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숙제하듯 살다가

by 다시 봄

카페 창밖으로 해가 진다. 앉은자리 앞쪽에서부터 붉은색이 밀려온다. 테이블에 하트 모양이 띄워진 카페라테 한잔이 놓였다. 다 식어버리기 전에 한 모금 마셔본다. 뒷자리에 세 명, 맞은편에 두 명, 그리고 나. 카페 안은 한산 하다.


a가 연락이 온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점심 후 노곤해지는 시간, 보통은 두 번째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막내 직원이 올린 보고서를 보다가 열이 오르고 있었다. 행사 일정을 잡을 때 관리자의 스케줄 확인은 필수이고, 협조 부서와 시간 조율을 사전에 해야 한다고 말한 기억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일정이 겹친 행사 계획서를 결재문서로 올려놓은 것이다.


“일정 확인은 중요하다고 전에도 말했었는데, 내일 오전 10시에 회의 잡혀 있는 거 알죠? 확인했어요?”

“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감정을 누르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표정은 굳어 있었을 것이다. 왜 항상 진지해지는지 모르겠다. 일정 다시 확인하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었는데. 자책하는 마음이 뒤늦게 몰려들면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때 a가 보낸 메시지 창이 깜빡거렸다.


“오늘 저녁 시간 괜찮아?”

a는 회사 동료로 만나 여행도 같이 다닐 만큼 가까운 사이다. 평일 저녁에 만나자고 한 건 그날 하루를 넘기지 못할 만큼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겠지. 짐작만 하고 퇴근 후 바로 이곳으로 와 자리를 잡았다. 골목골목 카페가 들어서고 있지만, 이곳은 넓은 공간에 비해 사람이 많지 않아 자주 찾는다.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클래식을 듣고 있으려니 낮 동안 긴장했던 마음이 어느새 풀어졌고 여행지에서 한잔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사실 친구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하루 동안 소화되지 않은 내 감정 정리도 하고 싶었다. 막내 직원에게 업무에 소홀하지 말라는 이유로 같은 말을 여러 번 한 것도 걸렸고 다른 부서 담당자와 협의할 문제가 있어 통화하다가, 날을 세우고 뾰족한 말을 내뱉은 것도 불편했다. 조직에서 항상 발생하는 문제들. 너와 나의 업무가 아닌 경계에 있는 일을 분명하게 해야 할 때 발생하는 갈등, 오랫동안 쌓인 경력에서 나오는 단호한 지적 투의 말들,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기 전에 밀쳐내는 태도. 그런 상황을 만날 때마다 다들 자기 방어에 충실한 거라고,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처는 매번 생겼고 결전의 자세로 말하다 보면 피곤함은 쌓이게 마련이었다.


난 원래 이런 사람 아닌데.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늦게 적응해갔다. 오래된 조직은 견고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고 틀을 벗어나는 행동은 실수이자 지적 대상이었다. 이해해주는 사람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 룰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선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 틀에 몸과 생각과 말을 맞추며 살다 보니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실수는 줄었고 인정도 받았다. 나도 이제 하나의 룰이 되어 튀어나온 말과 행동을 보면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관리자가 된 것이다.


a가 들어온다. 화장이 지워져 있다. 오늘 발랐던 립스틱 색깔이 뭐였을까. 가방이 없는 걸 보면 또 사무실로 들어갈 모양이다.

“왜 또 들어가게?”

“그래야지. 정리할 게 조금 남아서.”

사무실 분위기, 같은 팀 사람들, 연금 수령 시기, 복권, 휴가 계획, 주말에 본 드라마 이야기까지. 우리가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항상 이 테두리 안이다.


“나 저번에 화장대 앞에서 화장하다 울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내가 한마디 툭 던졌다.

“왜?” 친구가 묻는다.


그 저번은 작년 여름 이야기다. 이웃 블로그에서 자기 위로에 관련한 글을 읽다가 ‘나는 나를 받아들입니’란 말을 세 번 해보란 걸 따라 했을 뿐이었다. 눈 화장 마무리를 하면서 거울을 보다가 갑자기 그 문장이 생각나서 말로 뱉어본 것인데, 세 번째에서 뜻밖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건 또 어디서 막혀있었던 감정일까. 마흔 중반이 넘은 나이에 이 정도 말에 울컥할 일은 아니지 않나. ‘어느 시절의 내’가 말을 거는 것일까. 받아들이고 싶은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외면했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 기준은 왜 생겼고 누가 만들었던 것일까. 이렇게 스스로 말해주면 되었던 것을. 인정하면 그냥 나일뿐인데. 화장을 다시 해야 했다. 서둘러야 출근 시간을 맞출 수 있으니까.


“‘나를 받아들입니다’란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더라. 난 쉽게 적응 못하는 사람 같아 힘들었는데, 꽤 잘 견디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지금 힘든 것도 지나가겠지?”

“그럼. 너 잘하고 있어. 버티는 것도 능력이야.”

“그런가?”

a는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쓱쓱 바른다.


a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바깥은 이제 완연히 어두워졌다. 미지근하던 카페라테도 바닥이 보인다. 잔을 비우고 가방을 멘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간다. 문득 돌아본 카페 불빛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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