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쯔와 멜라니

캘포니아 그녀 12화

by 이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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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하고 연극했잖아."


김선미는 우울한 표정이었다, 목소리는 맑고 가벼웠다. 더없이 낯선 불협화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난감한데 김선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랑 놈이랑 헤어지려고. 허우대만 멀쩡하지 몹시 나쁜 놈이야. 어쩌다 한 번은 용서해줄 수 있어. 사실 어쩌다 한 번이 반드시 열 번이고 백 번이긴 하지만 눈치채지 못했어. 신랑 놈의 즐거움이 왜 나한테 괴로움이 되는 거야?


모노드라마를 보는 게 아닐까, 불협화음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직 군기 덜 빠진 몸은 딱딱했다.


말이 후배지 애인이야. 애인도 아니야, 잠자리 파트너지. 밤마다 생각했어. 복수하되 이별은 없다고. 하지만 잘못짚은 거야. 연극은 무대에만 있는 게 아니었어. 세상에 어떤 여자가 카사노바를 미워하겠어? 그런데 신랑 놈이 카사노바라면 얘기는 달라지잖아?


불협화음 때문인지 어설프다 못해 눈 뜨고 볼 수 없는 막장 모노드라마가 분명하다며 고개 돌려 거리를 바라보았다. 통유리 너머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은 발걸음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서둘러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었다.


노가다는 어디쯤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노가다를 닮아가는 허스키는 여전히 화장실 뒤편에 후임들을 집합시키고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으름장을 놓고 있을까….


무대 위 침대에서 두 사람 엎치락뒤치락하는 건 관객이 봐. 하지만 제4의 벽이 있는 곳에선? 사람마다 입장이란 게 있잖아? 신랑 놈이 침대 위에서 후배와 얼씨구나 좋다고 뒹구는 걸 보면 아내 입장이고 싶겠어? 어떻게 생각해? 남자들은 다 그런 거야?


"사람마다 다르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제대한 걸."


"형이 가장 빠르잖아. 엊그제 욱진 선배 면회 갔더니 얘기하더라."


장욱진 면회 갔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면회 한 번 오지 않았어? 말하지 않았다. 습작 토론할 때 했던 독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으니 김선미 역시 마찬가지. 어떻게 할 도리 없고 감히 넘볼 수 없는 벽 앞에서 함부로 까부는 게 아니야. 정신 차리고 살아…. 뒤늦게 주워 담으려 안간힘 쓰지만 김선미는 여전히 기억하리라.


"캘리포니아에서 언제 돌아온대?"


말머리 돌리자 모노드라마는 예고 없이 끝났다. 김선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분홍색 종이를 내밀었다. 간혹 나한테만 보내는 편지가 있어. 형들한테 보내는 거랑 좀 달라. 아무래도 여자끼리 하는 얘기는 좀 다르거든.

안녕, 선미야. 널 생각하면 문창반 처음 들어왔을 때 잔뜩 겁먹은 눈빛 떠올라. 물론 의정부 교도소 가는 길에서 느닷없이 만났을 때와 전혀 다른 눈빛이야. 생각보다 단단해졌다고 여겼어. 그러니 연극을 하겠지? 재미있니? 연극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좋을 거야. 오로지 자신의 형편만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잖아.


사실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더 낫기를 바라잖아? 욕심은 끝이 없어. 끝없는 수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허둥지둥 살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아. 시간은 늘 풍부한 게 아니거든. 결혼 생활이 이쁘지 않은 모양인가 봐. 고민도 많이 했겠지. 이것저것 생각하고 짚어봐야 할 것도 많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남자를 믿지 않아. 힘겨울 때 서로 기대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 위로 주고받을 수 없다면 마침표 찍어, 무서워하지 말고. 사실 너무 일찍 결혼한다고 생각해서 위태롭다고 여겼어.


네 청첩장 받아 들고서 한동안 정신이 멍해졌어. 그때 허쯔랑 살 때였는데 꼬치꼬치 묻는 거야. 눈치는 있어서 누가 결혼하느냐고 묻더라. 친한 동생이라고 했더니 놀라더라. 허쯔의 놀라움은 단순한 거야. 솔로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재빨리 포기하느냐는 거지. 가만 보면 허쯔가 테일러를 가지고 노는 건지도 몰라.


암튼 연극하는 사람은 다들 좋지만 남자로 만날 때는 또 달라. 게다가 남편이면 또 달라져. 많은 생각보다 그저 눈먼 행복감에 빠져 결혼했을지라도 허상에서 빠져나왔을 때 두려워하거나 미리 걱정하지 마. 껍데기뿐인 행복감이 행복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이미 허상으로 탈바꿈했으니 애써 붙잡아 그 안에 머물려고 안간힘 쓰지 마,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멜라니의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우선 네 몸을 사랑해. 몸을 괴롭히면 정신도 괴로워.


사실 멜라니가 없을 때 멜라니처럼 발가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서봤어. 아주 낯선, 생판 처음 보는 여자애가 거울 안에 있더라. 멜라니는 거울 보면서 몸을 뛰어넘어 영혼이 자유롭다는 걸 본다는데 나는 거기까지 갈 수 없었어. 자신에게도 창피했으니까. 서둘러 옷 입고 거울 보니 익숙한 내가 있더라. 익숙하지 않은 나를 익숙한 내가 감추고 있는 거야. 그러니 선미야, 항상 용기가 필요한 거야. 그거 알아? 시(詩)를 쓸 때도 엄청 용기가 필요하다는 거?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용기를 이미 가지고 있는 거야, 짐짓 없다거나 감추려고 하지 마. 네 고민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이만 총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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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 하나 없네."


"형도 그렇게 생각해?"


편지에 공감한다는 투여서 조금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중대 결정 앞둔 김선미에게 어찌 보면 마냥 남일 수밖에 없는 김선미에게 감 내놔라 배 내놔라 독불장군처럼 호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남자와 다르게 보는 여자가 사는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남자는 큰길 직선만 알고 있지 모세혈관처럼 세밀하고 은밀하게 연결되는 골목길의 곡선을, 살아감의 온갖 미스터리와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는 골목길의 곡선을 알지 못하기에 말 아끼는 편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또한 몰랐다.


제아무리 김선미의 이것저것 제각각 조각으로 흩어져 있으나 자질구레한 형편들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한번 어긋나기 시작한 관계는 상상을 뛰어넘는 묘수가 있다 하더라도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만들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어긋난 관계를 마구 뒤엉킨 실타래처럼 도저히 어찌할 수 없도록 엉망진창으로 만들 뿐. 통유리 창밖 거리의 사람들은 바쁜 걸음 옮기지만 평화로워 보였다.


"그런데 이런 편지 자주 보내와?"


"가끔."


가지고 다니지 않을뿐더러 보여달라고 하기에는 선을 넘는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여자의 세상이 아닌가. 적어도 겉으로 볼 때 여자와 남자는 어쩌다 전쟁도 불사하지만 그럭저럭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어쭙잖은 시선에 거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저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을 터.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인데?"


김선미는 골똘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글쎄, 상황에 맞는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냥 일반론으로 들었으면 해. 결국 남편과 아내의 대립이 아니라 아내와 세상의 대립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야. 아내가 남편의 일부분이 아니라 아내가 파악하는 세상에 남편이 일부분이라는. 말이 좀 꼬였지? 보통 기가 세다고 하는 아내는 세상 일부분으로 남편을 생각해. 의존적이 아니라는 얘기고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지. 요즘 대부분 여자가 그렇지 않은가?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여기니까. 반드시 남편 통해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거지. 결혼을 운명이라 믿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재주껏 서로 맞추면서 살아가는데 수틀리면 헤어지고. 그렇다고 네가 숫자가 틀렸다는 건 아니고 일반론이야. 미혼이든 기혼이든 돌싱이든 결국 가장 커다란 문제는 눈앞에 놓인 현실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거잖아?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말하면서도 어딘가 아귀 맞지 않아 찜찜함이 계속 혀뿌리를 간질이고 뱉어낸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아찔한 절망이 느닷없이 거친 파도처럼 밀려올 것만 같은 불안함에 했던 말을 다시 하는 동어반복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캘리포니아의 그녀처럼 차라리 시(詩)를 쓰는데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정작 그 용기를 자신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못할까, 뒤늦은 자책감마저 들었다. 김선미는 따분한 얼굴이었다.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 줄까?"


김선미는 말꼬리를 끊었다. 들으나 마나 한 얘기에 혼란스러워하지 않겠다는 것.


"허쯔가 언니한테 쓰리섬 제안한 적이 있거든. 테일러랑."


화들짝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김선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허쯔와 테일러와 쓰리섬을? 머릿속에서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공산당 고삐를 벗어던져 벗어난 허쯔가 가보지 않은 벌판 어디까지 달려가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공산당이 몸과 정신을 통제하는 사회에서 최고지도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자유세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나 즐길 수 있다는 뒤늦은 발견이 허쯔를 충분히 흥분하게 했으리라는 추측은 넉넉히 할 수 있었다.


몸은 금방 눈치채지만 정신은 갇혀 있다는 걸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다. 규칙이나 관습 혹은 도덕이나 법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꼼짝달싹 못 하게 정신을 가둬 놓고 최고지도자는 날마다 만찬 즐기지 않는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사실은 인류사에서 변하지 않는 진실로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가.


"언니가 쓰리섬을 했을 거 같아? 아님 거절했을 거 같아?"


김선미는 알 듯 모를 듯 엷은 아리송한 웃음을 지었다. 통유리 밖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생침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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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어볼게. 했을 거 같아? 아님 외면했을 거 같아?"


김선미의 얼굴에 묘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머릿속에 낯설고 보기 드문 그림이 그려졌다. 커다란 침대, 조금 열린 커튼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게으른 노을, 느리게 걸어가는 전자식 탁상시계, 먹다 남은 칠면조에 여전히 남아 있는 피어오르는 달큼한 냄새, 와인잔에 조금 남은 백포도주, 굳게 닫힌 현관,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빨간 팬티와 브래지어, 침대 위에 뒤엉킨 세 사람…, 얼마나 거대한 유혹인가, 멈출 수 없는.


"편지에 답은 없어. 언니가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 몰라. 분명한 건 내가 형한테 말함으로써 쓰리섬에 대한 소문의 씨앗을 심은 거지."


조롱에서 절망으로 급격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최고지도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머릿속에서 모든 상상은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캘리포니아 그녀에 대한 평판이나 이미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순간적인 심정적 판단이 앞섰다. 조용히 그러나 쾌락에 아우성치는 마음속 풍경을 읽은 것일까, 김선미는 절망에서 비웃음으로 넘어가 있었다.


"형이 이미 선택해버린 것처럼 나도 선택하고 나서 돌싱에 대한 평판을 탐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소문의 씨앗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김선미는 밑바닥에 몇 방울 남은 커피 입안으로 털어 넣고 멍한 표정으로 통유리 밖을 건너다보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모두 어디로 그렇게 서둘러 걸음 옮기는 걸까.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역사적 실체는 없다는 말이 생각나네. 다만 역사적 해석만 있을 뿐. 역사적 해석도 결국 소문이니까. 우리는 소문에서 더욱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어렵지…, 그게."


김선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뒤늦은 판단이 들자 그제야 끈적끈적한 쓰리섬이 질펀한 캘리포니아 아파트의 늦은 오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일지라도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의 소문은 쉽게 역사적 실체로 둔갑하기 바빴고 있지도 않은 그 실체를 진실이라 믿어버림으로써 자신의 심정적 쾌락에 몰두하는 것일지도.


누군가로부터 소문의 씨앗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럭무럭 키워서 마을의 거대한 수호목(守護木)으로 만들지 않던가. 마을 사람들이 뜨거운 뙤약볕 피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것이라 위안 삼지만 실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하는 숨은 의도를 스스로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장욱진은 뭐라 그래?"


"형이랑 다를 바 없어. 다만 속으로 쾌재를 부를지도 몰라."


"그놈은 여기저기 마구 들이대니까. 닥치는 대로 껄떡거리잖아?"


"알아. 어쩜 그게 매력일지도 몰라. 호감이 있다는 표시거든."


"알면서 결혼했어?"


"나도 모르겠어. 왜 그랬는지. 귀신에 홀린 것도 같고 연극하면서 내 삶이 더는 내려갈 수 없는 밑바닥에 닿았다고 여겼는지도 몰라. 이유야 만들면 얼마든지 있어. 그런데 가만 보면 그 어떤 것도 이유가 되지 못해. 편리한 합리화야."


"그렇다고 지금 그것 때문에 또 괴로워하는 거야?"


"괴로워하지 않아. 다만 지나온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막막할 뿐이야. 시도 쓰지 못했는데…, 시라도 남아 있다면 결혼을 후회하지 않을지도 몰라. 그저 좋은 경험으로 치부하겠지."


김선미는 마른세수를 했다. 길고 지루한 주례사와 축사, 왁자지껄한 축하 공연까지 끝나자 김선미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 3막 중 혼례의 합창 속에서 가볍고 들뜬 걸음으로 결혼 행진하던 행복한 모습이 떠올랐다.


살짝살짝 내딛는 걸음과 얼굴 가득 피어난 환한 미소를 우리에게 남기고, 침침하고 암울하고 객기와 오기가 마구 뒤섞여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득이는 문창반 무리에서 영영 떠나는 것이라고…, 컴컴한 예식장 구석에 몸을 숨기고 미처 이름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들에 휩싸여 무겁게 침묵했다. 군복은 더없이 무거웠다. 장욱진이나 김용덕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말들이 넘쳐나는 잔치와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꿰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겉돌며 우리는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세상은 우리완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가는 거야. 뒤포에 가자, 대충 허기 때우고. 누군가 말했고 우리는 마냥 흐뭇하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 속에서 도망치듯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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