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치즈/김치/홍어
보관 기술로 우연히 발견된 식품
옛날에는 다양한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에 도전하여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이런 과정 중 우연히 음식을 보존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맛이 깃든 음식이 창조되기도 했다. 특히, 염장법과 발효를 통해 발견된 식품들이 많다.
해외에는 이탈리아 살라미와 보관방법 상 시행착오를 통해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치즈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치, 젓갈류, 홍어 등이 있다.
살라미는 전 세계에서 즐겨 먹는 염장건조 방식의 이탈리아식 소시지이다.
5세기경 켈트족의 영향으로 로마제국에 보급된 돼지고기 염장법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물론, 고기를 염장하여 보관하는 기술 자체는 로마 제국보다 훨씬 이전인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다.
소금의 비율이 높은 대표적 염장식품으로, 다른 소시지와 비교해도 짠맛이 유독 두드러진다.
치즈는 보관방법에서 파생된 가장 중요한 식품이다.
소, 양, 염소와 같은 포유류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식품이다.
인류가 치즈를 만들어 먹었던 기원과 누구에 의해 발견되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과거 유적을 보면 어느 정도 기원을 추정할 수가 있다.
치즈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계에서는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며 소, 양, 염소와 같은 동물들을 가축화하는 단계에서 치즈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기원전 6000년 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우유 가공 기록과 기원전 3000년 경의 스위스의 치즈 가공 기록 벽화를 통해 내용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대전설에 의하면 최초의 치즈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던 유목민들이 키우던 양과 염소 등의 젖을 동물 가죽이나 양의 위를 가지고 만든 주머니에 담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어느 날 한 상인이 젓을 잔에 따르려는데 윗부분이 덩어리 진 채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낙타에 젖을 싣고 시장에 가는 동안 뜨거운 사막의 열기가 젖을 응고시킨 것이다.
이것이 치즈의 기원이자, ‘커드’라고 불리는 덩어리다.
상한 줄 알고 내다 버리던 커드의 숨은 감칠맛이 알려지며 치즈가 탄생했다.
우리나라에는 임실치즈앤식품연구소 자료에 의하면, 국내 치즈산업의 시작을 알 수가 있다.
1964년 벨기에인 디디에 세스테반스(한국명:지정환)신부가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오시면서 시작한다. 당시 임실군수께서 지정환 신부에게 “임실군민에게 뭔가 하나쯤은 꼭 남겨줄 수 있는 일을 해달라”는 말씀에 주민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야산에 풀이 넘쳐나는 것을 보물로 알고 주민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산양을 키워 산양유를 생산하기로 하였다.
평소 알고 지내던 다른 성당의 신부로부터 얻어온 산양 두 마리로 시작하기로 하였는데 점차 산양을 늘려가면서 산양유를 짜서 판매하였으나 판매가 부진하자 남은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치즈의 시초가 되었다.
벨기에를 떠나오면서 무심코 챙겨 온 응고제와 산양유를 섞은 후 수분을 제거하고 남은 고형물을 시장에서 구입한 빨래 비눗갑에 담아 굳혀서 만든 최초의 치즈. 임실치즈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표적 염장법과 보관기술로 파생된 음식으로 김치가 있다.
김치의 기원은 절임채소에서 변형된 음식이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채소를 장기 보관해 두고 필요할 때 먹고자 부패를 막는 효과가 큰 소금에 절여두었다.
이러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단순히 채소를 절이는 것을 원시형 절임채소라고 한다. 대표적인 음식이 중국의 파오차이, 서양의 피클과 사우어크라우트가 있다.
중국은 지금부터 약 3,000여 년 전 생활상에 적은 ‘시경’ 속 내용을 통해 김치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경’엔 ‘밭 안에 오이가 있으니 이것을 벗겨 저(菹)를 만들어 조상(祖)께 바친다(獻)’는 내용이 있다. 저(菹)는 소금에 절여서 오랜 시간 저장해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원시형 채소절임에 해당한다.
그러나 김치는 소금과 장, 그리고 다양한 혼합된 양념을 사용하는 독창성 있는 음식이다.
또한, 2차 생채 침체란 제조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발효가 된 후에 맛이 다양하게 변화를 일으킨다.
김치는 삼국시대 시작되어 제조방법이 지속적으로 변천되어왔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전까지는 무를 주원료로 한 동치미, 짠지, 장아찌가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모양은 조선시대 중반 이후에 배추와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보급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보관상의 잘못으로 발생한 대표적인 음식인 홍어가 있다.
과거 홍어는 전라도 흑산도에서 많이 잡히는 어종이다. 홍어는 발효가 되면 냄새가 심한 고기다. 그런데 이 냄새는 홍어 피부에 쌓인 노폐물이 암모니아 발효가 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남도일보 최혁 주필의 전라도 역사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 삭힌 홍어 탄생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때 왜구는 경상도에서 전라도 일대 해안가 및 인근 내륙까지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다. 특히, 섬 지역은 무방비 상태였다. 왜구가 나타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조정은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을 모두 뭍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를 쇄환정책(刷還政策)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고려 말기 왜구의 침탈로부터 섬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로 인해 흑산도 사람들은 모두 내륙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들은 서해안 바다로 이어지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지금의 나주 근처 강변에 터전을 잡았다.
그곳이 지금의 영산포이다.
그리고 영산강과 바닷길을 되짚어 흑산도 근처까지 다시 나가 고기잡이를 한 뒤 영산강으로 돌아오곤 했다. (1972년부터 시작된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으로 댐이 만들어지면서 현재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영산포 사람들이 흑산도 일대에서 홍어를 잡아 영산포로 돌아오는 보름정도의 기간에 이 암모니아 진득한 홍어가 자연발효가 된 것이다.
다른 생선들은 상해서 먹지를 못하는데, 홍어만은 먹을 수 있었다. 홍어는 암모니아 발효로 균들을 죽이는 것이다. 대개 동물들은 노폐물을 오줌으로 내보내는데 홍어만 피부로 내보낸다.
그래서 홍어 피부에는 암모니아가 주성분인 노폐물이 가득했다. 따라서 보름 정도 기간이 지나도 완전히 썩지 않고 적당히 발효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부들이 흑산도에서 잡아온 홍어를 꺼내 먹어보니 약간의 썩은 냄새와 톡 쏘는 맛이 비위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게 별미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음식이 경험을 통해 우연히 발견되었고, 이러한 경험이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적 원리를 알게 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