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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G Aug 11. 2020

거참! 전업맘도 맘 편히 회식 좀 합시다!

듬성한 눈썹을 아이 펜슬로 채워 넣고

코랄 빛 립스틱을 바른 후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마무리는 볼터치로 ‘톡톡’.


간만에 하는 화장이라 괜히 공을 들여본다. 눈치 빠른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묻는다.      


“엄마, 어디가?”

“응. 엄마 오늘 약속있어.”

“밖이 깜깜한데? 우린 어떻게 해?”

“아빠 일찍 오실거야”      


때마침 칼퇴한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빛의 속도로 남편과 바턴 터치.      


“여보, 애들 저녁 다 챙겨놨으니까 밥만 퍼서 줘."


애들 한테 바짓가랑이 붙잡힐까봐 신발 뒤축도 구겨 신은 채 집을 나섰다.      


눈누난나~ 오늘은 밤마실 가는 날.      


동네 엄마들과 상, 하반기에 한 번씩 밤마실을 간다. 몇 년 전인가 회식 때문에 매일 늦는 남편들에게 열폭한 계기로 '우리라고 못할쏘냐! 회식!' 그렇게 시작한 것이 정기모임으로 이어졌다.       


7시 30분, 동네 빵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한 친구가 늦는다. 하지만 아무도 재촉 전화를 하지 않는다. 헐레벌떡 뛰어온 친구가 “애들 밥 맥이고 오느라...” 하자 다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퇴근하는 직장인과 젊은이들 틈에 마흔 넘은 여자 넷이 나란히 걷고 있으니 왠지 부자연스럽다. 익숙함과 생경함 사이에서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 어깨를 쫙 폈다.      


도착한 곳은 동네 핫하다는 술집. 명성만큼 손님이 많다. 내가 밥하고 설거지할 동안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니 살짝 배알이 꼴렸다. 메뉴판에 적힌 가격대를 보고 다들 흠칫 놀란 눈치. 하지만 뭘 시켜도 상관없다고 쿨하게 말한다. 


그래서 쿨~하게. 생 맥 네 잔과 골뱅이 무침 하나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나이대의 여자 모임은 우리가 유일무이하다. 하긴 이 시간에 술 약속을 잡는 주부가 어디 흔할까? 술집 안에는 중년 남자들, 패기 넘치는 대학생, 동호회 모임, 커플들이 대부분이다.


드디어, 심장을 얼릴 만큼 시원한 맥주 등장! 그런데 다들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이유이즉 나와 한 친구 빼곤 술을 전혀 못마신다. 억지로 술 권하는 상사도 갑질하는 인간도 없는 전업맘의 회식자리... 기분좋게 안주발만 세운다 


그럼, 술도 안 마시고 흥도 없는 여자들이 술집에서 뭘 하냐고? 그러니까 건전한 우리는 남의 불건전을 구경한다. 그것이 또 은근 꿀잼! 테이블 가득 소주병이 세워진 남자들을 보면 집에 가라 쫌! 하며 열불을 내뿜고 어린 남녀가 쪽쪽 대는 걸 보며 결혼한 번 해봐야 정신 차린 다며 호호 거린다. 아마도 남들이 볼 땐 우리도 위기의 주부들 일 것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런 풍경도 어린아이처럼 재밌어 하는건 우리 모두 홀몸 외출이 정말 간만인 탓이다. 다들 집 감옥에 갇혀 바깥 세상에 대한 감을 잃어가던 중이었다.


이때 한 친구에게 ‘띠링’ 메시지가 온다.      


“이 시간에 누구?”

“아직 애가 안 잔대”

“밤 11신데?”

“엄마 오면 자겠다고 했대...”     


친구는 얼핏 불안함이 감도는 미소를 짓는다. 판을 깔아도 맘 편히 놀 수 없는 엄마들이여~ 난 또 그게 짠해서 벌컥 맥주를 들이킨다.


목적도 없고, 뒷담도 없고 술도 못 먹는 이 모임, 대체 뭣 때문에 만나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기껏 해봐야 말 안 듣는 애들 얘기, 티브이 드라마 얘기, 결국 얘기는 돌고 돌아 그땐 그랬지로 귀결된다. 왠지 조연으로 밀려난 배우들의 항변 같아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누군가 하품을 시작하자 너도 나도 전염된다. “몇 시지?” 하고 핸드폰을 꺼내 보니 자정에 가깝다. 4시간 동안 맥주네 잔과 안주 두 개, 이토록 순진한 아줌마 모임을 주인장이 좋아할 리 없다. 더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 이제 일어나자 라는 누군가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일어선다. 남편에게 "오늘 밤, 나 찾지 마!" 하며 도발하고 나왔는데, 갈 데도 없고 할 것도 없다. 왠지 억울하다.


학군 보다 母군이 최고인 동네다. 탈선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삐뚤어지고 싶은 내 욕망은 한 번 꿈틀대지도 못하고 착실하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얘들아 나 더 놀고 싶어...' 동조하는 친구가 없다. 내일 아침 수학 문제 풀어야지 하는 것처럼 내일 아침에 애들 밥 줘야지 한다.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맹꽁이가 울고, 달무리가 엷게 퍼져있다. 뒤늦게 올라온 취기 때문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가슴이 울컥한다.     


‘아~ 밤 냄새 얼마만이냐아~!' 소리를 꽥 지르자 알콜기 1도 없는 여자 셋이 동시에 답한다.


‘그러게’ ‘진짜 좋다’‘으음 밤공기~’ 다들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그때 나는 깨닫는다. 우리의 오늘은 고래의 숨구멍을 닮았구나...바다 위로 숨 쉬러 나오는 고래처럼 우리도 숨 한번 쉬어보겠다고 밤의 수면 위를 이렇게 걷고 있구나...


센치한 생각도 잠시, 또 한 친구에게 '띠링' 문자가 온다.      


“아~ 남편이 언제 오냐고... 간다. 가!"




다들 들숨을 한껏 마시고 다시 깊은 수면 아래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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