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뭐 하고 온 거지. 전부 나보다 나이 많은 백인 직장인, 사업가 사이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이 작은 도시, 사우스햄튼에도 분명 사람들끼리 즐길 거리가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이벤트를 찾아보는 웹사이트를 통해 사우스햄튼 네트워킹 그룹을 찾았다. 보통 이벤트는 학교 학생회 홈페이지를 수시로 들어가 보며 다니곤 했는데, 외부는 처음이었다. 장소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 시내에 위치했고, 건물 내부는 모던하고 깔끔했다. 몇몇 남자들은 정장 차림도 입고 있어서 캐주얼하면서도 직장인들끼리 모인 분위기가 났다.
사실 지금 조금 떨린다고 이야기했더니, 자기도 그렇다며 한 가지 팁으로 이런 모임 있을 때 아주 일찍 오면 일찍 온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누구는 펍을 운영하는데 나처럼 펍에서 노래하는 뮤지션에 관심이 있었고 누구는 향수 회사를 하는데 각 계이름에 따른 향수를 만들고 있다며 시안을 보여줬다. 누구는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처럼 아티스트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고 메일 준다고 했다. 그 밖에 사진사, 마케팅, 인사팀, 부동산 등 겹치는 분야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인사와 명함을 주고받았다.
와인 잔 들고 돌아다니며 이 그룹, 저 그룹 대화하는 게 긴장되면서도 즐거웠다. 한국엔 이렇게 잔 들고 서서 돌아다니며 네트워킹 하는 모임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한국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무수히 많은 모임을 다녀봤지만 나이가 2030대, 특히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으로 한정되었고 테이블에 앉아 고정된 자리에서 대화했기에 처음에 도착해서 자리 선정에 많은 것이 달려있었다.
사실 내가 직장인도 사업가도 아닌데 학생이 이 모임에 참석할 자격이 됐었나 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학생은 나 혼자였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고 모임장으로부터 링크드인 그룹 초대도 받고 다음 모임에도 꼭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생각해 보면 거기서 나를 '대학원생'이라고 먼저 소개한 적이 없다. 세네 명씩 모여있는 그룹에 계속 돌아다니면서 "Hi, I'm Gayeon. I'm a musician."이라는 대사를 그 공간에 있던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했다. 그러고 나서 사우스햄튼에 온 지 4개월 됐으며 석사 과정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부연 설명했다. 그곳에서 내 정체성은 학생이 아니라 뮤지션이었다. 내가 만일 나 자신을 대학원생, 또는 작가, 또는 음악 선생님으로 소개했다면 사람들과 대화가 다르게 흘러나갔을 거다.
나는 노력형 E다. 초중고 내내 내향형이었고 뮤지션으로서 살기 위해 노력 끝에 점점 외향형으로 바뀌었다. 작년 장학생 파티에서 좋은 저녁을 보냈기에 조금 더 익숙했다. 그때도 이와 같이 술잔을 들고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었는데, 이번엔 학교 밖이니 그 심화 버전이었다.
어쩌면 외국에 있기 때문에 더 즐기는 것이 가능했다. 한국에서라면 '나만 직장인 아니라서 이상한 거 같아', '나만 동 떨어지게 혼자 뮤지션이래' 등 잡생각에 사로잡혔을 거다. 그런데 외국에 있으니 이미 나는 이 사람들과 생긴 것부터 다르고, 여기 사람들은 그런 다양성을 왠지 포용력 있게 받아줄 것 같아서 더 편안했다. 한국이라고 해서 남과 다름을 무조건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에 있을 때 느꼈던 그 불편함이 있다. 한국은 펍을 가든 어딜 가도 이렇게 다양한 나이대가 한자리에 모이지를 않는다. 한국도 나이, 직업, 장애 유무 등에 상관없이 한데 편안한 마음으로 어울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다음 모임은 한 달 뒤에 예정되어 있는데 벌써 티켓을 예약했다. 이번에 처음 온 사람들이 많았으니 다음번에도 아마 겹치는 사람보다 새로운 사람이 더 많을 거다. 벌써부터 다음 모임이 기대가 되는 것은 물론, 학교 밖 지역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