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호 장회나루에서 또 하나의 밤을 보낸다. 차갑게 흔들어대는 밤의 시간은 침낭의 뽀송뽀송한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늑함이었다.
"라면 먹을까?"
"그래, 오늘은 꼭 먹자."
어둠을 헤치며 버너에 불을 붙여놓고, 우리는 바위투성이 둥지봉 꼭대기만 바라보았다.
"밀포드 산장으로 내려오는 밤은 설렘으로 가득하거든. 그런데 청풍호반의 밤은 어떨까?"
김화백은 신라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막 날개를 펴는 시점에 뉴질랜드로 날아갔다. 단순히 놀러 갔던 걸음에 밀포드는 찰싹 달라붙었고, 그는 덕지덕지 붙은 산봉우리들을 떼어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고민이 아주 많았지. 자칫하면 그림의 날개가 꺾일 판이었으니까."
화단畫壇에서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그래서 두 날개를 활짝 펼쳐야 한다고 뉴질랜드행을 말리고, 또 말렸다. 날아오를 날개를 달았고, 거대한 디딤돌을 놓아줬으니 힘껏 날아오르라고 권했다.
"그림은 밀포드에서 그리겠다고 다 내려놓고 떠났지. 그리고 열심히 그렸어."
깨어나는 새벽을 안고 옥순봉으로 들어섰다. 나뭇잎을 다 떨구고 남아있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다가 홀로 서있는 이정표를 봤다.
'옥순봉 1.9km'
그리고 저만큼 넓은 공터를 차지하고 있는 주막이 있다. 탁배기 한 잔을 그리며. 옥순봉/구담봉 삼거리에 섰다. 나뭇가지 사이로 청풍호반이 내려다 보인다.
옥순봉 방향으로 걷는다. 길은 가파르게 내려갔다가 옥순봉으로 올라간다. 숨은 거칠어졌으나 마음은 이미 호반으로 빠져들고 있다.
너나없이 우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대로 그림이네."
"어디선가 사랑가라도 들려야 하지 않나?"
옥순봉은 얌전한 색시마냥 다소곳이 앉아 있다.
"우리 산은 바위산이어도 아기자기하게 다가오는데, 뉴질랜드 밀포드 암봉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상했는지 험상궂은 표정이더라고"
그가 향수병을 앓은 것은 3년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무너져가는 시골집의 담벼락이 보고 싶었고, 복사꽃 피던 외갓집 마을의 정경이 가슴을 휘저었다. 제주의 유채꽃과 유채꽂으로 둘러싸인 일출봉과. 일출봉을 바라보던 광치기해변이 눈에 밟혔다. 그러나 억누르고 참아내며 그는 밀포드의 산하를 그렸다.
"건너편 산자락에 퇴계를 사랑한 관기 두향의 묘지가 있어."
"관기 두향? 그 퇴계선생?"
"퇴계가 49세에 단양군수로 부임했는데 두향이 퇴계에게 함몰되고 말았다네."
"우리나라 기생들은 멋을 알았던 것 같아. 서경덕을 사랑한 황진이, 유희경과 사랑에 빠진 매창. 여기에 두향이도 이름을 올리는군"
김화백은 두향에게 빠져든다.
퇴계는 명종 3년(1548년) 정월,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나이 48살 때였다. 퇴계는 운명처럼 관기 두향을 만나게 된다. 두향의 나이 19세. 그들의 연을 맺어준 것은 매화였고, 매화를 주제로 쓰는 시였다.
퇴계는 매화를 사랑하여 백여 편의 시를 남겼고, 그것들을 '매화시첩'으로 묶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매화홀릭이다. 그가 쓴 매화시 한 편을 보자.
步躡中庭月趁人 뜰을 걷고 있는데 달이 사람 좇아와
梅邊行遼幾回巡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가
夜深坐久渾忘起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는데
香滿衣巾影滿身 꽃내음은 옷에 스미고 그림자는 몸에 가득하네
두향은 조실부모하고 어린 나이에 퇴기의 수양딸이 되었다가 13살에 기적(妓籍)에 올랐다는 기록만 전할 뿐이다. 원래 안씨 집안의 딸이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력은 남아 있지 않다.
두향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는데, 매화를 애지중지하며 기르고 있었으며 거문고 또한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물론 시를 지어내는 솜씨 또한 그녀의 자태처럼 뛰어났다.
퇴계가 두향을 만났을 때는 두 번째 부인 권씨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뒤였다. 뛰어난 미모와 매화에 대한 마음, 그리고 아름다운 시를 쏟아내는 두향에게 퇴계는 속절없이 빠져들었을 것이다.
이들이 마음을 합하여지었다는 '도수매(倒垂梅)'라는 시는 조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수매란 가지를 늘어뜨린 매화로 능수매, 수양매라고도 한다.
어느 날 두향은 도수매 한 그루와 그것을 읊은 시 한 구를 퇴계에게 보냈는데 그 시구는 다음과 같다.
묘두일일견심래(昴頭一一見心來)
퇴계는 시구를 받아 들고 온몸으로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두향을 불러 마주 앉아 시를 완성했다고 한다.
一花纔背尙堪猜 꽃 한 송이가 고개 돌리고 있어도 그 미워함 견디기 어려운데
胡奈垂垂盡倒開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매달려 피었는가
賴是我從花下看 이리하여 내가 몸을 낮춰 꽃 밑에서 올려다보니
昴頭一一見心來 치켜든 송이송이마다 다가오는 마음 보이는구나
두향이 퇴계에게 보낸 시구는 그대로 퇴계를 향한 두향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단번에 알아챈 퇴계와 그 마음을 전한 두향이 마주 앉았으니 이런 시가 나오지 않았을까.
"사랑에 빠졌고, 그래서 은근한 밀당을 하고 있는 연인들은 눈여겨보아야 할 시인 것 같네.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낮춰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김화백은 청풍호반을 내려다보며 그윽한 눈길을 보였다.
"이 아름다운 풍경에 싸여 퇴계를 향한 두향의 마음을 그려볼 수 있다니. 여행은 역시 살아 있는 것이로세."
옥순봉 꼭대기에서 두향의 애절함이 묻어나는 청풍호반을 바라보는 마음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퇴계는 임기를 마친 후 풍기군수로 발령을 받아 떠나게 된다. 죽령을 넘어가는 퇴계를 멀리서 바라보았을 두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후 21년의 세월이 지나 퇴계가 7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이별이 남긴 아픔을 두향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퇴계가 떠나고 두향은 자신들이 노닐었던 강선대(아주 넓은 마당바위인데 지금은 청풍호 수면 아래 잠겨 있다.)를 내려다보며 작성산 산자락 움막에서 눈물로 지냈다고 한다. 그나마 두향의 마음을 달래 준 것은 퇴계의 시였다.
黃卷中間對聖賢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
虛明一室坐超然 빈 방 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으로 봄소식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오
퇴계가 두향을 떠난 지 4년이 되던 봄에 지었다는 시이다.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오' 두향에게 보내는 퇴계의 마음이 그대로 담긴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퇴계가 좀 잔인하지 않나?"
김화백은 웃고 있었으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무슨 말이야?" 잔인하다니?"
"이런 시를 써놓으면 홀로 남아 있는 두향은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평생을 줄이 끊어진 거문고를 부둥켜안고 살아가야 할 거라는 것을 정말 퇴계는 몰랐을까? 기생들은 선비를 만나 사랑을 하고, 마음을 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애절한 이별을 감당해야 하고, 평생을 가슴 두드리며 살아간 것을 보면, 선비들은 정말 무서운 존재인 것 같아."
나는 김화백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언제나 아픔이 따르는 병이 아닐까.
20년을 홀로 강선대를 내려다보며 살고 있던 두향은 퇴계의 부음을 들었다. 두향은 바로 죽령을 넘어 나흘 만에 도산서원에 도착한다. 홀로 걷는 그 길이 얼마나 마음을 쥐어짰을까. 그의 가슴은 그 칼로 긋는 듯한 아픔을 어떻게 다 받아냈을까. 그것이 사랑의 힘이었을까. 두향의 걸음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으리라. 두향의 마음은 갈가리 찢겼으리라. 그녀는 그러나 똑바로 걸었으리라. 그녀에게는 '昴頭一一見心來 치켜든 송이송이마다 다가오는 마음 보이는구나'라는 시구가 짙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을 테니까. 두향은 퇴계를 마음에 안고 걸었을 테니까.
차마 빈소에 찾아가 큰 절을 올릴 수 없었던 두향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상가喪家가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서 소복 차림으로 절을 올리며 통곡했을 두향의 마음을 과연 지금의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갈 때는 어떻게 갔다고 해도 죽령을 넘어 돌아오는 걸음은 제대로 걸을 수 있었을까.? 나뭇가지에 목을 걸지 않고 가슴이 터지는 걸음을 걸어 죽령을 넘은 두향은 정말 대단한 여자였던 것 같아."
나는 죽령을 넘는 두향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었다.
"정황으로 보면 두향은 그 자리에서 목을 매었어야 했는데, 그로 인해 퇴계에게 누가 되는 것이 싫었던 게 아닐까. 끝까지 퇴계를 사랑한 두향은 그 힘든 걸음을 걸어 죽령을 넘어왔던 거야."
나는 김화백에게 눈짓으로 동의를 구했다.
"거문고를 두드리며 자연을 즐겼다는 강선대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는 두향, 그 진한 사랑을 오늘 여기 옥순봉에서 그려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하네. 오늘 여행은 그런 색깔이 되었구먼. 김화백,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라는 게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지 못하는 묘약인 거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닐 거야. 자연과의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강지처라는 말이 있지? 맞는 말이야. 다시 돌아오고 싶어. 우리나라로."
김화백은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자꾸 청풍호반으로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