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샤워실 칸막이 되기

선임이 후임의 샤워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

by 사육일칠

무더운 날씨에 훈련으로 땀에 흠뻑 젖은 군대의 여름날. 찝찝함을 없애고자 샤워실에 뛰어 들어갔다. 이게 웬 일. 아무도 없었다. 보통 이 시간대에는 적어도 2명은 있기 마련인데. 혼자 샤워할 생각에 신이 나서 옷을 다 풀어헤치고 얼른 물을 틀었다. 4개의 샤워기를 모두 틀고 3분 정도 기다리니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아무리 더워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습관은 군대에서도 여전하다. 손에 물을 담아 얼굴을 적시고, 적신 얼굴에 손으로 폼 클렌징을 펴 바른 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을 정면으로 맞으며 거품을 씻어내는 그 순간.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아니겠지. 기분 좋게 샤워하고 있는데 누가 눈치 없이 들어오겠어?

...라고 하기에는 이 샤워실은 4인 공용이다. 누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4인 공용 샤워실에는 칸막이가 없기 때문이다.


칸막이가 없기에, 알몸을 씻는 모습이 남에게 훤히 보인다.

칸막이가 없기에, 남의 몸에 맞고 튄 물을 내 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는 정말 샤워실에 들어오는 소리였고, 칸막이가 없기에 남과 씻을 때 생기는 위 2가지 단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혼자 샤워하는 자유로운 기분은 달아나 버렸다.


체념하고, 이제 머리를 감을 차례다. 손에 샴푸를 두 번 짜고 머리카락에 비비며 거품을 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굵고 차가운 물줄기. 내 샤워기에서 나온 건 아니다. 뒤를 돌아봤다. 후임이 있었다. 후임은 자신의 샤워기에서 나온 물줄기를 둥근 등으로 맞고 있었기에, 그 물줄기가 내 몸까지 닿은 것이었다. 후임이 만들어 낸 물줄기로 내 머리에 있는 샴푸 거품을 씻어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할 정도였다.


어쨌든 저 물줄기를 계속 맞을 순 없다. 가끔씩 물이 튀는 건 괜찮지만, 아예 물줄기를 쏘아대는 건 나의 샤워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니까. 그래서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잠시 다물어 보았다. 이 후임은 정말 나의 샤워 권리를 침해하려는 걸까 생각하면서.


후임의 잘못이 아니었다. 4인 공용이면서 칸막이도 없는 이 샤워실의 잘못이었다. 나의 샤워 권리가 중요하면 후임의 샤워 권리도 중요하다. 지친 몸을 달래고자 샤워기에서 나온 물을 오랜 시간 동안 등에 쏘일 수 있는 권리 말이다. 그 권리가 샤워실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보장되려면 칸막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칸막이가 없었고, 나는 후임의 등에 튄 물줄기를 차갑게 맞았다. 그렇다고 후임에게 "물 튀니까 조심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내 샤워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은 칸막이 없는 샤워실임을 알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샤워실의 칸막이 역할을 하기로 했다. 세찬 물줄기를 쏘아대는 후임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음으로써, 후임의 샤워 권리를 지켜 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후임을 사회에서 만나 초면인 사람처럼 대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후임을 아랫사람으로 보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후임의 최소한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칸막이 역할을 자처하니 그 바람을 이룬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많아질 후임들과 그 바람을 이뤄나가며 지낼 수 있을까. 그렇게 보내는 군생활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길고 긴 고뇌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을 차례다. 옷을 갈아입는 곳이 샤워실 바로 옆에 따로 있는데, 그곳에는 몸을 빨리 말리기 위해 선풍기가 있다. 강풍으로 몸을 말리고 있는데, 후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는지 물소리가 끊겼다. 나는 선풍기를 꺼 버렸다. 후임은 선풍기 바람이 세더라도 선임인 내가 있으니 바람 세기를 조절하지 못할 테니까. 후임이 필요하다면 알아서 선풍기를 켜겠지, 라는 생각으로.


샤워를 끝내고 나온 후임은 선풍기를 다시 켰다. 그러고는 바람이 자신에게만 가도록 방향을 조절했다. 바람 세기는 약풍이었다. 내가 처음에 틀었던 강풍이 아니라, 약풍.


어쩐지 그때만큼은 몸에 바람을 쐬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날 나는 군대에서 가장 개운한 샤워를 했다.


샤워 권리: 자신이 원하는 만큼 물을 맞으며 몸을 개운하게 씻고 하루에 들었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권리.

라고 내가 멋대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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