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꿈이 뭐였어?”
첫째의 질문에 아주 오래된 기억의 서랍이 열렸다.
“고아원 원장”
“그런데 왜 작가가 됐어?”
“어쩌다 보니까”
초등학교 때 자신의 꿈을 그리는 시간이 있었는데 고아원 원장이 된 나를 그린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주위에 고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이타심이 많은 편도 아니다. 나름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교회에서 고아원 봉사를 갔던 게 전부다. 그런데 나는 왜 고아원 원장을 그렸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착하게 보이고 싶었다. 그 과제를 보고 평가할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말이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예뻤던 것도 아니고 집안이 빵빵 것도 아닌 나는 ‘착함’으로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선행을 세뇌받은 것이 한몫했다. 하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착함과 거리가 있다. 언니에게 양보하거나 지는 것을 싫어했고, 오빠가 받는 특혜에 문제제기를 하며 끊임없이 내 몫을 요구했고,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도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런 나와 고아원 원장이라는 꿈은 어울리지 않다 못해 사이즈조차 맞지 않다. 안된 게 천만다행이다.
사춘기가 되면서 내 꿈은 솔직해졌다.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못 배운 게 한(恨)인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녀들을 대구로 조기 유학을 보냈고 내 나이 10살 때부터 자취생활이 시작됐다. 부모님과 분리된 삶은 결핍 그 자체였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쯤 자취집에 와서 돌봐줄 뿐 끼니부터 공부까지 모든 것이 10살짜리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공부로는 출세를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 풍족하게 살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고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도시락을 싸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싸간 도시락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그마저 못 가져간 날이 많아서 점심시간은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도시락 해방과 함께 대학생이 되고 또 좋았던 것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조그마한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내 꿈은 분위기 좋은 곳에 카페를 차리는 거였다.
졸업을 앞두고는 학원에서 국어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수입이 꽤 짭짤했다. 하지만 딱 한 달을 하고 깨달았다. 난 교사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반마다 들어가서 똑같은 걸 가르쳐야 하는 게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작가가 되어서는 매일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 게 곤혹스럽지만 말이다. 같은 걸 반복하는 노동보다 매일 다른 것을 해야 하는 노동이 고통스럽지만 그 재미는 비할 바가 못된다.
내 나이 마흔, 인생의 반쯤 달려온 나는 어떤 꿈을 꿔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차에 질문 공주 첫째 딸이 좀 더 재미있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다시 직업을 가지라면 작가 말고 어떤 걸 하고 싶어?”
“글쎄... ”
한참 동안 답을 주지 못했다. 다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주위에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사람들의 직업을 떠올렸지만 다들 나름의 고충이 보여서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 딸이 대답을 재촉해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직업을 말했다.
“한의사”
“왜?”
“아픈 사람의 마음과 몸을 고쳐줄 수 있으니까”
전문성을 가지고 적지 않은 돈을 벌며 다른 사람의 건강한 삶을 도울 수 있는 인생이란 참으로 멋질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들도 꽤 근사하다. 지금 내 꿈은 방송 일과 일상을 균형 있게 병행하며 건강한 삶을 사는 거다. 일을 하며 적당한 돈을 벌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취미 생활을 하며 짬짬이 글을 쓰는 삶. 이게 마흔의 내 꿈이다. 이 정도도 충분히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