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정형화는 여행의 자살이다.'
일본의 여행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자살'이라는 극한의 단어를 불러와 틀에 박힌 여행을 하지 말라고 외쳤다. 다카시의 말이 아니더라도 꽉 찬 일정표를 들고 떠나는 여행은 죽은 여행이다. 아니 여행이 아니다. 그냥 핸들이 돌아가는 대로 가보는 것이다. 어차피 여행은 내가 나와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황홀한 여행을 늘 꿈꾼다. 차 안에서 자고, 차 안에서 생각에 빠져들어도 황홀하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황홀한 여행은 세련된 슈트가 아닌 헐렁한 바지에 구김살이 좀 있는, 목이 좀 늘어난 셔츠를 입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제 위치에 가지런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여행은 아무리 봐도 살아 있지 않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갓 뽑은 배추처럼 날것의 싱싱함이 그대로 담겨 있는, 흐르는 개울물을 따라 걸어보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과 공간. 여행은 그렇게 이루어져야 한다.
원주에 가면 차는 언제나 치악산 자락에 세운다. 치악산이 펼쳐놓은 산자락 어디쯤에는 차 한 대쯤 세울 만한 자리는 많다. 오늘은 신림면 성남리 연화사 부근에서 밤을 맞는다. 짙은 어둠이 태고적의 그것처럼 덮어오는 밤을 타고 앉아 하나씩 하나씩 나를 버린다. 온전히 비우는 것이 오늘 차박의 자리매김이다.
밤이 밀려오는 것은 산골에서 봐야 한다. 산골의 밤은 언제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자칫하면 밤의 행렬을 놓치기 십상이다. 어둠이 내리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테일게이트를 열어 놓고 걸터앉아 다가오는 밤을 맞아야 한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차 안까지 가득 차버리는 어둠. 어둠은 드러누워야 하는 침낭 안에까지 두껍게 밀려든다. 불을 켜지 않고 어둠을 오롯이 즐긴 다음, 그때서야 불을 켜고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일이다. 혼자서, 혼자 앉아서 어둠을 말아서 한 그릇 후루룩 들이켜 볼 일이다.
늦은 오후 옹색하게 차를 세우고 연화사를 찾았다. 시골 아낙처럼 수더분한 얼굴로 길손을 맞는 연화사에서 천 년의 고요를 느낀다. 세상을 등지고 돌아앉은 듯한 작은 사찰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고요함에 함몰되어 본다. 이렇게 깊숙한 산골짜기까지 들어앉아 부처를 모시고 있는 것은 분명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는 심사 心思이리라. 세욕世慾으로 들끓는 마음을 가라앉혀 부처의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는 일념이었으리라. 한국불교 삼론종 연화사는 휘몰아치는 세파世波를 안고 묵묵히 불심佛心을 세우고 있었다.
삼론종은 용수(龍樹 인도의 승려로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대승 8종의 종조(宗祖)로 불린다)의 《중론中論 용수(龍樹)가 지은 대승불교의 중심이 되는 논서》과 《십이문론十二門論 중론(中論)에 대한 해설서》, 그의 제자인 제바(提婆 2~3세기 인도의 불교학자로 스승인 용수(龍樹)를 내세워 중관파(中觀派)를 일으켰다)의 《백론百論 다른 철학과 종교의 설을 논파한 책》등 삼론을 주요 경전으로 삼는 종파로서, 세상의 모든 것이 공空이며 그 속에서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용수의 종지(宗旨)를 계승하고자 한다. 따라서 중도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체득하는 것은 삼론종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삼론종 사상의 집대성한 사상가가 바로 6세기의 승려 길장吉藏이다. 길장은 용수의 중도 사상을 토대로 무득정관(無得正觀)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득정관[無得正觀]
삼론종이 추구하는 수행의 목표는 무득정관無得正觀은 있음(有)과 없음(無), 생성(生)과 소멸(滅), 움직임(動)과 정지(靜), 원인(因)과 결과(果) 등 대립하고 있는 개념들 사이에서 어느 한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한다. 양 극단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이 가슴 깊이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도는 맞서고 있는 두 개념이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각각 지니고 있는 서로 다른 속성이 두 개념에 내재되어 있는 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수평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두 개념의 가치를 수용하여 실현해 가는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매듭을 지어 보았다. 무득정관(無得正觀)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삼론종 스님들께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닐까.
연화사의 밤은 고요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침낭 속은 언제나 쾌적하다. 따뜻한 온기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산골의 밤을 즐긴다. 차박에서 맞는 밤은 언제나 칠흑의 원시적인 어둠이다. 그러나 세상은 밤을 가만 두지 않는다. 곳곳에 불을 밝혀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밤에는 어둠의 세상이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도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불을 밝힌다.
"밤에는 작물들도 잠을 자야 한당게. 그런디 저러코롬 밤새도록 불을 켜 농게 나락이 여물지를 못 헌당게. 이게 먼 일인지 몰라. 내가 전등을 다 깨버렸당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정읍시 감곡면 삼평리 마을 회관에서 차박을 할 때 만났던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혀를 찼다.
완전한 어둠은 어디에 얼마큼 남아 있을까. 사람들의 손이 간 곳에 어둠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한적한 주차장에도 불을 밝혀 놓고 있다. 빛의 공해이다.
'차박'이 보편화되기 전, 오대산 상원사 주차장에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어둠을 보았다. 잠을 자기 위해서 켜두었던 등을 껐을 때 와락 밀려들었던 어둠. 행복했다.
작은 절 연화사 아래 공터에서 어둠을 만난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다가 느닷없이 소설가 박경리를 생각했다. 통영에서 태어난 분을 원주에서 떠올린 것은 그녀의 삶의 한 토막이 이곳 원주에 뿌리를 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 유난히 차가운 바람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차 안에 앉아 어제 사두었던 단팥빵을 우유를 곁들여 먹었다. 차박여행에서 언제나 먹는 아침이다. 겨울 여행에서는 집에서 가져온 삶은 달걀도 단출한 아침 밥상을 풍성하게 해 준다. 치악산 자락을 빠져나와 원주 시내로 들어간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박경리가 살았던 원주시 단구동의 낮은 언덕에 자리 잡은 주택을 중심으로 조성한 소설 <토지> 테마공원이다. 주차장에 어렵게 주차를 하고 들어서니 박경리 문학의 집이 보인다. 4층의 현대식 건물로 대하소설 <토지>에 관한 전시실, 박경리 선생의 삶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방, 사무실, 세미나실로 되어 있다.
4층으로 먼저 올라가 내려오며 관람하라고 한다. 4층에는 도서관 같은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는데 막아 놓았다. 한쪽 벽에 그녀의 작품들을 진열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읽은 책이 없다. 부끄럽다. 그 순간 반가운 책이 보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김약국의 딸들>. 1962년 을유문화사에서 초판 발행했었다. 김약국 주인 김봉제로 대표되는 지방의 부유한 가정의 몰락을 그린 소설인데,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을 떠올리게 한다.
3층은 대하소설 <토지>와 작품의 인물 관계 자료를 전시해 놓은 곳이다. <토지>는 총 5부 16권으로 되어있는데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연재하면서 26년 만에 탈고한 작품이다. 지주地主인 최 씨 일가의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대하소설이 그렇듯이 민족의 고난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하동 평사리에 최참판댁을 재현해 놓고 드라마를 촬영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박경리 선생이 살던 집 옆으로 계단을 몇 단 올라가면 홍이동산이다. 토지의 어린아이 인물 홍이에서 따온 이름으로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에는 이곳에 앉아 끌어안는 자연이 참 포근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나만 들었을까.
홍이동산에서 내려다보는 선생의 옛집에는 겨울 하늘을 돌아내려 햇살이 가득하였다. 그 햇살 아래 호미를 들고 세상을 일구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내다 보였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잃고, 아들도 앞세우고 힘겹게 헤쳐 나왔던 세상을 향해 그가 던지고자 했던 말은 무엇일까.
원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사위 김지하의 옥바라지를 위해 원주 살이를 했던 박경리 선생. 그녀는 치악산의 찬바람이 내 몰아치는 이곳 원주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옥바라지를 하고, 힘든 심신을 달래 가며 대하소설 토지 4, 5부를 집필했던 박경리.
하나뿐인 사위 김지하 시인.
지학순 신부의 부탁으로 젊은 청년을 잠깐 숨겨줄 때만 해도 그 젊은이가 사위가 될 줄을 어디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그가 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오적五賊>이라는 시집을 펴내고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을 줄 어디 손톱만큼이라도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구명운동을 하고 출감 후에도 원주 집에서 거두었을 때까지만 해도 선생은 사위를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느닷없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자신이 몸담았던 진보 진영과 등을 돌렸을 때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까. 김지하 시인은 변절자로 몰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제명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가 보수정권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적이 없고, 자신의 자서전 내용과 다른 진술을 보였으며, 자식의 대학진학 문제에서도 사실과 다른 게 말하기도 하여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탓이라며 그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루 한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던 선생은 2008년 폐암으로 세상과 선을 긋는다. 힘겨운 삶을 살았던 선생의 육신은 고향 통영에 잠들었으나, 그녀가 살았던 원주시 단구동 집과 함께 박경리 선생은 원주에 그대로 남아 있다.
원주천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무 생각 없이 원주를 빠져나가기에는 마음이 스산했다. 테일게이트를 열고 걸터앉아 흘러가는 강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의 삶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박경리 선생의 삶도 그렇게 흘러갔다. 통영에서 시작한 강물은 서울을 거쳐 원주로 흘러갔다. 선생의 삶은 굽이치는 강물처럼 굴절이 많았고, 그 아픔으로 선생은 붓을 들었다.
한 명의 작가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참 많은 아픔과 굴곡진 삶이 있어야 한다. 서정주가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고 말한 것처럼, 박경리 또한 그 이상의 바람에 휩싸여 붓을 들었던 것이다. 7,8백 여평이 되는 단구동 집의 텃밭에서 가용家用할 채소를 기르면서 그녀는 <토지>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밭은 작품의 산실産室이었으며, 그대로 그녀의 눈시울을 붉힌 삶이었을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몰려다니는 원주천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