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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S 오픈 플레이스 Oct 24. 2021

오픈할 것인가, 쪼갤 것인가

오픈 플랜-브로큰 플랜


어디까지 열어 보일 것인가, 이 질문은 어느새 나에게도 찾아왔다.

우리 집에 기존의 주방과 방 두 개를 전부 허물면, 길이 8.5미터와 너비 3.5미터의 꽤 넓은 공간이 나오게 된다. 요즘 유행인 오픈 플랜 키친 하기 좋겠다는 권유를 많이 들은 참이었다.

무릇 새로 고친집이라면, 주로 집의 뒤쪽에 열린 주방과 식탁공간 두고, 아일랜드를 가운데 놓아,

정원이 내다보이는 바이폴드 도어를 열고 뒷마당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것이 모습이다.

그러나 청개구리같이, 나는 언젠가부터 키친과 식당 사이에 미닫이 문을 달아 '문을 닫고 싶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최근 기사에서 봤는데,  집 가격을 올리는 레노베이션 리스트에서 첫 번째가 뭔지 아세요? 다락방 증축? 아니요. 바로 '오픈 플랜 주방'이에요!" 한 친구가 말해주었다.


"미닫이 문을 왜 달아요?" 빌더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들이 어린데, 뭐하는지 계속 보려면, 주방이 오픈되어야 좋잖아요."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해요." 나는 솔직히 말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을 보고 나면, 저녁에 어디 문을 닫고 들어가고 싶거든요."

"나는 뭔지 알아." 열살 짜리 큰 아이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해리포터가 이모와 이모부 집에 살 때 방이 계단 아래 있는 창고였어. 나도 가끔 그런 방에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어.


처음 영국에 와 월세집을 구할 때 일이다.

이 작은 집에 왜 거실을 굳이 두 개로 나누어 놓은 것인지, 또 굳이 홀웨이를 따로 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그저 홀웨이와 방 두 개를 전부 뚫어놓으면, 훨씬 넓게 보일 텐데 말이다.

차차 여러 집을 경험하며, 비로소 이런 '구역 짓기'가 전통적이며 또한 일반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수가 아니라 방 개수로 구분하는 영국의 주생활 문화에서는,

1평짜리 창문 없는 방도 당당히 하나의 독립된 방으로 치며, 아무리 집이 작아도 복도도 꼭 필요한 독립공간으로 둔다. 전부 터서 쓰기보다, 작더라도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아, 방마다 이름 붙이고 목적을 두어 쓴다는 것이다. 바로 한걸음 떨어진 식사공간에서 식사를 하고서도 굳이 문을 닫고 들어와, 시팅 룸에서 벽난로를 피우고 책을 읽는다. 마치 서로 다른 세상인 것처럼 말이다.


수년 전, BBC의 인기 드라마였던 다운튼 아비(2010)의 에피소드에도 곳곳에 이런 문화가 배어있다.

가족끼리 저녁식사 전에 레스토랑에 가듯이 옷을 갈아입고, 서재에서 대기한다. 가족이 모두 모이면, 그제야 커다란 식탁이 놓인 다이닝룸으로 이동해서, 마주 앉아 집중해서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실컷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했으면서도, 식사를 마치면 굳이 "이제 '시팅 룸'으로 옮길까요? 한다.


거실은 '사회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삼삼오오 얘기를 하고, 피아노를 치거나 편지를 쓴다. 물론 키친은 아래층이거나,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래된 작품이지만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각색한 '오만과 편견'이라는 드라마(1995)에도 가족과 손님이 저녁마다 모이는 '시팅 룸'의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하는 가운데,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한 켠의 책상에서 편지를 쓰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누구에게 쓰느냐, 그 사람은 잘 지내냐, 하는 와중에도 적절히 대답해가며 꿋꿋이 편지쓰기를 계속한다.

이것이 무례하거나 훼방이 아닌 이유는, 그 방의 목적은 혼자 집중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꼭 귀족의 대저택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영국 주택에서도, 베드룸은 주로 침대와 베드사이드 테이블, 작은 장롱만이 있는 심플한 공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 그대로 '베드'를 위한 방인 것이다. 가족이 같이 쓰는 책상이나 책장은 보통 공동의 공간에 놓이는데, 이 공간도 하나로 넓게 쓰기보다, 두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는 경우가 많다. 다이닝룸(식당), 스너그, 시팅 룸, 가든 룸, 라이브러리 등 명칭도 다양하다.


그렇다면 가장 최근의 유행을 반영하는 신축단지는 어떻게 집 구조를 나누고 공간을 만들었을까?

마침 울버 코트 지역에 새로 들어온 약 200채의 주택단지의 고급 주택 모델하우스를 가보기로 했다.

이 집은 3 베드룸과 4 베드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각 집마다 다양한 크기로 지어지고 가격도 다양했다. 연못가에 뷰가 좋은 집의 경우 백만 파운드를 넘어서는, 옥스퍼드에서도 고급단지에 속하는 신축주택들이었다. "미리 알아보고 가야 할 거예요. 영국에서 모델하우스는 시공 전 보여주기 위한 모델이 아니라, 실제 집이에요. 그 집이 팔리면, 보여줄 집이 없어지는 거라서. 갔다가, 집이 팔려서 보여줄 수 없다고 허탕을 치기도 해요." 영국에서 신축단지는 한꺼번에 시공하고 분양하는 게 아니라, 몇 채씩 완성해서 건축허가를 받고, 완성된 실제 집을 보여주며 파는 시스템이다. 약속을 잡았다고 해도 그 집이 언제든 팔릴 수 있고, 본의 아니게 많은 경우 그저 이미지만을 보고도 집을 사는 '플렉스'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우리는 3 베드룸 하우스 중에서 가장 저렴한 집을 보고 싶다고 갔지만, 모델하우스 직원은 이미 다 팔리고 더 비싼 4 베드룸 하우스만 남아 있다고 했다. "가격이 차이가 나는데, 괜찮으신가요?" 직원은 친절하지만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기운을 끌어모아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인 시작 전, 직원은 미니어처 모델을 보여주며 이 주택부지의 역사를 설명했다.

"신축 주택인데도 부지의 역사를 설명하네. 영국스럽다." 남편이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직원의 말처럼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며, 단지 안에 클럽카가 다니는 이 집이, 얼마나 구조가 좋고, 얼마나 새로운 유행을 따라갔을지 기대감이 일렁였다.


하우스에 들어서자 넉넉한 홀웨이를 따라 자전거가 걸린 넓은 공간과 다용도실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의외의 공간이어서 "자전거요?" "더 큰 형태의 집에는 차고가 있고요, 조금 작은 사이즈에는 자전거 창고같이 쓸 수 있는 공간이죠." 유행에 걸맞게 감각적으로, 자전거를 허공에 매다는 장치가 되어있고, 한쪽은 스틸로 깔끔하게 선반을 짜 두었다.


상당히 넓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드디어 오픈-플랜 식당과 다이닝룸으로 안내를 받았다. 설레이며 들어서지, 길이 5미터와 너비 3미터의 공간에는, 화이트의 키친 캐비닛, 아일랜드, 식탁까지 필요한 것들이 모두 빠짐없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오픈'이라는 개념이 무색하게도 모두 반 걸음씩 떨어져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탁 트인 공간을 상상했던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물론, 키친이 어마어마하진 않아요. 아주 편한 사이즈지요." 그러더니 직원은 서둘러, "그리고 뒷마당으로 나가는 최신식의 바이폴드 bi-folding 도어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 정원으로 나가는 접이식 문은 단 세 짝이었다. 한 짝은 그냥 열리는 일반 문이었고 결국엔 두 짝만 접히는 형태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바이폴드 도어는 요즘 꼭 갖추어야 하는 요소, 즉 '틱 더 박스'지요.


이 집의 '시팅 룸' 거실은 2층에 위치해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방 두 개, 가족 화장실이 있었다.

키친, 정원과 다르게 2층은 시팅 룸은 하나의 방으로 완전히 독립되어, 문을 닫고 들어와 책꽂이, 소파와 테이블, 벽난로와 같은 것들을 다 함께 즐기도록 갖춰져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 방은 작아서, 침대만으로 꽉 찬다. 붙박이장 없이 행거에 예쁜 옷만 몇 벌 걸려있다.

"와.. 문 닫고 방에 있으면 답답하겠는데. 이렇게 해서 청소년들도 거실로 나오게 하려는 아이디어가 아닐까?"

3층으로 올라가며, 세일즈 직원은 만면의 미소를 뗬다. "마스터 베드룸(안방)입니다."

3층 전체를 차지한 마스터 베드룸은 시팅 룸보다 크기가 크고, 따로 넓은 화장실까지 붙어있었다.

직원이 스위치를 켜자, 한쪽으로 보이는 워크인 클로젯 walk in closet 에 불이 들어왔다.

기역자로 생긴 이 옷방에는, 끝부분에는 예쁜 테이블까지 숨어있었다. 바로 이것이 '와우!' 소리가 나온다는 회심의 와우 팩터, 여기서 왠지 배경음악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안방'에 힘을 주어, 화장실, 옷방까지 구비한 가장 럭셔리한 공간을 3층에 만든 것을 보며, 어느 부분을 어떻게 열고, 닫을 것인지 영국 주생활 문화의 흐름과 기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나는 여전히, 여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올드한 생각, 나의 하우스 과외선생님에게 털어놓았다.

"저는 쇼룸에 가서 봐도, 냉장고 같은 커다란 아일랜드가 멋있어 보이지가 않아요. 한가운데서 요리하고 설거지 한다는 것도요".

묵묵히 듣고 있던 그녀는 "요즘은 키친을 열어 보이는 트랜드긴 해요. 상부장을 달더라도 문 없이 달기도 하고, 아니면 벽에 그저 선반을 하나 달아, 거기에 그릇을 두고 쓰기도 해요."

그렇다면 예쁘고 멋진 그릇을 디스플레이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크림색 코렐 그릇밖에 없는데 말이다. "미술관처럼 보여주는 것보다, 생활을 위한 거예요. 아일랜드가 있으면 아무래도 같이 요리하게 되고, 같이 준비하게 되지요. 캐비닛 문을 없애면 누구나 보고 꺼내서 쓰기 편하고요."

 '내 주방'안에서 혼자 준비해서 식탁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다는 생각을 집에 들인다는 것. 그리고 좀 더 오픈된 구조를 시도해보면 나중에 나의 생각도, 삶의 방식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굳어있었을 내 생각에서 한걸음 나왔지만, 여전히 아일랜드 역시 유행이며,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에 기반을 둔 인테리어 디자인 플랫폼 '리모델리스타 remodelista'은 '아일랜드가 주방을 망치고 있다'는 아티클에서 비슷한 생각을 풀어냈다.

"그저 식탁을 가까이 놓고 아이들과 빵을 만들어도 되고, 작은 간이 테이블을 써도 되는데, 굳이 코끼리 같은 공간을 가운데 놓음으로써, 주방의 간결함과 멋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라이버시와 구획을 중시하는 영국 주생활  문화에서도 이런 고민들이 떠오른다.

최근에는 오픈 플랜을 하고서도 가변변적으로 구획을 두는, '브로큰 플랜  Broken plan'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즉 구조적으로 넓은 공간을 두되, 높은 책장이나 가구, 또는 나무 스크린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픈 책장을 키친-다이닝 중간에 배치하거나, 또는 긴 소파의 등을 돌려 벽쪽으로 바라보게 하면 배치하면, 한쪽에서 고기를 구워도 다른 한쪽에서는 서재에 있는 듯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다. 그러고보면, 키친 캐비닛도 유리로 문을 하면 들여다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다 보일 필요는 없다.

여기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가변성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한쪽 벽으로 붙여 오픈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결국,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않아? 나도 자주 하는건데. 가끔 슈퍼파워를 내서, 혼자 소파나 침대까지도 번쩍 들어 이쪽 저쪽 옮겨보잖아" 얘기를 듣던 친구가 정곡을 찔렀다. 맞다. 약간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뿐이다.

참고가 된 인스타그램의 사진! 양쪽 문도 좋지만, 무언가를 달고, 놓을 '벽' 공간도 필요하기에, 우리는 싱글도어를 달았다.


결국 나는 어떻게 결정했을까? 집 가치 상승과 유행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당장은  '함께하는 키친'을 시도하기 위해 '오픈 플랜키친'을 결정하고야 말았다.

대신, 1층의 전체적인 흐름은 상상력을 이용해서 최대한 브로큰 플랜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열쇠는 '문'. 열아홉평의 크지않은 집이었기에,

방마다 문을 하나씩 더 내서, 180도로 접히는 경첩을 달아 문을 활짝 열어 접을 수 있게 했다.

복도, 키친, 거실이 서로 들여다보이며 공기가 통하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문을 닫으면? 키친의 설겆이를 안보아도 된다.

180도로 젖혀지는 '버터플라이 경첩'을 사오자, 우리집 빌더 요티는 "여즘 인스타그램때문에 죽겠어요." 한숨을 쉬었다.


하나 더 들여온 것은, 그렇게나 하고싶던 미닫이문, '슬라이딩 도어'였다.  거실에 스르륵 미닫이 문을 열면, 화장실이나 복도와 바로 통하고, 닫으면 벽 처럼 말끔한 느낌을 준다.

결국, 모든 문을  열어두면 우리 집은 마치 수건돌리기처럼 끊임없이 돌수 있다. 물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금방 파악해서 술래잡기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거실과 현관을 잇는 벽같은 문.

브로큰 플랜은 정말 별게 아니었다. 아무리 핫하고 쿨한 것을 따라가고 싶어도, 내가  준비된 상태라면, 조금  열어 보여도 된다는 안도감을 준다. 어떤 컨셉에, 유행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나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비로소 준비가 되었을때, 집의 모습도 그때마다 변하며 같이 자라날  있으니까. 어떤 컨셉에, 유행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집을 나에게 맞춘다'.


참고

'브로큰 플랜'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 (1995)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2010- https://www.netflix.com/title/81086533?trackId=13752289&trackIdJaw=13752289&trackIdEpisode=13752289&trackIdTrailer=13752289&dpRightClick=1

칼라 홈 울버코트 밀 CALA Homes Wolvercote Mill 옥스포드 울버코트의 신축 주택단지

https://www.cala.co.uk/homes-for-sale/south-east-england/oxford/wolvercote-mill/?gclid=Cj0KCQjw8p2MBhCiARIsADDUFVGE0eAnGAtD2iARVPcIRGqARhhbsbPCLCYAjDu5HXxIW_k2tk7U38saAhbmEALw_w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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