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이 씻어볼까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08년

by 루시

어린 시절의 목욕이란 누구나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 마련이다. 애기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해서 스스로 몸을 씻는 행위를 완성하기까지는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부터는 스스로 목욕하는 연습을 시작해서 고학년 정도 되면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본적으로 ‘물’이라는 것은 ‘장난’ 치기 상당히 좋은 대상이다. 엄마 뱃속의 양수에서 놀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물’과 친해지게 만드는 걸까? 수면을 그냥 치는 것도 재미있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액체이기에 여기에도 담아보고 두 손에 가둬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행동을 하다 보면 시간은 어느덧 훌쩍 흘러있기 십상이다. 손바닥이 노인의 손처럼 쪼글쪼글해져 스스로 놀랐던 기억이 난다.

IMG_9031.JPG 벳푸 지옥온천 순례 도중 만난 족욕탕. 담그자마자 피로가 '확' 풀린 마법.

거기에 더해져 예전에는 ‘목욕탕’이 상당히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목욕탕에 가서 ‘때’를 미는 것이 마치 주간행사처럼 자리를 잡았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목욕탕은 그야말로 놀이동산이었다. 탕에서 놀고 친구랑 장난치고 있노라면 (나는 힘 하나 안 들이고) 엄마가 씻겨준다. 한두 시간 목욕탕에 가는 것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서서히 크면 동행자가 더 이상 부모님이 아닌 친구로 바뀐다. 친구와 약속을 하고 서로 등을 밀어주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샤워가 보편화되면서 목욕탕을 더 이상은 가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목욕탕이 주는 따뜻하고 편안한 그 분위기를 모두가 본체만체하게 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찜질방’이 생겼다.

찜질방은 목욕탕과는 또 다른 차원의 유희를 선사했다. 찜질방 유니폼을 입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두운 ‘막’에 들어가는 것도, 절절 끓어오르는 바닥에 몸을 부려 누워서 쉬는 것도 목욕탕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 국민의 놀이터로 급부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식혜 한 잔과 삶은 달걀이 주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찜질방의 매력에 상당히 늦게 입문했다. 선천적으로 더운 것을 싫어해서 사실 찜질방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도, 친구들이 가자고 해도 시큰둥, 호응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역시 나이가 들었다고 해야겠죠?) 여성전용 찜질방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중독’이 되었다.

인간의 몸은 항상 일정한 온도, 즉 36.5도라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을 한다고 한다. 쉽게 찜질방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무엇인가 연료를 태워서 찜질방이 높은 온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몸도 내부에서 같은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높은 온도의 ‘막’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더 이상은 그 중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자동으로 알아차리고는 ‘relax’에 들어간다고 한다. 오오 그래서 그렇게 막에 들어가면 온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휴식하는 기분이 들었던 거로구나. 역시.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찜질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막’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하지만 작년에 발생한 코로나로 이 일상의 즐거움이, 한 달에 한 번 호사처럼 누리던 기쁨이 차단당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마스크를 쓰고 막에 들어가고 싶지만 현실과 마음은 다른 법이다. 특히 겨울철, 비 오는 날, 구름이 잔뜩 낀 날이면 ‘막’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구친다.

96-016034.jpg?type=m2000_2000_fst_n&wm=Y

그러다가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의 커다란 등짝을 보게 되었다. 그녀가 마치 친구라도 된 것처럼 등을 반갑게 한 대 ‘찰싹’ 치면서 알은체를 하고 싶어 졌다. 특히 그녀가 현실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피부가 좋고 살결이 흰 것은 인정하나 그녀는 우리 머릿속의 이상화되어 있는 육체미를 뽐내고 있지 않다. 허리도 일반인처럼 긴 것 같고 살집도 (런웨이의 모델과 달리)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몸매 비율도 그렇지 않나요? 아랫배도 살짝 귀염성 있게 솟아 있을 것만 같은 그녀는 그래서 친근감을 준다. 물론 외로 돌린 고개 아래로는 왠지 상당히 미인형의 이목구비를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녀에게 나의 친구와 같은 친근감을 느낀다.

“진아야, 너도 세신 하러 왔구나!”

20150922_141226.jpg 폼페이 유적의 공동 목욕장 내부. 벽의 사각형 구멍은 개인 물건(수건 등)을 놓는 곳이었데요.

목욕탕이나 사우나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미 로마는 기원전부터 도시를 세우면 목욕탕도 도시 기반시설의 하나로 상당한 심혈을 기울여 건설해놓았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시설이 그때부터 있었다고 하니까 역시 로마인들은 ‘뭘 좀 아는’ 민족이었던 것 같다. 그밖에도 우리처럼 사교활동도 그곳에서 했다고 한다. 체력을 단련하고 담소를 나누고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하려니 당연히 목욕탕의 규모는 대극장 정도의 크기는 아닐 지라도 상당한 규모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유럽 전역에 펼쳐져 있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가본 적이 있는 분들은 이 부분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슬람을 만나면서 한 번 더 점핑을 하게 된다. 터키탕이라는 말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실 것이고 터키 여행을 하면서 한 번은 터키탕에서 목욕을 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프랑스도 목욕문화가 발달했나 보다. 여인이 앉아 있는 곳의 분위기는 정갈하면서도 부드럽다.

좌측 초록색 커튼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이 나른하게 여인이 있는 하얀 침대 위로 떨어진다. 여인의 백옥 같은 피부는(진짜 잡티 하나 없는 것이 현실감은 떨어지네요.) 화면의 중앙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보통 여인의 등짝 같은 사이즈가 푸근함을 배가시킨다. 여인 역시 우리처럼 수건으로 머리를 올렸다. 우리가 흔히 하는 양모양은 아니지만 이슬람의 터번 같은 느낌을 주는 수건은 화면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담당하고 있다. 이제 담당 세신사(?)가 들어오고 그녀는 침대에 한없이 편한 포즈로 누워 몸을 맡길 것이다. 때를 밀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드러운 마사지와 비누칠을 경험하는 시간은 여인에게 그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정화’의 시간일 것이다.

화면 왼쪽 하단에 보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있다. 곧 ‘정화’ 의식이 시작될 것이다. 여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빨간색 슬리퍼는 살짝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자세히 보니 침대보의 하단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자수가 있군요.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 무늬는 아닙니다만. 침대보뿐만 아니라 좌측의 초록색 커튼의 하단에도 컬러풀한 패턴이 새겨져 있다. 이런 디테일이 좋다. 천의 주름, 여인의 엉덩이 아래 폭신하게 들어간 침대의 표현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IMG_5719.JPG 신트라 페냐 성의 욕실. 상당히 공들인 흔적이 엿보인다.

나도 가고 싶다. 저렇게 온화한 빛과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싸는 곳에……

목욕을 할 때, 샤워를 할 때 우리는 기대한다. 좀 개운한 느낌을 갖고 싶다고. 세상의 때를 씻고 싶다고. 피로를 흘려보내고 싶다고.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아니 신산한 인생의 한가운데에서 따뜻하고 온난한 공기에 몸을 맡기고 쉬고 싶은 생각은 나에게 너무 간절하다.

그런데 코로나로 그 휴식이 막혀버렸다. 그 정화의 시간이 정지당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이런 ‘정화’의 시간을 다시 갖고 싶다고 바라고 있다. 앵그르 그림 속의 그녀처럼 나도 터번을 두르고 곧 다가올 세신사의 손에 온몸을 맡기고 한없이 게으르게 널브러지고 싶다.(이건 다른 얘긴데 ‘세신’에 대해서도 탐탁지 않았던 나는 지인의 권유로 비교적 최근에 ‘세신’을 체험하게 되었는데 모두에게 한 번은 체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뭐랄까 정말 몸이 ‘한 꺼풀 벗은’ 날아갈 듯 가벼워진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의 등짝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가 저 온화한 욕실의 공기 속으로 들어갈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