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미술관, D-1 - 2019.0411.1000
다행히도 간밤에 모형에는 별 일 없었다. 나 역시 그 옆에서 곤히 단잠을 잤다. 오늘의 첫 일정은 미술관으로 모형을 운반하는 것인데 개관 시간이 열 시인 관계로 아침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졸린 눈을 비비고 내려와 호텔 식당으로 향했다.
앙증맞은 모양은 물론 색깔마저 아기자기한 일본식 조식을 한 접시 가득 담았다. 미소장국과 밥을 기본으로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츠케모노(절인 채소)까지 곁들인 전형적인 일본 가정식이다. 아무래도 일본 회사원들이 출장으로 많이 오는 비즈니스호텔이다 보니 아메리칸 식 보다는 일본식을 택해 타지에서도 '집밥' 느낌으로 편안하게 해 주려는 배려 같았다. 물론 나 같은 외국인 손님에게 있어서 만큼은 일본으로 온 출장의 기분을 한껏 더 살려주는 좋은 한 끼였지만 말이다.
가볍게 온천욕까지 즐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호텔에서 미술관 까지는 걸어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사실 호텔의 예약에 대해서는 금액대 외에는 위치에 대한 별도의 사내 규정이 없어 꼭 이곳으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번 출장 제일의 목적이 전시 설치 감독이었던 만큼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상황에 대비하여 언제든 미술관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가까운 곳으로 호텔을 예약했다. 지난 밀라노 출장에서도 같은 이유에서 미술관 근방의 호텔을 잡았었고 실제로 거리가 가까운 덕분에 돌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했던 경험이 있었던 것도 참고가 되었다.
업무를 우선하여 호텔 위치를 정하면 또 좋은 점은 여행자로는 결코 와볼 일이 없을 법한 동네에서 머물러 본다는 점이다. 시나가와 역시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일반적인 도쿄 여행 루트에서 들르기 쉽지 않은 곳이다. 하네다 공항과 가깝게 조성된 비즈니스 구역에는 다국적 기업들의 도쿄 지사가 산재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포진해있다. 실제로 대사관저들도 여럿 보였는데 그 때문인지 서울의 한남동이나 성북동과 상당히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짐이 있으니 택시를 탔다. 출발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사전 조사를 충분히 하고 왔지만 한산한 주택가 가운데 불쑥 등장하는 미술관이 당황스러워 잠깐 두리번거렸다. 아직 개관 준비 중이라 굳게 닫힌 정문 옆으로 작업자들이 드나드는 쪽문이 있었다. 그 옆으로 '자연국가: The Nature Rules' 전 포스터가 붙어있는 걸 보니 맞게 찾아온 것 같았다.
벨을 누르자 마사미 상이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녀는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이자 준비 과정에서부터 나와 수 차례 메일을 주고받았던 담당자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니 참 반가웠다.
고즈넉한 앞마당을 지나자 모더니즘 양식의 본관 건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38년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본래 사업가 하라 구니조의 저택이었던 것을 지난 1979년에 현대 미술관으로 개관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러 차례 개수의 흔적이 덧대어져 있기는 해도 본래 건물이 범상치 않아 보여 검색해보니 우에노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설계한 일본 건축가 와타나베 진의 설계라고 한다. 꼭 전시가 아니더라도 찾아와 볼 만한 특별한 미술관 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안내를 받아 뒷마당 쪽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오니 세계 각지에서 온 다른 전시팀 스태프들이 이미 짐을 풀어놓고 있었다.
하라미술관은 꼭 전시가 아니더라도 건물이나 그 공간감 만으로 충분히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지상 2층 규모의 아담한 건물은 중앙의 계단을 중심으로 복도와 여러 개의 작은 방들로 되어있는데 그 스케일감이나 구성이 아기자기해서 여느 미술관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특히나 풍부한 자연채광이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전시를 준비하며 도면으로 접했을 때에는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 더 좋았다. 다만 이 좋은 미술관을 내년을 끝으로는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100년 가까이 된 건물이다 보니 지진에 취약하여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어쩌면 오늘 보는 이 미술관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한 장면이라도 더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 졌다.
오늘 내가 가져온 모형이 설치될 3번 갤러리는 2.4m x 4.2m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방인데 왼쪽 벽면으로는 패널이, 오른쪽 벽면으로는 영상이 상영되도록 계획했다. 모형은 철제 와이어로 천정에서 달아매어 방의 중앙에 위치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미 방 안에는 두 명의 설치 엔지니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 놀랐던 건 이미 패널과 영상 프로젝터 설치작업이 완료되어있었던 건데 나중에 들어보니 영상의 밝기와 음향의 높낮이까지 내가 보내온 전시 계획안의 특성을 고려하여 세밀한 조율을 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마사미 상과 수 차례 계획 및 설치작업에 대한 사전 논의를 진행하긴 했으나 이렇게 까지 완벽하게 파악되어 실무자에게 전달되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아무리 열심히 도면을 그려도 현장에만 가면 처음부터 다시 말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들에 익숙해서였을까, 살짝 감동했다.
당연히 모형을 천장에 매다는 작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곡률을 가지는 건물의 특성상 방의 벽체들도 직선이 아니었는데 때문에 내가 현장에서 보면서 정확한 위치를 정해주어야만 했다. 아무리 정확한 도면을 그려도 현장 감독자가 꼭 필요한 이유다. 특히나 이번 전시처럼 내용물이 많지 않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효과를 원하는 경우엔 미세조정에서 전시의 퀄리티가 판가름 나곤 한다. 모형 설치가 완료되고 내가 따로 챙겨 온 부속품들을 핀셋으로 일일이 덧붙여 마무리하는 사이, 천장에서 모형을 비추는 단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조정도 끝이 났다. 여러 개의 등기구를 갈아 끼워가며 각도, 세기, 범위 등을 조정해서 내게 보여주는데 몇 번을 바꿔봐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끝내 미술관 창고를 뒤져가며 다른 등기구를 가져와 나에게 오케이를 받았다. 감독자의 마음에 들 때까지 최선을 다해준 엔지니어들 덕분에 찜찜한 마음 없이 설치가 무사히 완료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