸이야. 함흥에서 혜산까지 길고 거칠고 외로운 길 위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배고픔에 꿈에서 깨는. 다시 잠들어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해.
멜라니의 몸에서 나는 싱싱한 남자 냄새가 그리워. 조셉의 검고 단단한 메기가 불현듯 떠올라. 길은 항상 산속으로 이어졌어. 그 산속에 또 산이 있어. 혜산은 멀고 카프카의 성처럼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야…, 꿈속에서도 전신 거울 앞에서 나는 벗어. 아무리 벗어도 좀처럼 몸은 보이지 않았어…, 멜라니는 외박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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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지나 다시 읽어봤어. 보내도 괜찮은 편지일까, 오해와 갈등을 불러오지 않을까, 망설였어.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너희는 내가 아니고 내가 너희가 될 수 없어. 더구나 낯설고 딱딱한 캘리포니아 생활을 너희가 아무리 상상해도 결코 근사치 근처에도 가지 못해. 모든 체험은 당사자에게만 절대치(絶對値)거든. 듣거나 보는 것은 제멋대로 왜곡되는 상대치(相對値)일 뿐이야. 고등학생 무렵 비웃고 깔보던 교과서가 상대치였어.
지금도 잊히지 않아. 선생들은 무슨 대단한 진리인 양 교과서를 숭배했어. 세상의 모든 답이 교과서에 있다며 지랄발광을 했지. 사이비 교주들이었어. 눈에 빤히 보이는 자랑질과 우스꽝스러운 멋짐이 오로지 교과서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선생들. 절댓값으로 위장한 상대치에 갇혀 있었어. 맞아. 편지는 결코 시(詩)가 될 수 없어. 강당은 크지 않아. 겨우 50명 정도쯤이야. 첫날은 열댓 명이었어. 태극기 휘날리며를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눈에 들어와.
스텝이니까 어쩔 수 없어. 감독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남쪽 한국의 레드 콤플렉스를 풀어놓고 있어. 남쪽 한국의 기득권층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의도가 너무나도 분명히 드러나는 이야기. 역사적 실체는 온데간데없고 역사적 해석만 어지럽게 난무하는 조잡한 이야기야. 영화가 끝나면 관객은 절대치로 위장한 상대치에 감동받고 수상한 레드 콤플렉스에 감염되어서 규격품이 되지.
맞아. 연탄은 그렇게 찍어내는 거지, 이문동 연탄공장. 윤기 반들반들 햇살 아래 반짝이는 연탄들은 전국 방방곡곡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서 제 몸이 불타는 것도 모르고 불타. 웃기지 않아? 푸석푸석한 석탄 가루에서 연탄이 되었다고 좋아하다가 불타는 제 몸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니. 태극기 휘날리며는 열심히 연탄을 만들고 있어.
기득권은 장황하게 늘어놓은 레드 콤플렉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지. 문화원 원장은 대령 출신이야. 괴벨스야. 아저씨와 여주인이 골나고 분통 터뜨리는 게 당연해. 캘리포니아에도 연탄공장이 있어. 겨우 50명 정도? 자리가 다 차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연탄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원장이 보기에 마냥 흐뭇하겠지? 기득권은 더욱 탄탄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만들어가면서 급기야 역사가 되려고 하겠지?
그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만큼 좋은 것은 없어. 누구나 쉽게 연탄이 되려고 하니까. 권력을 유지하면서 떵떵거리고 잘 먹고 푹 자는 밑천이 마르고 닳도록 레드 콤플렉스라니…, 웃기지 않아? 만주 벌판 말 달리던 이들은 사글셋방에 갇혀 있고. 영화가 끝나고 어느 사이 연탄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아. 원장은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탄들을 바라보지. 그리곤 스텝들을 이끌고 파티를 해.
이미 완벽하게 윤기 반들반들한 연탄인 팀장은 나를 원장 옆에 앉혀. 일주일이지만 인턴으로 일하면 어때요? 물론 페이는 두둑합니다. 면접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지만 단박에 같이 일해보겠냐고 제의했던 남자야. 늘봄식당은 비교도 할 수 없어. 남쪽 한국식 파티장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한국적인 장소야. 깜짝 놀랐어. 메이퀸 무렵으로 되돌아간 듯싶었다니까. 암튼 원장은 행복했어. 소맥이 급하게 만들어졌고 저마다 들이켰지.
그런데 술상 밑에서 스멀스멀 허벅지로 기어오르는 꿈틀거림이 있었어. 팀장은 한사코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강조했어. 파티 때마다 원장 옆에 앉는 여자는 늘 바뀌어져. 무릎 아래일 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어. 하지만 스멀스멀 무릎 지나 허벅지 안쪽으로 다가오는 거야. 메이퀸일 때도 없었던 일이야. 그동안 원장 옆에 앉아 있던 여자들 얼굴이 순식간에 떠올랐어. 원장은 맞은편에 앉은 팀장에게 덕담하고 있었어, 손은 내 허벅지 안쪽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고.
그때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 원장은 내가 훌륭한 땔감인 연탄이 되어 있다고 여겼는지 모르지만 천만에! 소맥을 원장 얼굴에 확 끼얹었어. 다들 화들짝 놀랐지. 특히 팀장이. 팀장의 계산이나 계획에 따르면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일이야. 지금껏 있지도 않았던 일이고. 하지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어. 거지발싸개 놈아! 나는 당당했지만 도망칠 수밖에 없었어. 연탄들에 둘러싸인 기득권은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이고 요새야.
포기했는데 일주일 치 페이는 은행으로 들어왔어. 오해하지 마시고 원장님이 귀여워하시는 거니 그렇게 생각해주세요. 다음에 일이 있으면 또 부탁합니다. 능글맞은 팀장의 목소리가 문자로 왔어. 알고 있어, 편지는 절대로 시(詩)가 될 수 없다는 거. 원장이 아니라 조셉이나 샘이었다면 허벅지에서 스멀거리는 꿈틀거림을 내쳤을까? 모르겠어. 샘은 진짜로 완벽한 캘리포니아 사람이야. 남쪽 한국이나 북쪽 한국 따위는 몰라. 사우스 코리아 노스 코리아는 샘의 머릿속에 없어. 완벽하게 선입관이 없지.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만약 너희들이 읽는다면 아마도 샘을 보기 위해서일 거야.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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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 2일의 느닷없는 갑작스러운 세미나. 말이 세미나지 복학 환영회 핑계 삼아 질펀하게 놀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도시 빠져나가는 일을 일종의 모험으로 여길 정도로 뼛속까지 도시인이 되어버린 후배들과 집중적으로 친밀감을 쌓을 좋은 기회. 휴가 때 얼굴 익은 후배도 있으나 대부분 초면이고 몇 년 사이에 확 바뀌어져 버린 사회 분위기 탓도 있지만 복학생이나 후배들이나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세대 차이를 저마다 느끼고 있는 터였다.
습작 토론이나 독서토론의 분위기가 마치 프레젠테이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영역에 절대 발 내딛지 않고 일정한 거리 유지하면서 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끝나버리는 토론은 더없이 싱겁고 밍밍하고 끝나면 퇴근하듯 제각각 문창반 빠져나가는 모습에 후배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앉아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뒤포에도 가지 않았다.
후배들 보기에 장욱진을 비롯한 우리는 싸구려 술꾼에 지나지 않았다. 허구한 날 치고받고 말싸움 밥 먹듯이 하면서도 개떼처럼 뒤포로 몰려가 부어라 마셔라 세상 끝난 것처럼 엉망으로 취해버리니 한심한 눈길로 보는 터였다. 물론 몇 번 뒤포로 데려간 적도 있으나 후배들은 한결같이 술을 거부했다. 더구나 취해서 하는 말들에 대한 신뢰도가 현저하게 낮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설령 좋은 의도로 말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약은 약사에게 미래는 새세대에게."
김선미의 놀림에 복학생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감정에 생채기 내는 말들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걸핏하면 퍼붓는 우리와 달리 후배들은 훨씬 세련되고 점잖고 깔끔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충분히 인정해 준다. 그러나 나와 아무 상관 없으니까 더 이상 너의 생각에 관심 없어. 선을 넘는 경우가 없고 마땅히 안타까워하거나 칭찬해야 하는 감정의 낭비도 없었다.
우리에게 캘리포니아 그녀의 편지는 많은 상상과 찬반(贊反)을 불러오지만 후배들에게는 어떤 감정도 만들지 못했다. 글자와 글자가 서로 부딪쳐 서걱거리는 모래알처럼 보일 뿐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내보이는 일 따위는 없었다. 후배들에게 그녀는 그저 옛날 사람일 뿐이었다. 딱 한 번 후배들의 생각을 듣고 대판 훈계조로 장광설 퍼부은 뒤에는 더욱더 기피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시니컬한 아나키스트가 맞아요. 교과서요? 많은 사람이 오랜 시간 걸쳐 정리한 지식을 모아놓은 건데 말하자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만 어렵게 추려서 자세히 설명해 놓은 묶음인데 헌신짝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실제로 우리는 교과서의 범주 안에서 살아가고 벗어나면 사회에서 격리되잖아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천 년 내려온 지식이잖아요? 그렇다고 아나키스트가 되려는 사람을 말릴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그녀로 살고 나는 나로 살면 그만이니까요."
얼굴 생김이 다르듯 저마다 제각각의 논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터였으나 말문이 먼저 막혔다. 함께 있던 시간은 물론이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쩌면 우리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더라도 교과서의 바다에 빠져 육지 따위는 없다고 믿는 견고함에 놀라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연탄론은 정말 웃기는 비유고 아니면 말고 식의 상징이 분명해요. 무책임해요. 허벅지에 스멀거리는 손도 상징이에요.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편지가 오니까 이런 사람이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구나, 막연히 여기는 거지 실감 나지 않아요."
"예전 학교 홍보 책자를 본 적이 있는데 얼굴과 편지가 전혀 매치하지 않아요. 그해의 메이퀸은 졸업해서 결혼하고 알콩달콩 신혼생활 즐기고 있을 거라고 말하면 금방 의심 없이 믿어요.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가서 말도 되지 않는 편지를 보내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다분히 의도적인 반전이라면 모를까…."
"남쪽 한국 북쪽 한국이라고 하는데 엄격하게 말하면 조선과 한국이잖아요? 서로 다른 국가 아니에요? 그래서 유엔도 따로따로 가입하고. 하나의 민족이 굳이 하나의 국가일 필요가 있나요? 미국이나 중국은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하나의 국가예요. 일본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민족이 같으니까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생떼 쓰는 짓과 다름없어요. 현실을 부정하는 거예요. 남조선이나 북한이란 용어도 그래서 잘못된 거예요. 그냥 조선과 한국이에요."
후배들은 그녀의 편지를 철저하게 오독하고 있었다. 적대감과 불안을 집단적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있고 잊고 있다고 믿었다. 망각은 편리하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터였다. 우리가 간빙기에 살고 있다는 걸 후배들은 왜 믿지 못하는 걸까.
"끝장 토론은 세미나가 최고야. 두말 말고 나와."
김선미가 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