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짜 보고 있을까?
헬렌켈러는 말했다. 자신이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사용학과를 만들겠다고 말이다. 헬렌켈러는 산에 다녀온 동료에게 물었다.
산에서 무엇을 보았니?
함께 다녀온 동료들은 산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우리가 본다는 것의 영어에는 WATCH가 있고 SEE가 있다. SEE가 정말 말 그대로 보는 것, 이라면 WATCH라는 단어에는 좀 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어있다. 관심, 사랑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제대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보는 것의 정의를 다시 내려본다. 어떤 대상을 사랑을 갖고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본다의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제대로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잘 보아야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봐야만 대상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관심이 생겨야 비로소 그 대상에 어떤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사랑, 감사함, 미움, 증오 꼭 긍정의 감정이 아닐지라도 어떠한 감정이든 내 마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감정이 생긴 후에는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진다. 누군가는 말로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글로 이야기한다. 각자 이야기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사회적으로 관계를 맺어나간다.
바쁜 와중에 주위를 둘러본다. 어느새 계절에 맞는 꽃들이 피어있다. 봄을 알리는 꽃, 지저귀는 새소리, 높은 하늘, 모든 것이 새록 새록새록하다.
내가 가장 보는 것을 즐겨하던 시기가 있다. 바로 아이들이 어렸을 때이다. 동작 하나, 표정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는 것 마저 아쉽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아이들 모습은 10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특히 첫 아이의 기억은 눈을 감으면 그대로 그려진다. 한 사람의 에너지가 100이라면 100을 아이에게 쏟았던 시기다. 낑낑대며 연습해서 성공한 뒤집기, 그리고 취한 비행기 자세는 나를 웃게 했다. 어느 순간은 앉기 시작했고, 책장을 잡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잡지 않고 걷는 순간이 왔고, 그 순간부터는 매일 나가자고 신발장에 신발을 집어 들었다. 뛰기 시작했을 때는 넘어질세라 같이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했다. 말이 늦은 편이라 걱정을 했는데 말이 늦은 게 아니라 말수가 없는 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신 글자를 정말 빨리 읽었는데 18개월부터 글자 모양을 외워서 말했다. 곰, 문부터 시작해서는 글씨를 정말 빨리 읽었다. 누워만 있던 아기가 걷고 서고 뛰고 하는 과정을 보면서 세상 모든 아이는 천재가 아닐까 싶었다.
길게 뻗은 눈썹, 쌍꺼풀 없는 두툼한 눈꺼풀, 반곱슬의 머리칼, 머리카락과 접해있던 이마는 살짝 불룩했다. 아기띠를 한 내 품 안에서 눈을 감고 자는 아이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볼록했던 이마 부분을 살살 만지고 또 만졌다. 자세히 뜯어보고 또 보던 그런 시기이다. 그렇게 본 아이의 모습은 아직도 그림처럼 선명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고 아마 그 모습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것이 있다. 그냥 볼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자세히 보면 보인다. 그렇게 보다 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나태주 시인은 말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자세히 볼수록, 오래 볼수록 예뻐 보이는 건 나만 느껴본 경험은 아닌 것 같다.
4년의 육아휴직 기간이 끝났다.
그리고 복직한 후에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얼굴과 돈, 모니터였다. 매번 새로운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은 즐겁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기분 좋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은 나도 웃게 했으나, 화난 사람의 얼굴을 보는 일은 나도 화나게 했다. 감정이 없는 로봇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정말 그렇게 로봇처럼 되어야겠다. 결심을 했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도, 웃는 사람에게도, 내 감정은 배제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나였다. 상속 업무를 처리하러 온 분을 뵈며 같이 슬퍼했다. 예금 만기가 된 분을 보면 괜스레 내가 다 뿌듯했다. 누구보다 감정을 더 자주, 잘 느끼는 사람이 나였다.
두 번째로 많이 본 것은 돈이었다. 색깔에도 지위가 있었다. 노란색은 값진 돈, 하늘색은 덜 값진 돈. 금고 안 차곡히 쌓인 돈들에게도 서열이 있었다. 직장 내에서의 서열처럼, 오만 원권은 사장, 만 원권은 부장, 오천 원권은 과장, 천 원권은 대리, 동전들은 사원 느낌이었다. 매일 돈을 보다 보면 돈은 종이로 보인다. 실제로 돈은 종이이다. 이 종이를 얻고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사는지, 이 종이가 뭐길래.라는 생각을 한다. 돈은 종이이고 숫자였다. 예전엔 통장에 찍히는 돈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저 종이에 찍힌 잉크에 불과했다. 진짜 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모니터는 감정이 없었다. 내가 키면 켜지고, 끄면 꺼졌다. 숫자를 입력하면 입력되었고 계산을 요구하면 계산을 해주었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얼굴과 돈 모니터를 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나는 그냥 보지 않았다. 그냥 듣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분의 상황을 마음으로 느꼈다. 자식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부모의 심정, 하나밖에 없는 집을 사업 실패로 매도하게 된 상황,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마음. 수많은 사연을 보고 들었다. 그분들의 이야기는 나에겐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일부분이었다.
문득 생각해 본다. 내가 진짜 보고 싶은 건 뭐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 뭐지라는 말과 같았다. 잠자는 시간 외에 눈떠있는 시간 중 내가 가장 많이 보는 것이 무엇이면 좋을까. 내가 오래 보고 싶은 것을 더 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절로 좋아하는 것을 갖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책을 보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고 표현하지만 어쩔 땐 읽고, 어쩔 땐 본다. 눈으로 읽을 때도 있고, 마음으로 읽을 때도 있고, 머리로 읽을 때도 있다. 중요한 건 본다는 사실이다.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보려고 한다. 처음엔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유식해 보이고 있어 보이려고 책을 읽었다. 지금은 나를 위해 책을 본다. 내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해,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 읽는다.
그리고 내가 본 것들을 글로 쓴다. 출근길에 만난 풍경, 회사에서 느낀 생각, 집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 내가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눈으로 본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글로 이 순간을 저장해 둔다. 언제고 꺼내볼 수 있도록 저장해 두고 그때가 그리울 땐 글을 펼쳐본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나에게 행복한 시간이다. 나를 치유하고 보듬어 주는 시간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고 싶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채우고 싶다. 그 마음 하나로 오늘도 꾸준히 써내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