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려령 <우아한 거짓말, 2011>
1. 삶의 시제
시간은 그저 흐를 뿐, 가둘 수 없고 나눌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어. 그럼에도 우리는 지나간 일과 지금의 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나누는데 집착하곤 하지. 그런데 가끔은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 과거의 일이 시시각각 나를 옥죄어오는 걸 느낄 때, 기약을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한 순간을 위해 지금이라는 순간을 자각하지 못할 때 말이야. 인간은 매순간 시간의 전체를 살아낼 뿐인 건 아닐까? 지금을 과거처럼 살기도 하고, 미래처럼 살기도 하고.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어. 그때는 정말 화가났고, 참을 수 없었어. 그 사람이 나에게 했던 말과 행동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았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 사람은 나에게 무척 미안해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내 마음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 문득 끊임없이 미안한 표정을 짓고 풀이 죽어 있는 그 사람이 안쓰럽게 느껴졌고, 용서를 한다고 했어. 말이라도 그렇게 하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몰라.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하고 멋있게 거짓말을 해 버린 거야. 그 때 알았어. 살아가는 데 있어 시간을 나누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그때 그 일은 결코 그때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를 주저앉게 만들어.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자신이 없어. 솔직히 인정해야 해. 나는 그때 그 순간의 그 사람을 지금도, 앞으로도 용서할 수 없을 지도 몰라.
2. <우아한 거짓말>
'양치기 소년'의 교훈을 꺼내지 않더라도 거짓말을 하는 건 나쁜 일이고, 매사에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자랐어. 하지만 참 이상하지? 그렇게 배웠음에도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티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터득했으니 말이야. 거짓말이 지금 이 순간 나와 너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무엇보다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행위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라.
중학생 여자 아이 천지는 티나지 않게 자신을 괴롭히고 비참하게 만드는 친구 화연이 때문에 속을 썩고 있었어. 그런데 자신이 안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뱉어내지도 못했지. 천지는 다른 사람에게 걱정을 주거나 부담을 줄 수 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지나치게도 여린 아이었거든.
조잡한 말이 뭉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혹시
예비 살인자 아닙니까?
<23쪽
천지의 글쓰기 발표
중에서>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더이상 버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천지는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하게 돼. 실뭉치에 너를 용서하겠다는 말을 담은 쪽지를 넣고 말이야.
천지의 엄마 그리고 언니 만지는 그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고 버텨 온 천지의 아픔을 죽고나서야 하나씩 알게 되지. 떼 한번 쓰지 않던 애가 짜장면을 왜 그렇게 먹기 싫어했고, MP3는 왜 사달라고 매달렸는지 말이야.
3. 사과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고, 죽음에 이르게 만든 아이가 누군지도 알았으며 심지어 그 부모 또한 이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얼마 만큼 화를 내야할까? 얼마나 분노를 터트려야 죽어간 아이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나마 다독여 줄 수 있을까.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아.
천지를 괴롭혀 죽게 만든 화연은 내성적이고 착해빠기만 한 천지를 친구인 척하며 비참하게 만들었어. 옆에서 지켜보는 친구들마저 저건 아니지 않나 싶을 정도로 말야. 화연이는 일로 바쁜 부모님께 관심받지 못하고 겉돌다보니 마음의 분노가 쌓였던 것 같아. 통제할 수 없는 분노 앞에 적당히 괴롭힐 만한 상대가 필요했고, 천지는 그 대상이 되기에 너무도 적합한 아이였어.
천지의 엄마는 화연이의 엄마를 찾아가. 그리고 사과하려고 하자 말을 막아 서지. 사과하지 말라고, 사과를 해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은 없을 테니까.
"사과 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210쪽
천지 엄마가
화연이 엄마에게>
화연이도 천지가 자신 때문에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죄책감에 힘들어 해. 그리고 자신도 죽으려 하지. 천지의 언니 만지는 화연이의 죽음을 막아 서. 죽음으로 용서를 피해가려는 비겁한 짓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도 몰라. 살고 또 살아서 매순간 천지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해하라고
4. 용서의 시제
어쩌면 천지의 엄마와 언니는 화연이와 그 가족을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몰라. 나도 겪고 나서 안 사실인데 용서를 하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차마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당한 사람도 용서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몸에 난 상처는 아물어도 마음에 난 상처는 아물지 않으니까.
그저 속이지만 않으면 좋겠어. 용서를 하는 사람이든 받는 사람이든.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 혹은 죄책감을 감추려 들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애써 노력하려 하지 말고.
'용서'의 시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야. 용서를 하는 사람도 용서를 했다고 해서 그 마음이 완벽하게 가실 리가 없고, 받는 사람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가뿐해 질 수 있는 게 아니야. 평생 가지고 가야해. 그 부담스럽고 무거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