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기된 얼굴로 급하게 음식점을 뛰쳐나왔다. 파르르 떨고 있는 오른손을 요동치는 왼쪽 가슴에 얹고는 방향을 잃은 시선과 함께 걸음걸이는 더욱 빨라졌다. 조금 전까지 배가 많이 고팠지만 배고픔은 이내 곧 사라졌고, 명치와 가슴 한쪽이 꽉 막히는 느낌과 함께 촉촉해진 눈가에 눈물이 금방 고였다. 한참을 걷다가 인적이 드문 공원의 벤치에 앉아 울먹거리며 혼잣말을 연신 내뱉었다.
“이 병신아! 나가 죽어라! 왜 사냐?”......
진정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숨은 더욱 가빠지고 정신은 몽롱해졌다. 상기된 얼굴은 30분이 넘도록 오른 화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땅이 꺼져라 고개를 숙이다가 멈추지 않는 눈물을 멈추고 싶어서 하늘로 고개를 치켜드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겐 일행도 없었고 그저 혼자 조용히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 싶었을 뿐이었다. “짜장면”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너무나 쪽팔리고 부끄러운 마음에 음식점을 급하게 뛰쳐나왔다.
비참한 나의 모습
아주 오래전 일이다. 어린 시절 어느 순간 마음속에 자라난 불편한 나무 한 그루가 평생을 함께 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티가 날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언어장애`는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치욕적인 나의 어두운 다른 모습이다. 그 잔재를 여전히 조금은 갖고 살아가기에 나만의 작은 습관이 생겼다. 가끔 말이 안 나오거나 막히면 하고 싶은 말이나 표현을 못 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아주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누구도 이런 나의 내적 고통은 절대 알리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나만이 갖고 있는 두려움이 지금은 예전보다 아주 많이 사라졌지만 그 별것도 아닌 마음의 두려움으로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굳이 나의 단점들을 잘 풀리지 않았던 삶의 곳곳에 빗대어 핑계로 넣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절대 깨부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만든 나만의 철창 안에서 실패는 그냥 당연한 일상이었던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학창 시절은 내 기억에 없었다. 자의적인 외톨이였었다. 이런 나를 낳아준 부모님을 원망했었고 세상과 삶은 두렵고 무서운 어둠뿐이었다. 충분히 공부를 할 수도 있었지만 희망 같은 건 애초에 없었기에 공부를 잘해서 성장하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감옥 같은 학교가 싫었고 맨날 뭐가 그리 좋은지 친구들의 웃음소리도 거슬릴 뿐이었다. 멍 때리는 게 일상이었고 주로 혼자 할 수 있는 일에 빠졌었다. 음악을 듣거나 그림과 낙서로 매일을 보냈다. 최대한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말하는 것을 피하는 삶으로 10대를 보냈다. 그냥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무언가가 조금은 나아질 거라 생각했었다. 아니, 실은 구체적으로 생각해둔 게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언어치료 학원`을 다닐 생각으로 돈을 모으고 있었다. 나 자신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한 지옥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너무나 간절한 생각은 가끔 꿈으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그 누구를 만나도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걸고 대화를 리드해 나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꿈에서 깨고 나면 여전히 슬픔이 한가득인 거울에 비친 현실의 비참한 모습뿐이었다.
내가 두렵거나 무서워하는 것들을 절대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나 강했다. 늘 무언가를 꽉 움켜쥐고 었었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만 보는 것 같았다. 실수로 인한 쪽팔림은 죽기보다 싫을 정도로 비참해서 매 순간의 삶을 리셋(reset)하며 살았던 것 같았다. 일도, 사람도, 환경도,... 어쩌면 그 마음이 나 자신을 리셋(reset)하고픈 마음이었나 보다. 정말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아니,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타다 남은 재처럼 미세한 온기가 아직도 어딘가에서 나와 함께 살아간다.
끝없이 누르고 싶었던 버튼
20대가 되자마자 집을 나왔다. `출가`가 아닌 `가출`이었다. 편지만 한 장 써놓고 그냥 집을 나왔다. 걱정하실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었다. 병신 같은 나 스스로를 치료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은 돈으로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학원을 알아보았다. 지방에 있었고, 두어 달을 합숙하며 지내는 곳이었다. 새롭게 태어날 아름다운 나를 상상하며 `언어 치료원`에 입소했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퇴소한 나는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 하나를 깨달았다. 나의 병은 정신과 육체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이었다. 또다시 한참을 고민에 휩싸였다. 마음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최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먼 미래를 생각하는 것보다 평온하고 자유로운 오늘을 살았다. 늘 마음 졸이며 지켜만 봐주시던 부모님께는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다 분리되었었던 꿈 많은 영혼은 늘 두려움에 둘러 쌓여 청춘을 보냈었다. 걱정 없이 느긋하게 원하는 현실을 살았지만 나 자신을 부정하고픈 순간들의 연속이었을 뿐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이기려 근심 걱정이 없는 원하는 삶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때론 원치 않는 환경의 시간과 공간으로도 들어가야 했다. 무언가로 표현할 수 없었던 고통이 아무리 나 자신을 감싸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미소를 건네려 노력하면서 말이다. 나는 가족과, 그들과,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그럴수록 메말라가는 정신이 쉴 곳은 점점 없었지만 말이다. 그저 유일한 휴식은 최대한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그런 휴식조차 없었으면 나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누군가에게 들켜버릴 것 같았다. 그런 비참한 눈물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쉴 곳을 찾고 싶었다
누구를 원망할 것이며, 무엇을 탓할 것이며, 나란 무엇인가를 아무리 생각해봤자 쓸데없는 시간낭비였다. 고통은 고통만을 낳을 뿐 절대 원하는 평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정면으로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한 회사에 들어갔다. 내가 할 업무는 아주 간단했다. 전화를 걸고 A4용지에 쓰여 있는 것을 읽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겐 지옥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일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기억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있다. 당시에는 컴퓨터나 헤드셋은 고사하고 수화기에 줄이 달린 전화기와 멘트가 적힌 종이만이 놓여있었다. 첫날이라는 핑계로 전화를 걸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루 종일 앉아서 종이 한 장에 적힌 글을 읽고 있는 나는 그냥 심장만 뛰고, 숨만 쉬고 있는 좀비 같았다. 다음날 출근을 하여 본격적인 업무를 위해 전화를 걸기 시작했지만, “안녕하세요”를 시작으로 첫 줄을 넘기지 못하고 입에서 말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동료들과 상사가 “처음이라 괜찮다”는 응원과 위로를 해주었지만, 처음이라서 그런 게 아닌 나의 입장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겨내고픈 일과의 싸움이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긴 하루를 보냈었다. 마음은 이미 접었지만 포기하면 계속 질 것만 같아서 용기를 내어 하루를 더 회사에 나갔다. 그러나 출근하고 자리에 앉자 놓인 전화기를 보자마자 멀미가 나는 듯이 속이 메슥거렸고 헛구역질이 올라와 그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곤 화장실에서 입을 틀어막고 근 삼십 분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화기는 두려운 물건이었다
시간은 흘렀다. 평생 잘라버릴 수 없고 최대한 멀게만 밀어내야 하는 나의 말 못 할 병은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맞이한 30대의 끝자락에 좋은 운이 따라주었는지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아는 대기업(S)의 자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합격소식도 믿기지가 않았고 가족과 지인들의 끝없는 축하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두 달 후 출근하라는 출근 날짜를 받았을 땐 너무나 울컥한 나머지 몇 날 며칠을 설렘에 잠을 못 이뤘다. 모든 게 어마어마하게 낯설었지만 참고, 이겨내고, 견디자.라는 생각과 마음을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했다. 대기업답게(?) 교육기간도 거의 한 달 정도였다. 배우고, 익히고, 수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열심히 쌓으며 정말 열정을 다해 회사를 다녔다. 그리곤 한 달이 조금 넘어서 인원이 결여된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전달받고 인지하기 전까진 두 눈에선 빛이 났으며 결의에 찬 마음은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삶은 해가 뜨면 밤이 찾아오고, 기쁨 뒤엔 슬픔이 있는 굴곡의 곡선인 것을 늘 알고 있고 인지하고 있지만, 부정의 안 좋은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너무나 고달픈 현실이다. 결국에 배정된 부서는 몇 가지를 복합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하루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 전화를 걸고 받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심장이 멎는 듯 충격을 받았고 머릿속은 하얘졌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태연한 미소를 머금고 두려운 출근길과, 괴로운 회사생활과, 침울하고 우울한 퇴근으로 이루어진 날들이 쌓여 몇 달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모든 이들의 기대와 실망이 송두리째 뽑힌 수십 개의 나무로 온몸을 휘둘려 맞는 고통을 상상하며 7개월 만에 스스로 퇴사를 했다.
천국이라고 생각했던 곳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조마조마했던 첫 번째 순간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반복되는 실패로 두려움은 쌓여갔지만 어느덧 쌓인 것들이 단단해지니 그냥 일상이 되었다. 그리고 끔찍했던 시간을 여럿 해 보내고 나니 실패는 독이 아닌 약이었다.두려움과 실패가 없다면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 원치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보냈구나`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어차피 그런 시간들은 죽기 전까지 수도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을 반드시 보내야만 원하는 사랑과 행복을 가질 수 있고 곁에 둘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