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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영 Feb 12. 2022

나는 왜 "아빠가 보고 싶다"라고 말했을까?

나의 아버지 1


결혼하고 큰아이의 발달장애를 알기 시작할, 내가 28살 무렵쯤의 일이다.     


아빠는 평소 감기몸살 한번 걸리지 않으셨다. 그러다 병원 한번 갔다 오시고는 '대장암 3기'를 진단받았다.


첫 번째 수술을 받던 날, 아빠는 아랫배에다 항문을 내고, 대변 주머니를 달고 퇴원하셨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복막염'이 왔다. 평소 하시던 말씀처럼, “많이 살았으니 이제 괜찮다”는 말 대신 “살려달라”라고 애원하셨다. 열이 40도를 육박하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하는 아빠 옆에서 '죽음'이란 무서운 단어를 떠올리며, 응급실로 향했다.


그렇게 입원한 아빠의 암병동이" 7층".......     


그맘때 나는 같은 병원 "4층" 정형외과 병실에 하루에 한 번 꼭 다녀와야 했다.

지금은 전 남편이 된 그때의 남편이 교통사고 사망사고를 내서, 구치소에 가 있는 동안 

그 차에 탔던 일행 중 사망하신 분의 남편이 4층의 병실에 입원해 계셨기 때문에 합의가 필요했다.     


암병동은 그야말로 생과 사가 뒤엉켜진 혼돈의 공간 같았다. 6인 병실에서 침대 채 이동하시는 분은 어김없이 1인 병실로 옮겨졌고, 며칠 걸리지 않아 대성통곡이 울려 퍼지는 것을 여러 번 지켜보면서 죽음이란 것이 바로 옆에서 나도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것에 불안 해 했다.  


내 가족의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공포 속에, 나는 다시' 피해자의 죽음을 법적으로 합의'하기 위해 "4층"으로 가야 했다.

죽음이 가까워진 아빠 곁에 있노라면 잠시라도 그 아픔을 대신해 주고 싶단 생각으로 애절했지만, 나는 또 내 삶을 위해서 아빠를 잠시 남겨두고 "4층"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어김없이" 4층" 병실은 입구에서부터, 겉옷이 날아온다든지, 거친 욕이 들린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얼음보다 차가운 침묵만이 나의 애원에 대답할 뿐이었다. 어느 것이 더 견디기 쉬웠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침묵이 가장 어려웠다고 대답하고 싶다. 

사랑하는 부인을 잃고,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울분과 슬픔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받아내고 있다는 생각은 그래도 희망적이었다고 할까...

나의 애절한 합의 요청에 침묵으로 일관할 때는, 나도 더 이상 이런 합의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헤메었다.    


다시" 7층"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그 몇 분간 아빠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길 바라며, '모든 걸' 걸고 기도하며 빌었다. '걸 것'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아마도 "4층"과 "7층"으로 오가며 서로 돌려막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4층"으로 갈 때는 아빠보다 합의가 중요했고, "7층"으로 갈 때는 합의보다 아빠가 중요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혼돈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의 어린 시절


아빠는 1980년대 당시,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한번 비행기를 타고 나가면, 1년이나 2년 뒤에 집으로 왔다.     


아빠가 집에 오는 날에는 아침부터 부산했다.

엄마는 국을 한 냄비 끓이고, 평소 못 먹는 고기반찬도 만드셨다.     

언니와 나는 아빠가 걸어오는 길이 보이는 언덕으로 나가, 아직 올 때가 멀었을 아빠를 기다리며 놀았다. 해가 늬엇 지어가면, 저 멀리서 큰 가방을 옆에 끼고 걸어올 아빠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늘 "아빠가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둘째인 내 담당이었다. 우리 집은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언니는 왜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을까???

언니는 보고 싶었지만 보고 싶다는 말을 안 한 건지, 진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어김없이 일어나던 폭력...... 그래서 엄마에게 아빠는 나쁜 사람이었고, 언니와 나는 엄마와 같이 아빠를 미워해야만 했다.


그래도 나는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리고 언니에게 "아빠가 보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고, 그것은 아마도 아빠가 해외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올때의 설램이나 기쁨 같은 것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엄마는 늘 “보영이가 보고 싶어 했다”는 말로 아빠 맞이를 했다.


가정불화 속, 어린 나는 나를 둘러싼 이 가족이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골똘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갓 태어난 무력한 갓난아기가 잡은 손을 움켜쥐듯 "아빠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보고 싶었는지 어땠는지는 나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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