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과 장녀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다 비슷할까?
마냥 이뻐하기만 하면서 키우는 동생과 다르게, 큰 아이에겐 무언가 기대를 하고,
'나도 한 번 잘 키워 보자'라는 마음으로 잘한다는 학원 찾아다니고,
넌 좀 잘해줘야겠어!라는 압박을 알게 모르게 행사한다.
아이의 받아쓰기 점수가 내 자존심이 되는 놀라운 정신상태를 갖게 되며,
초등학교 시험. 그 뭣이라고 시험 치는 날은 내가 집에서 안절부절못하지 못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장남은 그냥 잘했으면 좋겠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못하는 것이 용납이 안 되는 이상한 사랑.
시간이 흘러, 아이가 크고 나니,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을 갖고 아이를 바라봐야 하는 우(愚)를 범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이에게 늘 했던 말은
'엄마는 너 믿어. 안 아프고 안 다치면 돼!'였다.
그래도 마음 깊은 속, 넌 좀 잘해주면 좋겠어!라는 나의 욕망은 아이에게 은연중에 표현되었을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큰 아들은 공부를 곧잘 했다.
중학교 성적이 상위 15% 안에는 들어야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꽤 좋은 성적으로 입학을 했다.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이 나고 내신 평점이 나오던 날은
내신 1.7로 상위권 성적을 받아서 나는 무척이나 신이 났었다.
"아들. 너무 잘했어!. 조금씩 성적을 더 올려서 학종으로 서울대 가면 되겠다."
목소리가 들떠 있다. 벌써 서울대 들어간 느낌이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아들을 실어오는 차 안에서 나는 신이 나서 쉴 새 없이 조잘댔다.
아들은 말없이 창 밖을 계속 쳐다본다.
(기분이 별로 안 좋은가? 잘했는데...)
한참을 말없이 창밖을 보던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응. 아들 왜?"
"있잖아..."
"엉. 말해. 왜 뭔데? 기분 안 좋아? 잘했는데... 왜? 왜 그래?"
"엄마. 내가 시험을 잘 쳐서 성적이 좋아도 너무 좋아하지 말고,
시험을 못 쳐도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알았어. 알았어. 걱정하지 마!"
그때. 아들이 하고 싶었던 말의 의미를 나는 몰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성적이 좋아서, 이대로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기분이 좋았다.
랄랄라 랄라라 랄라랄라라. 스머프송이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다.
중간고사 기간인데, 아들이 시험공부를 하지 않는다.
정시로 대학을 가겠단다.
1학년 2학기인데 내신을 버린다고? 1학년 1학기 내신이 1.7이었는데 내신을 버리고 정시로 간다고?
절대 내신을 버리면 안 된다고 들었는데, 정말 후회한다고 그러던데.
아니야. 아들. 내신 챙겨야 돼. 2학년 2학기도 아니고, 벌써 내신을 포기하는 건 안돼.
1학기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왜?
"엄마. 내가 내신 성적을 여기서 더 올리는 건 불가능해. 설사 성적을 조금 더 올린다고 해도 서울대 경영학과 못 가. 그냥 빨리 결정해서 정시 준비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어. 그러니까 엄마 나 좀 그냥 둬."
화가 난다. 벌써 포기한다고?
중간고사 기간 내내 아들은 새벽까지 축구경기를 보거나, 게임을 했다.
이제껏 쌓아왔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심장이 녹아내린다.
배신감이 느껴진다. 실컷 잘해왔는데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저 놈이 돌아버린 건가!
중간고사가 끝이 났는데 아들은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의 이상행동은 기말고사 때도 이어졌다.
시험기간 1주일 동안, 아들은 평소에 하던 공부도 손을 놓아버리고 대놓고 게임을 하고 프리미어리그 축구경기를 챙겨본다.
화가 머리꼭지까지 나서 아이한테 소리쳤다.
"정시로 대학을 간다고? 네가? 네까짓게?
웃기고 있네. 눈앞에 학교 시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수능으로 대학을 간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시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춰.
넌 친구들 내신 깔아주려고 고등학교 다니고 있는 거야?"
험하고도 거친 말이 쉴 새 없이 아들을 향해 터져 나온다.
순하디 순한 성격의 아들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흥분해서 소리 지르는 나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엄만 이제껏 거짓말을 한 거야?
나, 믿는다며? 안 아프고 안 다치면 된다며.?"
순간 얼어버렸다.
아무 말도 못 하겠다. 눈동자도 굴리면 안 될 것 같다.
몰래 나쁜 짓을 하다 누군가에게 들킨 기분.
맞다.
거짓말이었다.
아들을 믿는다는 말만, 마치 구호처럼 습관처럼 했지 믿지 않았다.
'넌 당연히 잘 해낼 거야! 엄마는 널 믿어!'라는 말은
'넌 당연히 잘해야 해! 못하기만 해 봐. 가만 안 둘 줄 알아!'라는 말을
아주 교묘하게,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하는 말이었다.
대꾸 한마디 못하는 나를 향해 아들이 쐐기를 박는다.
"엄마는, 내가 공부 못했으면 아마 사람 취급도 안 했을 거야!"
그날. 그렇게 우리 대화는 끝이 났고,
아들의 눈물과, 원망 섞인 그 말은 내 마음속에 박제되어 저장되었다.
며칠을 운 것 같다.
내려놓아야 한다.
아니. 아니. 진심으로 믿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아이를 믿는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나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다.
나는 더 이상 아들의 성적표를 요구하지 않았다.
정말 진심으로 잘 해낼 거라고 믿기로 했다. 사실 가끔 불안할 때도 있지만
아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책임감 있고,
때로는 나보다 훨씬 좋은 생각과 판단을 하는 아이라는 믿음을 갖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
아들은 평소에 열심히 하다가도 시험 치는 주간이 되면
마치 광야를 만난 보더콜리처럼 신나게 게임을 하고 축구경기를 시청했다.
"아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손흥민 골 넣었어?"
"응!! 역시 우리 흥!"
더 이상 아들에게 비난과 원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집은 평화를 되찾았다.
"빅손! 수능 다 맞춰서, 매스컴 한 번 타보자. 아즈아!!"
실없는 농담에 아들은 한 술 더 뜬다.
"엄마. 혹시 내가 수능 만점을 받으면 엄마도 인터뷰해야 될지 모르니까 준비해 둬"
"벌써, 다 적어놨지. 짜식."
"그래?... 그럼 다듬고 있어! 알겠지?"
나는 큰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들의 내신성적을 몰랐다.
졸업즈음에 우연히 나이스에 들어가서 보았는데,
한국사가 8등급이었던 걸로 보아, 아마 평점 7 내외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큰 아들은 마더 테레사도 울고 갈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친구들을 위해 내신을 시원하게 깔아주는 멋진 녀석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며칠 후.
옆 동에 사는 친한 동생이 나에게 묻는다.
"언니. 언니 큰 아들방, 현관에서 들어오면 입구방 맞죠?"
"응. 어떻게 알았어?"
"저 항상 새벽에 일어나는데, 우리 집 부엌창에서 보면 그 방 불빛이 보이거든요.
매일 새벽 5시만 되면 불이 탁! 켜져요. 근데 수능 끝난 이후부터 안 켜지길래 큰 아들 방이구나. 했죠. 하하"
"매일?
그랬구나.
아... 그랬구나...... "
한 두어 번 아들이 나를 새벽에 깨운 적이 있었다.
"엄마, 같이 산책 갈래요?"
어. 어... 가자.
졸린 눈을 반만 뜨고 아들을 따라나서면,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했다.
이제야 알겠다.
혼자 일어난 새벽,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에, 지친 숨을 고르기 위해서 그랬나 보다.
20개월이 되던 달에, 형이 되어서 단 한 번도 아기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오로지 형의 타이틀로만 자랐던 내 아기는
어느새, 나보다 키도 커지고 덩치도 커지고 마음까지 훌쩍 커버린 소년이 되어있었다.
아들아.
엄마는 너 믿어. 거짓말이 아니야.
네가 건강하고 사지멀쩡하게 내 눈앞에만 왔다 갔다 해도 엄마는 감사하며 널 키웠을 거야.
단 한순간도 너를 자랑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네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어도
'울 아들은 엄지손가락이 엄지발가락처럼 너무 귀엽게 생겼고, 키도 크고,
착하고, 변비도 없고... 아 맞다. 초등학교 운동회땐 릴레이 선수도 했어!'
온갖 꺼리를 만들어서 널 자랑스러워했을걸.
너의 담대하게 묵묵히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 마다 신의 축복이 쏟아질 거야.
엄마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