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미술관, D-DAY - 2019.0412.1600
내가 담당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 미술관 전체를 천천히 둘러보며 다른 작품들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아직 개관 전이지만 이렇게 먼저 전시를 볼 수 있는 것 또한 감독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는 대한민국 분단의 비극적인 아픔이 서려있는 DMZ를 주제로 '자연국가: The Nature Rules'라는 이름으로 오는 7월까지 계속된다. 최재은, 이우환, 이불, 김태동, 승효상, 조민석, 정재승, 올라프 엘리어슨, 스튜디오 뭄바이, 시게루 반 등 쟁쟁한 예술가, 건축가,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어우러져 DMZ의 가치와 의의, 그 미래에 대한 생각을 공유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자리이다. 앞으로 전 세계를 순회할 예정이라는 본 전시의 시작으로, 요즘 들어 반한정서가 심해지는 일본 도쿄의 하라미술관이 선택된 것도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예전부터 내가 관여하고 있던 프로젝트라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작품과 작가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곳 도쿄에서 DMZ를 주제로 국적도, 분야도 다양한 사람들이 생각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은 참으로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열리는 곳이 일본인 만큼 전체적으로 일본어/영어 병기를 원칙으로 하였는데 과연 일본 사람들 눈에는 이 전시와 주제가 어떻게 비추어질지 참으로 궁금했다.
설치를 마친 다음날 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프레스 콘퍼런스와 사전 오프닝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일반인 관람이 시작되었다. 보도자료를 한 묶음씩 전달받은 기자들은 매서운 눈매를 하고 미술관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듯했다. 옆에서 살짝 들어보니, 일본 미술계 기자들 사이에서도 하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꽤 주목도가 있는 편이고 특히나 이번 전시는 DMZ를 주제로는 일본에서 처음 열리는 전시라 관심이 더 크다고 했다. 프레스 콘퍼런스에 참석한 기자들의 수 만으로도 그 열기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특히나 인상 깊었던 건 출장 셋째 날에 있었던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큐레이터 토크 자리였다. 개관에 앞서 실제 작가들로부터 짧은 강연을 듣고 질의응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시작하기 한 시간도 전부터 미술관 앞을 가득 메운 인파에 깜짝 놀랐다. 미술관이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만큼 여길 찾아왔다는 건 오로지 이번 전시만을 위해 일부러 발걸음 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강연이 시작되고 나서는 맨 뒤에 앉아서 스탠바이하고 있었는데 청중들의 태도가 사뭇 진지하여 다시 한번 놀랐다. 한국어-일본어-영어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다소 느린 진행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나 내 옆자리에서 돋보기를 치켜올려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노트에 뭔가를 적으시던 백발의 노부부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들의 열정과 관심, 그리고 마음의 여유 같은 것들이 부러운 마음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번 출장이 개인적으로도 뿌듯했던 건 열심히 준비했던 내 담당 작품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토크를 마치고 일반인을 상대로 관람이 시작된 이후 관계자인걸 숨기고 옆에서 지긋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관람객들의 생생한 반응이 너무나 궁금해서 그랬다. 과연 작품 설명 한 글자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꼼꼼한 관람 태도 역시 대단히 인상 깊었다. 며칠 전 전시 종료를 앞두고 마사미 상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더 왔는데, 전시 내내 반응이 좋았다는 언급이 있어 다시 한번 기분이 좋아졌다.
전시 설치와 기자 간담회, 큐레이터 토크와 일반인 간담회까지 참석하는 것을 끝으로 이번 출장에서의 나의 첫 번째 임무는 무사히 끝이 났다. 큐레이터 토크가 종료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혼자 미술관을 빠져나와 기타시나가와 역에서 상행 전철을 탔다. 나의 이번 출장 일정에 맞춰 담당하고 있는 다른 프로젝트의 발주처에서 답사차 도쿄에 오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인 스미다 구로 향하는 도에이 선으로 갈아타고 나서야 짧게 한 숨 돌릴 수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