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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은 Sep 28. 2021

우리가 사랑한 책과 사물 - 책거리

향그러운 옛 그림과 한가로움

<<책가도>> 8폭 병풍, 조선, 국립민속박물관


초등고학년 무렵 방과 후에 집에 돌아오면, 늘 엄마는 안 계셨다. 내가 아주 어려서부터 엄마는 밖에서 일해야 했다. 엄마 없는 집에서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 신발장 나무면에 분필로 그림을 그리며, 선생님 놀이를 하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다. 학년이 제법 올라가 초등 고학년이 되자, 집에서 무료하게 있는 것이 놀이로 대체가 되지 않았다. 베란다에 나가 이것저것 뒤지다가 책들을 발견했다. 한국 근현대 단편집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당시 중고생 필독서로 선정될 만한 단편들이 묶인 책이었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오래된 것이어서 새로로 글씨가 쓰여 있어 무척 읽기가 불편했다. 무슨 고집인지 끝까지 읽어야 된다는 오기에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느라 무진장 애를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접했던 것들은 김유정, 현진건, 이상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들의 단편이었다. 그 무렵이었는데. 중학생인 언니가 독후감 숙제가 하기 싫어서 근현대 단편을 읽게 하고선 자신의 숙제를 나에게 대신시켰다. 그때 읽었던 작품 중에 유독 ‘오발탄’이란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전후에 상흔을 간직한 사람들의 피폐해진 영혼들이 비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방과 후에 학원도 다니지 않던 내가 유일한 낙으로 삼았던 근현대 단편 읽기는 짐 정리를 하면서 엄마가 그 책들을 다 버리는 바람에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어쨌든, 책을 가까이하게 된 계기가 책장에 무심히 꽂힌 책들 덕분이니, 집에 어떤 책이 있는지는 매우 중요한 일임에 분명하다.

 작가 미상, <<책거리>> 4폭 병풍, 19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142*228cm, 국립 고궁박물관


 코로나로 인해 집의 중요성이 커짐과 동시에 더욱 중요해진 것이 인테리어다. 이사 가는 사람들은 거의 올수리를 해서 집에 들어갈 만큼 인테리어는 현대인에게 굉장히 중요한 생활과 산업이 되었다. 각자 인테리어에 신경을 쓰고 포인트를 주는 것이 다르겠지만, 거실 공간이야 말로 타인과 내가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다. 거실 공간을 TV 대신 서재처럼 꾸미는 것도 한때 유행이 될 만큼 책과 우리의 삶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러한 책에 대한 애착심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앞서 조선 후기 문인들은 고동 기물과 책을 함께 그린 책거리 그림으로 사랑채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역대 왕 들 중 가장 책을 사랑한 이가 있다. 바로 정조이다. 정조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읽었다고 하며.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왕이기도 하다. 정조가 화제로 책가를 낙점하여 시험에 내었는데, 신한평과 이종현이 책거리를 그리지 않아 파면당한 일도 있다. 그만큼 정조는 책을 읽는 것뿐 아니라 책의 그림까지도 사랑할 만큼 책을 애호하는 사람이었다.


책거리에는 여러 가지 사물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중국에서 온 고동 기물들이다. 미술사학자 이자 전시기획자 정병모는 이렇게 중국의 고동 기물이 많이 그려지고 수집된 것이 단지 사치풍조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때 당시 세계화에 대한 열망이 이렇게 많은 수입품들은 모으고 자랑하고 그리게 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민화에서 책거리는 우선 크기가 대폭 축소된다. 그렇게 된 이유가 가옥이 협소하니, 민간에서 그려진 책거리는 궁중에서 그려진 책가도와는 크기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옥이 협소하면서 발달한 사물들을 열거하자면, 병풍, 두루마리, 밥상, 밥상보, 이불, 보자기 등이다. 모두 협소한 공간에서 접히고 펼쳐지는 사물들인 것이다. 민화의 책거리 병풍 역시 작은 공간 속에서 책거리들의 조합을 집중적으로 모아서 그리는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 글은 매체에 따라 성격이 변하고, 사물들은 공간에 따라 그 모양과 크기를 달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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