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시계
미자 씨는 요즘 죽을 맛이다. 일이 많다. 최근 몇 년간 구조조정에 연봉조정에 살아남기 미션에 들볶였었다. 함께 했었던 선배나 갓 들어왔던 후배들마저 눈물겨운생이별식을
거쳐야만 했던 게 바로 엊그제 일이었다. 회사에 딱 필요한 인원만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한창때의 미스 김의 일이나 최대리의 업무 그리고 윤 과장님의 결제상신까지의 상황이 한꺼번에 미자 씨에게로 밀려들었다. 갑자기 몰려든 일에 더하여 주변상황까지 업무폭주다. 그렇다고 새 직원을 뽑아 달라는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다. 언제 어느 때 다시 불황의 그늘에 들어갈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미자 씨는 그래서 더 죽을 것 같다. 이젠 몸이 열개라도 되어야 이 상황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다못해 몸의 이곳저곳에서 고장신호가 감지된다. 두통에 요통에허리아래
힘 빠짐과 어깨며 손가락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휴가계를 내밀어 보지만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은 끝내고 가야 한단다. 그래서 이 악물고 버티고 버텼다. 그러다 결국 쓰러졌다. 과로가 원인이었다. 아픈데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침대에 누워서도 전화업무다. 돌아버리겠다. 자연스레 재택 근무자가 되어 버렸다.
"사장님! 저 이러다 죽을 것 같아요"
"미자 씨! 지금 구인광고 내놨어 쫌만 참아 줘"
"사장님! 저 사직하겠습니다"
"미스 리,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직원모집공고를 냈다는데 도무지 소식이 없다. 며칠 못 가서 사그라들 것 같았던 업무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미자 씨가 사직서를 작성 중이다. 일당백으로 악으로 깡으로 사수해 내던 그 업무를 조용히 내려놓겠다는 심산이다. 더 이상 이 일을 붙잡고 있다가는 미자 씨의 전부가 망가질지도 모를 일이다.
메일을 보냈다.
사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그동안 정 들었던 회사를그만두겠습니다. 새 직원을 구해주시겠다고 하신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건만 저는 피폐할 대로 망가지는데 새 직원은 요원합니다. 제가 회사와 사장님을 배려하기엔 이제 지쳤고 번아웃 일보직전 입니다. 사직서는 첨부파일로 보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담담하게 정리해 보내놓고 모든 소통을 차단했다. 침대에 누워 그간의 회사생활을 되돌아보다가 잠이 들었다. 밖은 어두워졌고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사 관계자였다. 잠자코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들이 물러갔다. 다시 한참 후에 또다시 초인종소리다.
살펴보니 치킨배달이다. 미자 씨가 시킨 적이 없다. 역시 잠잠히 있었다. 문 앞에 놔두고 그냥 간다. 아깝다. 그러나 문을 열어볼 수가 없다. 회사관계자가 아직 주변에서 지켜볼 수가 있어서다. 이 상황도 사실 스트레스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온다. 이미 자고 있었는데 또다시 잠을 잔다. 꿀잠이었는데 갑자기 초인종소리다. 밖을 보니 깜깜했고 제법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음 누구세요?"
"주문하신 마라탕 배달인데요"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어라, 여기 405동 2004호 아닙니까?"
"네? 동과 호수는 맞는데 주문한 적이 없거든요"
배달원이 한참을 문밖에 서 있다. 그러더니 또다시 초인종을 누른다.
"아니, 여보세요! 주문한 적이 없다고 하잖아요~"
"저 잠깐만 문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세상에나! 헬멧을 벗어버린 그 배달원은 다름 아닌 사장님이었다. 이미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미자 씨가 배달원의 초인종소리에는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계산하에 끊어진 소통을 어떡하든 이어보려는 사장님의 술수(?)에 그만 넘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한밤중 일 것 같았던 그 시간은 그리 깊지 않은 저녁 10시 정도였다. 피곤했던 미자 씨의 생체시계가 고장 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