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생인 나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근대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며 성장했다. 초등학교 무렵에는 건전가요라 하여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가 라디오나 TV에 단골메뉴로 나오고, 새마을 운동이 전국을 휩쓸던 시절이었다. 어린 나이라 의미는 잘 몰랐으나 어른들은 '한(恨)'이라고 했다.
오천 년을 배를 주리며 살아온 민족의 한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자고 했다. 굳게 닫힌 나라의 문을 열어 수출을 하고, 선진기술을 익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온 나라가 부르짖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금의 내 나이가 되니,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될 정도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내 주변을 봐도 우습게 해외여행들을 다녀오고, 가볍게 차(車)를 바꾸곤 하였다. 다들 잘 사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관계는 가벼워졌다. 모든 관계는 돈이 우선이었다.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이해(利害)가 우선순위였다. 이(利)씨와 해(害)씨로 나누면 그뿐, 고민할 게 없었다.
가족관계 또한 그렇게 변질되어 갔다. 한동안 추석이나 설이 되면, 단골메뉴로 유산이나 돈문제로 형제, 남매들 간에 형사 사건으로 변한 가족문제를 혀를 차며 봐야 했다. 더 이상 가족 간의 따스했던 기억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너무 축지법을 썼다. 한(恨)의 정서는 무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서구 선진국들이 산업화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룬 것들을, 단 몇십 년 만에 이루어 냈다.
속도는 지상과제였다. 우리들 DNA속에 각인될 정도로 속도는 모든 것의 달란트였다. 무지한 속도로 챙길 것들을 빼먹었다. 새로운 윤리나 교육, 문화 그리고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 등이 내동댕이 쳐졌다. 경제와 문화는 동반자적 관계로 움직여야 한다.지금은 텅........, 빈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할시간대다.
개인이 한 무리에 속하면 다른 무리의 속성은 모른 채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하물며 한 국가의 무리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정체를 잃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인구소멸에 또 한 번의 가속도가 붙었다. 청년과 노인자살 비율이 세계 1위인 사회, 우리 사회평가 지표는 지옥의 묵시록을 보는 듯하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봐야 한다. 그래야 고칠 수 있을 것이다.한 때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하는 사회가 정상일리 없다.
한국에서 살아보고 이방인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죽음의 스펙터클》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네 가지로 지목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이다.
'끝없는 경쟁'은 우리가 모두 인지하는 바 와같다. 한창 어린 나이의 초등학생조차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교육을 시킨다.
"의사가 꿈이에요!"
"아직 모르는데..... 엄마가 다니래요!"
'초등의대관' 간판의 학원 앞, 방송기자는 앳된 초등학생을 붙잡고 물어본다.
아직 자기 생각이 여물지 못한, 아이까지도 경쟁의 대열에 세운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들은 피곤하다. 잠시도 쉴틈이 없다. '숨'을 쉬게 해줘야 한다. 부모는 방향제시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에 그쳐야 한다. 오히려 학습에 조루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 청년자살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압도적인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내몰린 아이들은 그것만을 지상과제로 알고 살아간다. 그러다 자의식이 성장해 회의를 품는다. 기대치가 너무 멀어져 자신을 추스를 수 없을 때 마지막을 생각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는 그렇게 꽃잎처럼 떨어진다. 무언가에 기댈 곳이 없었다. 진학실패와 실직은 낙인을 의미했다.
언제부턴가 거리의 카페 풍속이 바뀌었다. 인건비 상승에 따른 자본의 논리는 사람에서 키오스크가 주문을 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설명도 없었다. 모든 것은 돈의 명령에 따른다.
퇴근길, 주민복지센터 건물에 현수막 내용이 우습다.
'스마트폰, 키오스크 학습과정 안내'
따라가지 못하는 노인들을 위한 학습과정으로 키오스크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상은 극도로 사막화되어 간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사치다. 눈치껏 요령 있게 살아가야 한다.
노인자살 또한 베이비부머세대 은퇴 이후로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불공정한 노동시장에서 노인복지는 표류할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의 일을 봉건적 가치의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 사회 인식을 바꿔야 한다. 아직도 사농공상의 순서를 매기고 서열화된 사회의 단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젊은이는 절망하고, 노인들은 회의(懷疑)에 빠졌다. 그동안에 믿고 의지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한다.
청년들이 믿고 의지 할 마지막 보루는 국가다.
그러나 '김용균법'으로 일컬어지는 2018년 12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 사건에서 허무의 극치를 볼 수 있다. 구조적 권력관계에 기인한 위험한 작업을 외주화 시켜 경영계 등, 보수진영의 반발로 인해 기업의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진영논리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김용균의 어머니는 말했다. "나라가 왜 이렇게 굴러가나. 나는 정말 몰랐다. 우린 지금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작년의 이태원이 그랬고, 세월호도 마찬가지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힘' 뿐이다.
그 자본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가는 시대를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몇십 년의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시대정의를 허무주의 시대라고 할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과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통으로 보는 시각이다.
코로나19로 인한 2020년 벽두부터 작년 초까지는 자본의 광기가 번득이던 시절이었다.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재난이 덮치자, 제로금리 상태가 일상화되었다.
전염병의 공포는 엉뚱하게 투자열풍으로 번졌다. 아파트가격이 치솟고, 주가지수는 상을 쳤다. 거기에 코인광풍까지 불어 뭐든 안 하면 뒤쳐진다는 조급증이 온사회를 뒤흔들었다.
다들 아드레날린에 취한 듯, 투자처를 찾아 불나방처럼 덤벼들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의 젊은 층들도, 주식시황을 보느라 손에서 폰을 놓지 못하고 웅성거리기 일쑤였다.
대출을 우습게 일으키고, 은행도 거침없이 내줬다. 점심때면 구석에 모여 탄식을 내뱉고는 하였다. 사십 초반의 직원 하나는 나에게 적금과 대출금을 합해 나스닥에 투자를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적금도 가능한 깨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밈주식에 투자하고 말았다. 과다분비된 아드레날린 탓인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광풍은 식어버렸다. 오르는데 이유가 없듯이 떨어지는 것도 날개가 없었다. 다들 혼이 나간 듯하다. 쓰라린 기억을 안고 현실을 또 붙잡아야 했을 것이다.
허무는 공허한 구멍을 냈다. 그러다 현실을 냉소하기 시작한다. 주변에 냉소주의자가 늘어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모두를 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상실의 허무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어릴 적 소풍에 들떠 잠을 못 자던 기대감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나이가 돼보니 여정이 참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막상 기대를 하고 만난 사람이나, 소망하던 시험에 붙었을 때 별로 충만한 기분은 없었다. 또 다른 시작의 고충이 더해질 뿐이었다.
어느 작가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글 쓰는 과정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했다. 글쓰기 성장을 바라는 나에게는 참으로 좋은 말씀이다. 결과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쓰는 과정과 생각의 여정이 비록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문우(文友)분들과 교우하며 쓸 수 있다는 과정이 고마울 뿐이다. 그래서 또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