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질문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당시엔 한 반에 50명 남짓되는 친구들이 수업을 들었다. 짝꿍이 있었고 교실은 학생들로 빼곡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 중 가장 두려운 질문이 있었다.
어디 한번 발표해 볼 사람?
48명의 친구는 고개를 숙였고 두어 명 정도의 친구만 선생님을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발표를 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 이이었다. 나는 46명에 속했다. 누군가 무언가를 물어보면 바로 대답할 수 없었고, 큰 소리로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큰 조용한 아이였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어디 한번 발표해 볼 사람?’이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역시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도 자진해서 발표하는 친구가 없어서인지 선생님은 나에게 발표를 해볼 것을 권유하셨다. 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그냥 서있기만 했다. 정적의 시간이 꽤 오래 흘렀다. 선생님께서 괜찮다며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당황함과 부끄러움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엎드려 울기 시작했는데 그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흐느꼈다.
대학생이 되자 발표를 하는 일은 더 많아졌다. 학기마다 조를 짜서 무언가를 토론하고 결과를 발표해야 했다. 발표할 사람을 정할 때에는 비록 나만 아니길.. 하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때도 여전히 나는 발표라는 게 두려웠다.
어른이 되어보니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누군가에게 내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갈등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늘 존재했던 나는, 내 의견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남의 의견을 듣고, 그 의견에 대부분 동조했다. 누군가의 의견에 반박하는 의견을 낸다는 것 자체가 갈등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내 의견을 말하지 않고, 남들의 의견을 들어주자. 이것 또한 나의 장점이 될 수 있겠지 생각하며 지내왔다. 여전히 나는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만 의견을 낸다. 그 외의 나머지의 것들엔 큰 의견이 없다. 점심 메뉴, 어디 갈지 정하는 것에 대한 의견은 상대방의 의견을 따른다. 그것들이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상대방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들에서는 반드시 내 생각을 말한다. 내 의견을 말하지 못했을 때는, 집에 돌아오는 내내 생각한다. 그때 그렇게 말할걸, 그때 그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는데. 라며 그 자리에서 똑바로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한 내 모습을 반성하고 후회한다. 그렇게 반성하고 후회한 나날들이 쌓여 나는 나만의 대나무숲을 만들어야 했다. 그중 하나가 글쓰기였다. 나처럼 순발력이 늦고 한마디 할 때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신중하게 말하는 사람은 모든 타이밍에 적절한 답을 할 수 없구나. 지나고 나면 그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후회를 하게 되는구나. 나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은 불혹이 가까워지는 최근에서이다. 흔들리지 않는 나이는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말은 한번 내뱉으면 되돌릴 수 없다. 글쓰기처럼 backspace를 누른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신중한 성격이 더 신중해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 와 같은 말 관련 속담은 있어도 글쓰기 관련 속담은 없는가 보다. 말보다 글쓰기가 더 편한 나는 어느 날은 말하는 시간보다 글 쓰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내 의견을 말하기보다 남의 의견을 먼저 들어주게 된 것은, 갈등을 피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갈등의 상황이 나에게 생기는 걸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갈등, 싸움, 다툼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데 나는 남들에 비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것, 다툼하는 것, 항의하는 것. 나에게 직접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갈등의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타인에 비해 크다는 것도 이 글을 쓰면서 한 번 더 인지하게 된다.
글쓰기는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나와 대화를 하면서 내 기분을 보살펴주고 보듬어 준다. 그때 그래서 힘들었구나. 그땐 그래서 속상했던 거구나. 누군가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으며 내가 스스로 내 감정을 보살펴준다. 나와 나누는 대화는 누군가 내 비밀을 털어놓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귀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종이와 펜 혹은 노트북 하나면 나는 내 안의 이야기를 얼마든지 터놓을 수 있다.
백지의 껌뻑이는 막대기가 있는 창이 막막하기도 하지만, 하나씩 채워질 때마다 나는 나를 점점 더 이해하게 된다. 매일 그런 삶을 살고 싶다. 나를 좀 더 이해하는 삶, 나를 이해함으로써 세상을 좀 더 이해하는 삶,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더 넓은 눈으로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새벽 3시 넘어 기상해서, 꾸역꾸역 자리에 앉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