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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Mar 26. 2020

억세게 운수 좋은 날

두 번째 비행 - 2019.0731.0900

 두바이 현지시간으로 새벽 5시 무렵에 도착한 탓에 바깥은 아직 깜깜했다. 대기시간이 꽤 있어 시내에 잠깐 나갔다 올까 생각도 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딱히 들어갈 곳도 없을 것 같아 그냥 공항에 있기로 했다. 덩치가 큰 A380을 위해 별도로 지었다는 제3 터미널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면세구역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쇼핑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나는 건물 한 바퀴 휭 둘러보고는 라운지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지난밤의 피곤을 중동식 사우나에서 말끔하게 씻어버리고 다음 비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두바이 공항 A380 전용 터미널에서 다섯 시간을 대기했다. 사진은 3층에 위치한 마하바 라운지다.
이번엔 상파울루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솔직히 15시간은 인간적으로 너무 길다.
게이트에 선명하게 표시된 목적지, 상파울루. 이제는 좀 실감이 나려나...


 이제는 다시 이코노미 본연의 자리로 돌아와 더 긴 비행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다. 애초에 이코노미인 줄 알았으면서도 간밤의 호사 때문에 괜스레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범인(凡人)이다. 이내 탑승 게이트가 열리고 나는 한껏 풀이 죽은 채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그런데 이 사람... 나한테 갑자기 윙크를 한다?


오오오, 다시 승급이다!
하나님, 부처님... 아니 알라신님 감사합니다! 잘 타고 갈게요!!


 게이트 직원은 여권에서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빠른 동작으로 책상 밑에서 새 표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줬다. 얼떨결에 받아본 표에는 선명하게 적혀있는 바로 그 이름 '비즈니스'. 그랬다. 나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자동승급이 된 것이다. 어쩐지 상파울루 가는 사람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이코노미는 풀 부킹이었던 모양이다. 인천에서 처음 승급됐을 때 보다 훨씬 더 기뻤다. 다시는 못 가볼 줄 알았던 A380 2층에 한 번 더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출장길, 시작부터 참 마음에 든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한 번 타봤다고 이제는 좀 익숙해졌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2층 전체가 퍼스트와 비즈니스로만 되어있다.
하지만 똑같은 A380-800 임에도 모든 면에서 더욱 최신 기재가 탑재되어있다!
일단 모니터가 더 크고 선명하며...
보조 모니터도 아이패드와 흡사한 모양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불가리 어메니티 파우치 또한 더 크고, 예쁜 모양으로 바뀌었다.


 떠나오기 전부터 브라질의 치안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도 들은 터라 막연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상파울루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이 싹 없어졌다. 남미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자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상파울루로 향하는 옆자리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가나 높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탄 비행기는 A380 중에서도 가장 최신 기자재가 탑재된 신형이었다. 모니터, 리모컨, 좌석 스위치 같은 큼직한 사양들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USB 전원의 위치까지 훨씬 편리하고 보기 좋은 위치로 바뀌어 있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 가지 눈여겨본 건 같은 비행기에 한국인들도 더러 있었다는 점이다. 막연히 한국에서 먼 곳이라 한국 손님은 나 혼자일 줄 알았는데 가족단위 승객도 보이고 이래저래 신기한 풍경이었다. 다들 무슨 사연으로 이 먼 곳까지 가시는지 매우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2층에 마련된 퍼스트&비즈니스 전용 라운지에 있으면 전용기라도 탄 것 같은 착각이 살짝 든다.
두 번째 기념사진... 이제 표정도, 자세도, 구도도 모든 것이 확실히 더 여유로워졌다?


 이코노미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대단히 편하게 왔지만 그래도 15시간의 비행은 만만치가 않았다. 인천에서 뉴욕까지도 12시간 남짓, 가장 먼 유럽의 끝 마드리드로 가더라도 13시간이 걸렸으니 이번 비행은 나름 개인 최장시간 기록을 세운 셈이다. 낮비행이지만 앞선 비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불 깔기 서비스를 제공한다. 의자를 완전히 눕혀도 보고 잠깐 세워도 보고 라운지에 들러 운동도 해보지만 그래도 종국에는 허리가 아플 정도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영화만 총 네 편을 보았는데도 비행기는 아직 대서양 위에 있더라.


이륙하자마자 제공된 조식, 신선한 과일이 많아서 좋았다.
대서양 상공에서 제공된 점심 전채요리에는 무려 훈제연어가 있었다.
메인 메뉴는 바하랏(Baharat)으로 시즈닝 한 중동식 닭구이
후식으론 치즈 플레이트를 시켰는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디저트였다.
간식 개념으로 나온 마지막 파스타까지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 비행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


 주는 대로 음식을 다 받아먹다 보니 간식까지 총 다섯 번을 먹었다. 조식-간식-점심-간식-(간이) 저녁 이런 식이다. 이미 두바이까지 오는 동안 기내식 두 번에 간식 한 번을 먹었고 기다리는 동안 라운지에서도 식사를 한 번 더 했으니 상파울루까지 오는 동안에만 총 아홉 번 뭔가를 먹었다는 계산이 된다. 여기에는 중간에 마신 음료는 포함되어있지 않으니 뱃속에 얼마나 많은 게 들어갔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그래도 분에 넘치는 행운을 두 번이나 겪어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마침내 30시간의 긴 여정도 단 24분 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창 밖으로 도시가 보이기 시작할 때...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이제는 정말 내려야 할 시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 비행을 마치고 어느새 창밖으로 상파울루의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먹고, 자고,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고 처음 타보는 A380 비즈니스석에 호기심이 발동해 이것저것 가지고 놀다 보니 출장과 출장지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건물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새삼 내가 지구 반대편에 진짜 왔구나 하는 현실 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아아, 감상에 젖어있을 시간은 이제 끝났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겠다는 책임감 만이 무겁게 가슴을 눌러왔다. 혹시 이번 출장의 운을 오는 길에 다 써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마저 엄습해왔다.


상파울루 과를류스 국제공항의 첫인상은 꽤 춥고, 스산했다.


 짐을 찾고 이것저것 챙기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어둑해진 시간. 픽업하기로 되어있는 차를 기다리면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새로운 도시의 공기에 적응해본다.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얼른 겉옷을 챙겨 입었다. 찌는듯한 더위의 한국에서 출발해 남반구의 상파울루의 겨울까지 오게 된 30시간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도착한 차에 올라 시내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상파울루 외곽도시에 위치한 과를류스 국제공항에서 시내까지는 40분 남짓 걸리는 거리다. 차멀미였을까. 갑자기 12시간의 시차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익숙한 기분과 함께 옅은 두통이 찾아왔다. 


비로소 출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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