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힐리즘이 전 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성장정체기를 맞은 우리 사회에 퍼져있다. 그러한 니힐리스트들이 새로운 세대들 중에 상당수 있는 것 같다. 취업, 결혼,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문화가 그들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흔히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은 정치라는 말들을 한다. 사실 이 영역은 말하고 싶지 않다.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더라도 시빗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닌, 각자의 믿고 싶은 해석에 따른 괴변이 난무하는 세상 아니던가.우리 사회의 구성원은 선택을 했고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의 싸움은 이미 의미가 없다. 우리 사회는 이미 '줄리안. B. 로터'의 말처럼 각자의 해석만 난무하는 정글이 되어버렸다. 정치 관련 뉴스만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습성이 생겼다. 이미 뉴스로도 제 몫을 못하는 정치라는 영역은 외면할수록 모두의 실생활을 더욱 옥죄어 온다. 그러니 외면하기도 힘들다.
나도 좀 젊다면 분명 니힐리스트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 무엇도 상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가 성장의 정체기라고 하지만 활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젊은 층이 등 돌린 사회에 고령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만 넘실대고 있다. 누가 이들을 부양해 줄 것인가.
젊은이들 말고 고령자를 돌봐줄 계층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하지만 젊은 층들은 노동현장을 외면하고 있다. 공정성이 상실된 기울어진 링 위에서의 열정을 기대하기란 여전히 힘들다. 자본사회의 과도기를 지나는 맥없는 사회분위기도 한몫을 한다. 그들의 부모들이 어떤 식으로 도태된 지를 알기 때문이다. IMF를 거치면서 몇 가지 여정은 사회의 방향타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불씨를 살려 노동의욕을 되살려야 한다.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임원승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원이 돼봐야 실적을 닦달할 것이고, 파리목숨처럼 하루아침에 잘린다는 의식이 팽배하다고 한다. 하긴 임원은 직원이 아니라 경영진으로 분류하니 그럴 만도 하다. 내가 근무하는 공무원사회도 주무관으로 남고자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굳이 책임을 지는 승진은 피곤할 뿐 득 될 게 없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도전과 응전 그리고 패기가 사라진 사회의 방증이 아닌가?
내가 살아온 이사회는 더 이상의 발전은 힘들 것이다. 현재 상태를 과연 유지할 것인지도 불투명하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는 분명히 조금씩 퇴조할 것이다. 뭔가 혁신적인 기풍이 돌지 않는 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인 것이다.
청년층들이 좌절하는 상황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다. 민생입법은 허울뿐 국회는 행정권과의 싸움에 몰두할 뿐이다. 정당정치는 판이 그렇게 돌아가게 되어있다. 우리와 같은 민주주의는 치명적 약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히스토리가 별다를 게 없는 우리의 누더기 권력계층의 공고화는 어릿광대의 어설픈 공연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은 이것을 바로 잡아 줄 언로(言路)가 없다는 것이다. 자본에 종속된 언론은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다. 댓글 조작사건이 한동안 시끄럽게 사회를 뒤흔들었다. 왜 댓글에 주목을 할까? 이미 언론이 주도권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이신문을 신뢰하지 않는다. 구글의 플랫폼이 전 세계의 언로를 대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믿고 의지할 사회 시스템의 부재는 니힐리스트들을 양산한다. 니힐리즘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기존의 문화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 계기로 전환될 수 있다. 살아가는 의미에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낡은 것을 치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로 비상도 한다. 부디 우리 사회의 허무주의자들인 니힐리스트들이 그렇게 부활하길 바란다.
혼자만의 칩거를 통한 이방인으로 태동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미래는 결국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