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9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다. 1991년 12월 8일은 우리 부부가 결혼 한날이다. 그러니까 신혼도 따끈따끈 한 신혼이다. 결혼한 지 딱 보름 됐다. 게다가 결혼 후 처음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이브날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오글거린다. 내가 크리스마스이브 이벤트 준비를 했다. 알콩 달콩 오밀조밀 콩닥 콩닥을 좋아했던 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예쁜 초, 귀염귀염 장식들을 준비하고 나만의 미니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었다.
케잌은 당시에 특별히 이쁜 것이 없없고 제과점도 '크라운 베이커리' 와 '고려당'이 그나마 고급이었고그냥 크리스마스 장식 몇개 올려놓은 것이 다 였다.
신혼집은 잠실동 작은 연립에서 시작했다. 잠실역에 있는 백화점에서 작고 이쁜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이브날 밤을 빛내줄 특별한 것을 야심 차게 준비한다. 이름하여 '섬씽 스페셜(Something Special)'이란 양주다. 집사님과 나는 처음 연애할 때는 가끔 찻집에서 만났지만, 주로 식사를 하면서 함께 술을 마셨다. 집사님은 평소에도 유머 만빵이지만 술이 한 잔 들어감 구염까지 추가에 유머는 더 빵빵 터진다. 나도 애주가다보니 우린 서서히 애주가 커플로 캐릭터를 굳혀갔다. 주종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다르다.분위기도 한 몫한다. 우아한 분위기에 칵테일을 한 잔 하고 싶은 날은 우리는 진 토닉을 즐겼다. 맛도 상큼하고 칵테일 중 제일 술맛이 나서 특히 내가 좋아했다. 당시에 한잔에 4천~5천 원이었으니까 싸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연애 때니 집사님이 물불 안 가리고 사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다 돈을 내는 문화여서 나는 뭐 그런가 보다 한 것 같다.
(추억의 진토닉)
칵테일 다음으로 우리가 잘 마셨던 술이 섬씽스페셜이라는 양주였다. 마트 같은 데서 사면 얼마인지 모르지만 카페에서는 꽤 비쌌고 홀짝홀짝 먹기에 좋았던 기억이 난다. 암튼 나는 백화점 주류 코너에서 섬씽 스페셜을 샀다.
고급 술은 아니었지만 우리추억이 담긴 술,
썸씽 스페셜!
당시 집사님은 연말이라 거의 야근을 했다. 이벤트 준비하기엔 좋은 환경이다. 두 개의 방 중 작은방에 아담한 도자기 탁자가 있었다. 테이블 삼아 도자기 탁자 위에 케이크와 과일, 안주를 세팅한다. 예쁜 미니 크리스마스트리도 만들고 조명이 예쁜 전선으로 트리를 휘감는다. 트리 맨 위에 황금 별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벤트 세팅을 완료하고 집사님이 들어올 즈음에 이벤트룸을 잠가놓을계획이다. 그야말로 오글오글 유치 찬란이다. 신혼 첫 크리스마스이길 망정이지 ㅋㅋㅋ
이브날 아침에 출근하는 집사님 양복 주머니에 슬며시 뭔가를 스윽 집어넣는다.
"지금 보지 마시고 나중에 보셔요, 내가 만든 거양"
집사님이 쑥스럽게 씩 웃는다.
"뭐 이런 걸, 돈 안내도 먹여주고 재워줄 텐데 ㅋㅋㅋ"
집사님은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그 유머에 콩 커플이 쓰여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초대장이 제일 오글거린다. 아주 애를 써서 기억을 더듬으면 이랬던 것 같다.
초대장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이브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날짜: 1991년 12월 24일 주인공: 사랑하는 두 사람 (멋진 당신과 이쁜 나) 시간: 투나잇 준비물: 건강한 몸과 뜨거운 마음
오늘은 우리의 결혼 첫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특별한 뭔가도 있습니다. 밤새도록 예쁜 이야기, 예쁜 추억 많이 많이 만들어요^^ 우후~~~~♡♡♡
아우~~~ 민망민망ㅋ 대충 저렇게 쓴 것 같다. 하얀 도화지를 오려서 청첩장처럼 가운데 내용을 넣고 양쪽으로 열 수 있게 입체카드를 만들었다. 사진이라도 찍어 놀 걸 ㅋ 왜냐면 손재주라고는 1도 없으니 모양은 결코 이뻤을 리가 없고 내용은 오글거리고 ㅋㅋㅋ 얼마나 우스꽝 스러웠을지 추억거릴 테니 말이다.
집사님이 드디어 집에 다와 간단다. 작은방에 전등을 끄니 크리스마스트리 전등만이 반짝인다. 너무 예쁘다. 집사님이 오면 '짠'하고 문을 열것이다. 퇴근을 한 집사님 입이 옴찔옴찔 뭔가 기대 만빵 얼굴이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눈을 가리게 하고 작은 방문을 짠~ 하고 열었다. 집사님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성공이다. 나는 집사님보다 더 좋았다. 보통 남자가 이벤트도 하고 선물도 먼저 주고 여행을 간다면 플랜도 짜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거꾸로다. 백퍼 내가 다 한다. 남자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편하다 편하다 제일 편한 여자다. ㅋㅋㅋ (크리스마스니 자화자찬 이쁘게 봐주세요)
집사님은 6남매 막내로 태어났다. 집사님 18번이다.
'가장 가난한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나는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었다. 하도 듣다 보니 짜증이 난다.
(물론 세월이흐르고 나이가 들면서는 오히려 정겹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니 가난이 창피한 건 아니지만, 자랑도 아니지, 당신은 그렇게 그 말이 좋아? 그래도 은행 지점장인데 그것도 강남 한 복판 노른자 땅에 잘 나가는 지점장말이야. 고생이 뭔지도 모르는 고객들한테는 제발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그 사람들이 당신이 백날 고생한 얘기 해도 이해도 못해"
집사님은 착해도 너무 착하다. 착한 사람이라 복도 많다. 은행지점장 첫 발령이 강남에 있는 잘 나가는 지점으로 났다. 잘 나가는 주거래처 고객들이 지점장실에 들어올 텐데 거기다 대고 또 18번 소리를 하지 않을까 노파심에 내가 잔소리를 한 게다.
내가 첫 크리스마스이브 이벤트를 한 이유다.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크리스마스에 어릴 땐 양말에 엄마가 선물도 넣어두셨고 가족이 모여 트리도 만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케이크에 초도 켜고 각자 쓴 카드도 주고 받고
집안에 크리스마스 캐럴도 울려 퍼졌다. 결혼을 해보니 문화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었다. 집사님은 크리스마스에 새벽송을 부르며 마을을 돌았던 기억이 유일한 기억이라고 했다. 뭔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지 방법도 모른다. 다행히 쿨한 내 캐릭터는 그런 집사님의 환경을 충분히 이해할뿐더러 '해본 놈이 해야지'하고 이벤트를 계획한 게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신통하다. ㅋㅋㅋ
집사님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기뻐했고 감동했고 고마워했다. 그런 집사님을 보면서 가슴이 찡 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집사님을 꼭 안아주며 눈물을 찔끔하지 않았을까...
이벤트 시작이다. 나는 정성스레 쓴 카드와 선물 (아마도 장갑?)을 주고, 내선물은 '내가 필요한 걸 사겠다'라고 한 것 같다. 케이크도 자르고 박수도 치고 ㅋㅋㅋ 할 건 다 한 것 같다. 아름다운 밤에 술이 빠질 수없으니 계획대로 준비한 섬씽스페셜을 마셨으면 되는데, 목을 축이자며 맥주로 시작을 했다. 기분이 좋아진다. 수다를 떨면서 마시니 술도 안 취한다.
"이제 섬씽 마실까?"
"너무 작은 걸 샀네. 밤에 사러 갈 수도 없고..."
"그럼 소주 한 병만 먹고 갈아탈까?ㅋㅋㅋ"
"그러자 섬씽은 주인공이니까 아껴먹자!"
맥주에 소주에 섬씽? ㅋㅋㅋ
드디어 주인공 섬씽을 개봉했다.
"캬 ~~~ 술은 역시 양주야ㅋㅋㅋ 잔도 이쁘고 맛도 이쁘고 너무 좋다 그췽~~~"
"그러게 이런 크리스마스, 난생처음이네... 고마워~"
"아 또 왜 그래~~~ 짠하잖아ㅠ"
그렇게 우리는 첫 크리스마스이브에 '뭔가 특별한' 이브의 밤을 보냈다. 특별이란...
술이라면 어디서 안 밀리는 주당 부부가 그날 밤 떡실신이 되고야 말았다.
소주, 맥주, 그리고 양주 ~~~
우리 부부는 둘 다, 섞어 마시는 술을 못 먹는다. 그걸 알면서도 그날 밤 분위기에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