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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Jun 18. 2020

'당신 섹시해' 보다 더 설레는 말은?

감정을 예열시키는 말 한마디


 결혼 13년 차. 남편을 쏙 빼닮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낳고 네 가족이 함께 산다. 특별한 권태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뜨거움도 없다. 달궈진 모래사장을 걷다가 미지근하게 데워진 바닷물 속에 빠진 느낌이랄까. 이렇듯 미적지근 한 바다 위에서 크고 작은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것이 결혼인 것 같다.     

 

남편은 늘 바쁘고 나는 늘 육아에 허덕인다. 남편은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지만 뾰족한 묘책도 없다. 그저 혼자 힘으로 견뎌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육아는 전에 없던 고통이다. 누군가는 육아에 대한 기쁨과 찬사를 대단하게 늘여놓기도 했지만 내겐 좀처럼 쉽지 않은 영역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그럴 사람이 없다. 죄다 너도 힘들지만 나도 힘들어 식의 논리로 나의 희생을 당연시한다. 그렇게 십여 년 세월에 나는 길들여 있었다.      


얼마 전 티비에서 본 이효리가 그랬지. “니가 뭘 알아! 결혼생활은 사막이야!” 나는 맞아 맞아 하며 키킥 댔다. 그런데, 그 사막 같은 결혼생활에 최근 촉촉한 단비 같은 설렘이 있었으니 이게 무슨 영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그간 로맨스 드라마나 남자 연예인 때문에 설레 보긴 했으나 남편에게 설레다니. 친구들에게 농삼아 말해보니 노망이 난 거라나. 뭐라나.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 말이다. 며칠 전 아침. 부스스하게 일어나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할 때 일이었다.  남편이 ‘갔다 올게’라는 말 대신 그런다.      


“낮에 더우면 참지 말고 꼭 에어컨 틀고 있어”      


꼭, 이란 말에 악센트가 들어간 거로 봐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실 주부들은 다 알 것이다. 남편들은 에어컨 빵빵한 사무실에서 냉방병을 무서워한다지만 주부들은 집에서 열사병과 사투를 벌인다는 것을. 여유롭게 에어컨을 튼다는 건 이상하리만큼 힘들다는 것을. 비단 절약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주부 전통 같은 것이다. 특히 혼자 있을 때 에어컨을 트는 일은 거의 없다. 아이들이 제발 틀어달라고 사정사정해서야 겨우 틀어줄까 말까 한 것이 바로 희한한 에어컨의 세계라는 것이다. (참고로 절약과는 거리가 먼 타입입니다)      

7월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날씨가 덥다. 이른 더위에 진이 빠져 밥맛도 잃고 짜증도 늘던 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투정 삼아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부럽다... 나도, 출근하고 싶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인 남편 앞에서 할 말이 아닌 듯했지만 진정 그 순간은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그날, 예상대로 아이들의 징징과 더위의 콜라보로 열폭했다. 그 날 이후 남편은 중간중간 전화를 걸어 시답잖은 안부를 묻기도 하고 저녁거리를 포장해 오기도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봐주기도 했다.       


그리고 ‘에어컨 꼭 켜고 있어’라는 말을 남겼다.      


최근 예민했던 내 감정의 컨트롤러로 이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어찌나 내 안에 울림이 있던지... 말에 생명이 있다더니 남편의 그 한마디가 꼬물꼬물 살아서 내 심장에 설렘 버튼을 켜놓고 갔다. 남편을 출근시킨 뒤 혼자 소파에 앉아 피식하고 웃었다. ‘이 남자, 괜찮네’ 라며 괜히 설렜다. 이토록 사소하고 단순한 삶이다. 그래서 또 한 번 웃었다.  

     

오늘은 아이들 말고,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준비해야겠다. 에어컨은 여전히 못 틀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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