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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Jun 18. 2024

성숙함과 온전함 : 광신도 내성

내 마음속 감정들의 리더가 되다.

내가 제일 힘들었던 지점이다.


나에게는 이끄는 사람이 적을 때부터 광신도적으로 따르는 멤버가 있었다.


나를 조커에 비유하며, 자신을 할리퀸에 비유했다.


20살의 나는 능력은 있지만, 성숙하지 못했고, 아는 철학은 많지만 스스로의 철학도 없었다.

개인의 역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쌓아온 역사는 없었다. 주변에 조언을 요청할만한 인물도 없었다.



모두 서로 인간일 뿐이야

나는 나를 점점 신처럼 따르는 광신도를 이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무시할 수 없었다. 광신도는 광신도를 알아본다. 그들은 서로 결속한다.


그들은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내가 신이어야 한다. 나는 대부분의 자기 자신을 신으로 떠드는 사이비 종교의 수장? 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변의 계속된 떠받듬에 "어? 그런가?" 싶은 것이다. 또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인간일 뿐이라는 중압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니까.


사이비 종교는 무언가 뱉은 말에, 행동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굉장히 쉽다. 그러니까 눈깔 돌아간 놈들의 떠받듬에 심취해서 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체나, 게임을 비롯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에 말과 행동에는 무게가 생긴다. 왕관의 무게다.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가 달라지는 무게. 이렇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리더는 매일매일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직전의 글, "철학 : 고통, 지지대, 회복탄력성"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 비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기후제 같은 축복이나 내리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피해자들의 돈이나 빨아먹고 착취하는 질 나쁜 사이비 종교의 수장과 책임져야 할 결과가 나오는 조직의 리더와 같은 급으로,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 안 된다.


그저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사람의 수준과 무게감을 비슷하게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성숙하지도 온전하지도 못한 광신도

사이비든 아니든 종교적 리더는 무언가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수행이 부족하다, 기도가 부족하다, 믿음이 부족하다. 언제든지 책임을 신도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 리더, 경영 리더 등 목표가 분명하고 책임져야 할게 분명한 조직에서는 도무지 떠넘기기가 찝찝하다. 이 책의 마지막 목차에 "리더 육성 : 은퇴 후 지속 가능한 조직을 위해서" 부분에서 설명하겠지만, 도저히, 도무지 리더의 자리에서 책임을 지고 떠나갈 수 있는 후임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리 정직한 리더라고 해도 책임을 다른 임원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다. 조직의 지속 가능성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 글 초반에서도 말했지만, 광신도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광신도가 된다.


그런데 리더가 성숙하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고, 철학이 없다면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들의 눈초리와 기대감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나도 인간일 뿐인데, 실수, 실패, 고통, 괴로움, 기대고 비빌 언덕이 필요한데. 그들 앞에서는 온전한 신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점점 생겼다.


왜 그런 강박이 생겼나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시키지도 않은 그 광적인 믿음이 실망과 좌절로 바뀔 때, 나를 향하게 될 공격성을 나는 견딜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상상이었지만.


그래서 점점 스스로 괜히 나약한 말을 하고, 태도를 취했다. 실패나 실수로 인한 실망과 좌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나약함을 일부로 내비치며 실망감을 유도했다.


그런 작전은 성공했고, 나는 나약한 나를 일부러 연기하는 것에도 지쳐버려, 그냥 떠나갔다.


 인간은 여리면서에 이기적이다. 나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나쁜? 모든 면까지 감당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성숙하고, 온전하고, 철학을 품은 리더 => 내 감정들의 리더가 되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는 성숙해졌고, 온전해졌다. 철학을 품었다. 우울증과 불안은 약이나 명상이 아니라. 굳은 마음, 철학으로 극복했다. 완치는 없다. 우울과 불안은 인간적인 것이고, 뇌의 작용이니까.


다만 그런 우울, 불안, 고통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이제는 외면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 곁에 있는 우울과 불안, 고통 같은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그냥 내버려 뒀다면, 이제는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는 셈이다.


나의 논리로, 목표, 꿈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말이 안 통하면 톡톡히 억압할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설득이 된다.


이렇게 되니까. 무엇에도 영향받지 않고, 휘둘리지 않게 된다. 결국 내 마음속 감정들과 대화하고, 감정들의 리더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까. 외부의 자극에도 내 허락 없이 반응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그냥 막연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들 각자가 내 비전에 동화된 것이다. 나를 리더로 따르는 것이 느껴진다.


나의 명령으로 화를 낸다. 마치 연기를 하듯이 하지만 진짜로 지금 해당 감정이 필요한 순간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스스로의 리더가 된 자에게 광신도란

광신도는 결국 자기 자신의 약함에 어쩔 줄을 몰라서, 신의 현현이 필요한 불쌍한 자다.


나는 나의 감정을 비롯해 스스로의 리더가 된 자로서, 이제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하늘 아래 당당하게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천명한다.


이 책의 초반에서 말했듯, 비전을 공유하는 자에게는 리더, 비전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조직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는 보스, 자기 자신의 약함에 어쩔 줄 몰라서 신의 현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기꺼이 신이 되겠다. 비전이 공유가 되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뿐, 다만 이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이 제각기 다를 것인데, 나는 나를 인간으로 봐달라고 애원할 생각이 이제는 없다. 나를 신으로 보든, 개새끼로 보든 나는 나의 길을 간다. 20살의 나는 이미 죽고 없다. 다만 스스로가 제정신을 유지해야겠지.


시키지도 않은 믿음이 좌절됬다고 적으로 변한다면, 괴물에 가까운 인간이 적이 될때 어떻게 될지 보여줄 수밖에 없지. 그러면 역시 자기가 맞았다며 처맞으면서도 기뻐할지 모른다. 광신도란 그런 불쌍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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