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하듯 살다가
여러 사람과 수업을 같이 듣는 건 대학 졸업하고 처음이라 설레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다. 교실에는 열다섯 명 정도 되는 수강생들이 띄엄띄엄 앉아있다. 나는 너무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곳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대충 둘러보니 내 나이가 앞에서 네다섯 번째는 될듯했다. 책 읽는 수업인데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펜을 꺼내고 의자를 당겼다. 앞으로 일 년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될 사람들이다. 첫 시간에 소개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에이 모르겠다, 생각나는 대로 해야지' 하며 머리를 텅 비워버렸다.
강사님이 들어오셔서 개략적인 수업내용을 말씀해 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 심리와 관련된 책을 읽고 리포트를 제출하고 발표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열등감, 자존감, 내면 아이, 용서, 애도, 죽음 등을 주제로 쓰인 책을 선택하고 자신의 심리를 살펴본 다음 감상평을 써내는 것이다. 어려울 것 없다고 생각했다. 책 읽는 것은 좋아하는 일이고 글쓰기도 예전에 좋아했던 일이다. 다만 발표하는 것은 아주 오랜만인 데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꺼낸다는 게 쉽지는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 한번 해보는 거다. 새로운 걸 하는 게 오랜만이라 지금은 설렘이 더 크니까.
앞사람의 소개가 끝나 가는데 머리가 하얗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이름, 직업, 나이. 이것 말고 또 무엇으로 나를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한차례 박수가 끝나고 다들 나를 바라본다. 사실 어제저녁에 소개말을 생각해보긴 했었다. 일분 정도에 끝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외울까도 했는데, 그런 내가 딱 싫어졌다. 뭐든 미리 준비해서 어느 정도 완성도를 만드는 것,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스타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소개를 어찌할지 생각을 안 하고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더듬거리는 제 모습을 보고 싶었고, 준비 안 된 상태로 두고 싶었습니다......”
이런 말로 시작했던 것 같다. 모두의 소개가 끝나고, 강사님은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이 수업을 해나가는데 좋은 태도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모르게 내가 필요한 것을 느끼고 있었구나 싶었다. 2017년 3월 독서심리 상담수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주 책 한 권을 읽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직장에서 한창 일이 많은 시기였고, 퇴근 후에는 녹초가 되어 체력 충전하기에 급급했다. 겨우겨우 읽었다 해도 감정을 정리해서 쓰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돌아봐야 하는데, 그것은 내가 제일 회피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첫 리포트는 폰트 15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A4 용지 한 바닥을 다 채우지 못했다.
첫 발표날이 되었다. 수강생들은 각자의 리포트를 참여자들에게 한 부 씩 나눠준 뒤 조용히 수업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처음 지목된 사람은 앞자리에 앉은 30대 여자분이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열 장 넘게 써온 글. 그리고 조용히 읽어 내려가지만 첫 만남에 감당하기 힘든 진솔한 자기 고백. 나를 포함한 다른 수강생들은 침묵으로 놀라움을 견뎌내야 했다. 강사님도 그 긴 글을 다 쏟아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배려해주셨다. 돌아보면 그 발표자분은 그때 목까지 찬 감정들을 밀어내고 있지 않았나 싶다.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고 참가자들의 마음이, 적어도 나 자신은, 이제 가릴 것 없이 솔직해지고 싶다는 자세로 바뀌고 있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고 써온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이건 뭘까? 참 빈약한 내용이었는데, 이미 써와서 다 아는 내용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읽으면서 위로받고 있었다. 내가 나를 토닥이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찾던 게 겨우 이거였나?
내 목소리로 내 생각을 말하는 걸 듣는 것. 또는 들어주는 것.
인생의 어느 지점부터였을까. 열심히 살고는 있는데, 별문제도 없는데 갈수록 마음이 헝클어져만 갔다. 지금 같은 생활패턴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어 찾았던 이 수업에서 나는, 나를 그토록 기다리던 나를, 비스듬히 바라보던 나를, 드디어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