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멘 한 그릇

시나가와, D-2 - 2019.0410.2000

by 이규빈

한 시간 반의 짧은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는 무사히 하네다 공항에 착륙했다. 인천-나리타 보다는 각자의 도심에서 가까운 김포-하네다 노선이 출장을 목적으로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훨씬 효율적인 이동 방법이 된다. 특히나 내가 묵을 숙소는 하네다 공항 바로 옆에 위치한 시나가와에 위치해 있어서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 노선을 택했다.


생각보다 흐린 날씨에 옆에는 말 붙일 사람 하나 없고... 쓸쓸하다 쓸쓸해.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


이미 저녁시간이 훌쩍 넘긴 무렵이라 지체 않고 택시를 잡아 탔다. 이렇게 혼자 가는 출장길이면 호텔 예약도 스스로 하고 지출결의로 처리하곤 한다. 그렇게 하면 호텔을 검색하면서 주변 지리에도 밝아지고 미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도착해서 헤매는 일이 적어진다.


이번 출장에서 4박 5일간 묵을 숙소는 시나가와 구 신반바에 위치한 '슈퍼호텔(Super Hotel)'이다. 호텔 이름도 짧고 발음도 쉬운데 왜인지 택시 기사에게 설명하는데 진땀을 뺐다. '슈-빠 호테루'라고 나름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여러 번 해봐도 갸우뚱하시는데 하는 수 없이 스마트폰으로 호텔 주소를 보여드렸다.


슈퍼호텔의 입구,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깔끔하다


하네다 공항에서 시나가와의 호텔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며 손에 쥔 영수증에는 4,800엔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국 돈으로 5만 원 가까운 금액이니 집에서 대학로를 왕복하고도 남을 돈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학생 시절부터 버릇이 되어버린 헝그리 여행자 정신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공항에서 내리면 당연히 제일 싼 지하철이나 공항철도부터 찾아야 맞을 것 같은데 너무 쉽게 택시를 타고, 너무 쉽게 숙소에 도착해버리니 뭔가 쓸데없는 죄책감도 드는 것 같고 기분이 이상하다. 그래도 지금은 출장으로 온 것이니 개의치 않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 되겠지.


체크인하기 전 담아본 호텔의 전경
채 2,400이 안되어 보이는 낮은 층고의 복도를 지나면...
... 전형적인 일본 사이즈의 작은 방이 나온다. 책상에 올려진 MDF 박스가 모형이다.
그래도 비즈니스호텔치곤 있을 건 다 있었던 편리한 곳으로 기억된다
아침 식사를 하는 공간, 저 테이블 폭도 채 400이 안되었던 것 같다. 과연 일본의 스케일감이란!
나름 기본을 갖춘 아침식사, 하루를 시작하기에 모자람 없는 식단이다


피곤하면 하루쯤 숙소 밖으로 안 나가도 되는 배낭여행과는 달리, 출장에서 숙소는 전체 일정의 컨디션과 업무 효율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조건이다. 그래서 숙소를 고르는 일은 현지에서 일을 하는 그 자체보다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번 호텔 선택은 탁월했다. 공항에서 가까운 건 물론이고 전시를 설치해야 하는 하라미술관과도 걸어서 불과 5분 거리였다. 게다가 고급 주택가와 비즈니스 빌딩들만 가득한 시나가와 구의 특성상 호텔 앞은 적당한 편의시설 빼고는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실제로 이 슈퍼호텔은 외국이나 지방에서 출장을 오는 양복 입은 회사원들이 업무 목적으로 짧게 묵어가는 전형적인 비즈니스호텔이다. 체크인이 늦은 탓에 흡연실을 받아 4일 내내 옷에서 담배냄새를 풍겼던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최적의 숙소였다.


대욕장이 있다?!
게다가 외기가 들어오는 노천탕이라니, 초럭키다!


게다가 이 호텔에는 무려 온천이 있다! 사실 근처 동급의 다른 호텔들을 제치고 이 곳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온천이었다. 탕은 성인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작은 규모지만 바깥바람마저 들어오는 '진짜 온천'이었다. 머무는 5일 내내 아침저녁으로 온천을 즐겼다. 하루 종일 답사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어 돌아와도 온천욕 한 번이면 말 그대로 씻은 듯 좋아졌다. 출장족의 니즈를 정확하게 간파해낸 호텔의 센스에 박수를 보낸다.


황량할 정도로 한산했던 호텔 앞 거리
편의점 하나 없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라멘집
밥때를 훨씬 넘긴 시간에도 저리 만석인걸 보니 믿음이 간다


그렇게 도착한 첫날밤이 저물어 갔다. 당장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가져온 모형을 미술관으로 옮기고 설치 감독을 할 예정이니 오늘 밤이 마지막 여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조바심이 났다. 늦은 저녁 겸 간단하게 한잔 하고 싶어서 무작정 호텔 앞 거리로 나왔는데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쓸쓸한 풍경이다.


빗방울에 날은 점점 더 추워지고 배는 고파오는데...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무렵 라멘집을 하나 찾았다. 양복 입은 아저씨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먹는 풍경을 보니 다들 늦은 퇴근하고 허기를 달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도 들어가 돈코츠 라멘과 나마비루(생맥주)를 시켰다.


이번 출장의 첫 끼니는 살얼음 얹어 나오는 시원한 생맥주!
돈코츠와 소유의 모호한 경계 즈음 걸쳐있는 라멘이었다
맛의 유무와는 별개로, 모름지기 음식을 남기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대단한 맛집은 아니었어도 외로운 출장객의 한 끼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한 한 그릇이었다. 배는 불렀지만 취기가 살짝 올라오니 뭘 더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마트에 들러 이런저런 주전부리를 샀다. 출장기간 내내 조금씩 나누어 먹을 요량이라 한 봉지 가득 담았다. 비행기 타고 오느라 수고한 모형을 책상 위에 가지런하게 정리해두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짧은 출장이지만 전시 건 외에도 담당하는 다른 프로젝트 관련하여 답사가 일정에 잡혀있어 마음이 계속 바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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