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Consiliator 기획하는 사람, 도전자
이 책의 목표는 독자 여러분들을 기획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기획자이면서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도전자'로서도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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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도전자'가 되어야 반골 기질, 혁명가 기질, 스스로의 생각을 현 체제,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고 증명하려는 호승심이 있는 사람이 이기기 위해서 분석하고, 이기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이기기 위해서 기획하고, 이기기 위해서 실행하고, 이기기 위해서 진행하고, 이기기 위해서 진행한다.
전부 자기가 이겨버릴 마음이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순서대로 진행하게 된다. 나는 이 '호승심, 도전 정신을 어떻게 하면 만들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해봤는데 금방 답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가스라이팅 해야 되는데 왜냐하면 어떤 상태에든 사람은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태든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호승심과 도전 정신을 부추기기 위해서 "너는 패배자고, 도전해야 하는데 왜 루저처럼 만족하고 살아가냐?"라는 식으로 만족은 패배자가 하는 거고, 너는 지금 완벽하게 길들여진 노예라고 지속적으로 말해야 한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는 불안과 불편을 느끼게 하며, 실제적으로 피해를 입히는 방법이다.
어쨌든 도전 정신, 자신의 세계를 증명하고 확장시킬 생각이 있게 돼야 homo consiliator로서 모든 게 시작된다.
gamble, 도박 : 도전자 인생의 은유
도전자 인생에는 어떤 형태로든 돈을 굴리는 방식 중에 증명 방식, 즉 bet이 등장한다. 자기 돈을 직접 걸어버리는 거다. pay와 bet의 차이점을 설명해 보자면
pay는 돈을 상호 합의적인 가치로 교환하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 관점으로 가장 좋은 pay는 자산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고파는 행위는 거래에서 내가 뭘 했는지를 말할 뿐이지, 본질적으로 거래는 상호 합의적인 가치로 교환하는 행위를 말한다. 때문에 판매자가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 이상 가격은 수요 공급 곡선으로 정해진다.
bet은 상호 합의적인 가치로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bet은 내기, 증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문에 돈이나 금화도 bet 하기 전에는 승부에 나선 자에게 소중한 것을 걸고 했다. 물론 서로 상호 합의 가능한 소중한 것을 말이다. 누군가 아내의 목숨을 걸었는데, 상대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면 내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와 동등한 것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노예가 자신의 아내를 건 것과 그의 주인이며 왕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면 동등한 가치, 그 왕의 역량에 따라서 왕이 손해인 bet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며 자본주의 세상을 보며 이해할 때, 참 돈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고, 돈이 가장 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되었든 그 대가가 돈일뿐이라면 그건 진짜 싼 거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돈으로 끝날 수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 감사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거래와 내기"에 참여하는 모두가 상호 합의 할 수 있는 가치를 만들어냈고, 믿게 했다. 도전자는 더욱 안전하게 '돈과 명예, 권력'을 좇으면서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도박과 인생의 닮은 점
나는 도박과 인생이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도전자'가 아닌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도박과 인생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도전자도 아니고 뭣도 아닌 울타리 속의 가축으로 살아간다면 인생은 참 부질없을 것 같다.
도전자로서 살아왔던 인생을 과거에 정리해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심장이 뛴다, 선택해야겠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간다. 이것만이 삶의 이유라면 인간은 가축과 다름없다.
인간이 가축과 다른 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정하는 자유의지, 자유의사.
하지만 삶의 방법마저 시스템에 맡긴 채 살아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축이다.
가축을 가두는 울타리는 시스템 관리자가 만든다. 아무리 좋은 말로 꾸며봤자.
농장주인은 가축과 친구가 될 마음이 없다.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져 버리는 거야. 모두가 똑같다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다른 종류의 사람이 섞여 있어서 표면으로 떠올라버리는 거야. 자신의 비참함이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쫓아내려고들 하는 것이지. 그게 불가능하단 걸 알게 되면 비웃고 깔보고 선을 그어 자신들과 떼어놓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을 외면하고 살게 된다.
인생은 카드게임과 같다. 손에 들어오는 패는 '결정론'을 의미하며, 어떤 카드를 낼지는 자신의 판단에 따른다. 올바른 판단을 하는 자가 남보다 길고 충실한 인생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판단력이 떨어지는 자는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원망하며, 실의에 빠진 채 죽어가겠지. 자신의 판단력 부족은 원망하지도 않고. 기억력을 키우려는 자는 있어도 판단력을 키우려는 자는 없다. 하물며 '인생이라는 도박'은 판단력을 좀먹는 욕망의 쇠사슬. 끝없이 욕망에서 욕망으로 이어지는 나선. 인간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갈증에 몸부림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갈등을 참지 못하고, 거짓말을 한다.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내리려고 하는 건 중요해 하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야 판단이 올바른가 잘못됐는가 같은 건 그때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중요한 건 판단한 뒤 결정한 판단을 올바르게 할 노력. 설령 결정한 판단이 나쁜 결과를 초래해도 거기에서 무언가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발버둥칠지가 중요한 거야. 판단만으로 일이 이뤄진다면 인생은 도박이 돼버리겠지. 자신의 판단을 믿어라. 그리고 그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앞으로 전진해.
같은 판에 계속 머물러 있는 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항상 높은 곳에 도전하는 자에게 인생을 플레이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위기와 맞닥뜨리는 영원한 수라장이다.
어렵다. 하지만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답에 내가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 지다. 연구해 보자.
2021.04.26. 월
2017~2021까지를 정리하며
김동현
이 글을 쓰고 벌써 3년 하고도 6개월이 더 흘렀다. 나는 평생을 도전자로 살아왔다. 위의 글에는 도전자가 아닌 인생들에 대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나는 그런 삶을 살바에 죽겠노라 다짐한 인간이다. 타인의 이해와 인정, 관심을 원하지 않는다. 허락받지 않는 인간으로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소수고 도전자가 아닌 삶이 대다수였다. 그러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도전하는 사람을 깔보고 깎아내리려는 사람들. 내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은 전부 자기 인생을 함부로 방치하는 불상한 사람들이다.
bet은 pay의 속성을 갖는다.
bet은 실패한다는 점에서 pay의 속성을 갖는다. 몫숨값이나, 수업료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하지만 성공에서 bet은 자신만의 속성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피터 린치가 말했지만 사실 누구나 알 수 있는 건데, 선물이나 레버리지가 아니라면 실패의 경우 -100%로 계좌가 0원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선이 정해져 있지만, 성공의 경우 그 상한은 정해져 있지 않다.
선물이나 레버리지로 파생 상품 계약을 한다면 하한은 그 계약 배율 범위만큼 내려가 선이 정해지지만(포지션 청산), 상한은 무제한이다.
정리하자면, 계약의 경우에 따라 손해의 범위가 달라지겠지만 손해는 선이 정해져 있고, 상한은 무제한이다. 이것이 bet의 속성이다.
지금 위에서 말한 bet은 주식 투자, 코인 투자에 대한 관점으로 말했기 때문에 bet의 성공에 대한 상한이 없지만 도박의 경우는 또 다르다.
주식이나 코인의 경우는 거래하는 수단이 되는 주식과 코인의 가치가 변동하기 때문에 상한이 없게 된다. 도박은 내기를 하기 위해 중간에 거래할 상품을 끼지 않는다. 때문에 성공의 상한이 정해져 있다. 다만 bet 그 자체로는 상한이 없다. No-Limit.
승부의 승패를 알기 전까지 승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모든 걸 bet 할 수 있다. 도박장이 책임지고 양쪽의 대가를 수거하겠다고 한다면, 도박장에 그런 신용이 있다면 도박장이 허용하는 한 아마 목숨까지도 걸 수 있을 것이다.
도전자, 이기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기획하고 추진하다 보면 bet을 하게 된다. 분명히 증명 방식에 포함되며, 일종의 전쟁 행위다. 때문에 이득을 얻기 위한 bet이 아니라 경쟁자를 죽이기 위한 bet을 시작해야 할 수 있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다행히 요즘 세상에서의 bet은 그냥 '돈'으로할 뿐이다. 값싼 돈으로 말이다.
심장이 뛴다, 선택해야겠다
나는 인생이 "운명과 선택의 이중 나선"이라는 점을 어렸을 때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결과와 책임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
bet은 pay의 속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기획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pay를 통한 거래에 미래 계획을 위한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bet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내가 물병을 팔기 위해서 1000개의 물병을 개당 1천 원에 100만 원으로 구매했다고 해보자. 분명히 이 거래는 pay일 뿐이지만, 이 거래의 pay는 내 bet을 위한 계획의 일부분이다. 왜? 나는 이 물병 1000개를 개당 5천 원 팔아치워. 총 500만 원으로 만들 생각이기 때문이다. pay였다면 물병을 쓰겠지만, 나는 bet을 한 거다. 때문에 이 기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나는 손해 본 만큼 pay를 해버린 거다. 이런 이유로 bet은 pay의 속성을 가진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스스로 게임의 기획하는 데 있어서, 상품이나 대출을 받을 경우 그만큼 하한선이 -100%보다 아래로 내려간다. 또 상품이나 대출의 lisk가 "지금 당신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 lisk 관리의 시작이라는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많이 공부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익혀서, 운명과 선택의 이중 나선 위에서 살아남는 선택, 살아남는 노력, 결과를 살아남기 좋게 이용해 보려는 선택과 노력, 또 자기의 영향력을 스스로 수습하려는 책임감을 키워나가라. 그것이 도전자, 기획자, 지휘자로서의 삶이다.
기준의 필요성 : 어렵다. 어려운 삶이다.
힘들고 괴롭기도 정말 끝이 없겠지만, 머리 쓰기도 어려운 삶이다. 싸우고 증명하려는 삶이 쉬울 수는 없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런 삶을 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마음만 있고 철학이 없으면 도중에 포기하게 된다. 이런 경우 그래도 포기가 안되면 결국 철학을 갖추고 돌아오지만 애초에 호승심이나 반골 기질이 없으면 힘들다.
기준이 필요하다. 개인이 이 세상 모든 소음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대나무 같은 기준이 갈대 같은 유연함으로 세워져야 한다.
분절된 기준이 아니라. 스펙트럼으로서의 영역을 분절될 영역 사이에 넣어줘야 한다. 유연하고 부드럽게! 그래야 지속 가능하며 지속 가능성을 담보로 오랜 시간 원하는 곳에 머물며 강해질 수 있다.
이해받으려 하지 말자.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걸 이해한다면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고 축소할 뿐인 그런 삶으로는 살아가는 걸 견디지 못한다. 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건 그들의 인생관에서는 그런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목표를 이뤄내겠다는 일념뿐이지.
타인의 이해와 허락과 관심과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고, 절제하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