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 볼품없는 나무 아래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사내가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차림새는 후줄근하고, 그들이 주고받는 말과 행동은 무질서하고, 무의미하게 얽혀 있다. 늘 목을 매고 싶을 만큼 외롭고, 아무도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50년째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 고도는, 그러나 오지 않는다.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곳은 게다가 황량한 벌판이다.
서른이 막 지났을 무렵,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 받아 든 대본 속에서 블라디미르는 어이없게도 웃고 있었다. 그 허름한 옷차림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겸연쩍은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는 에스트라공의 손을 꼭 잡고 있었고, 에스트라공은 자신의 손을 빼려고 버둥거렸다. 에스트라공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에스트라공은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는 듯,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그렇게 보였다.
에스트라공 역을 맡았던 친구와 많이 울었다. 무대에서 인물을 형상화하지 못하는 배우의 처절한 눈물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인간의 지성적인 면을, 에스트라공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탐욕스러운 면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출은 끝까지 지성적인 블라디미르, 탐욕적인 에스트라공을 주문했다. 기다림에 지쳐 ‘떠나고 싶다’고, ‘목이나 메어 죽어버리자’고 징징거리는 에스트라공, ‘고도를 기다리자’며 그의 손을 잡고 진득하게 서 있는 블라디미르. 우리는 그렇게 에스트라공이 되었고, 블라디미르가 되어 무대에 섰다.
사흘 동안 공연하면서 우리는 고도를 만나지 못했다. 막이 내렸을 때,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의 겸연쩍은 웃음을 이해했다. 에스트라공이 움켜쥐고 있는 주먹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간절하게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공연 후에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삶의 무대에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오지도 않는 고도를 조금은 절박하게 기다리고 있다.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일이 겸연쩍은 일이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트라공처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는 빈 주먹을.
이 광대한 혼돈 속에서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그건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야
나에게 고도는 오지 않았다. 나는 고도가 사람인지, 또는 어떤 ‘의미’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벌판에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되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사무엘 베게트는 자신도 고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도를 기다릴 이유를 갖게 된다. 고도는 기다리는 자신만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여러 번 고도를 만났다. 고도는 아내였고, 아이들이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집이었고, 환한 웃음으로 현관을 들어서던 믿음직한 사위였다.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고 병원을 나오던 날 살갗을 스쳐 가던 시원한 바람이었다.
나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도 여전히 고도를 기다린다. 블라디미르이고 에스트라공인 나는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빈 주먹을 움켜쥐고 고도를 기다린다. ‘우리는 인간이오’라고 말하고, ‘습관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무디게 하지’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고도를 기다린다. 황량한 벌판에서, 샹들리에가 빛나는 도심에서, 주머니가 비었을 때도, 지폐가 가득한 지갑을 들고서도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는 간절하게 바라는 실체이다. 그러나 참 웃기게도 나는 고도를 그려내지 못한다.
『그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는 책을 읽었다. 침침한 눈으로 읽었는데 생각은 몸으로 느낄 만큼 깊었다. 그 깊은 곳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작가의 세상으로 들어서겠다는 생각보다는 늙어가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블라디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허허벌판에서 가슴을 두드리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브런치 스토리 같은 전문성을 띠고 있는 곳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브런치 스토리의 문을 두드릴 수는 없지 않은가. 얽혀 있는 생각의 가닥을 풀어놓지도 못하는 치졸한 글을 쓴다고 허우적거리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매일 한 편씩 백 편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멈추지 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가필과 정정을 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블로그에 올렸다. 음식을 만들어 간도 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부어 내놓는 기분이었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났을 때는 문장을 감칠맛 나게 이어가야 하고,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글감을 녹여가며 틀을 짜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닫기만 했지 손끝은 그렇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괴로웠다. 글을 쓰는 일은 강도 높은 형벌이었다.
퇴직하고 난 후 몸과 마음을 키워왔던 고향을 떠나왔다. 자식들 곁으로 가겠다는 핑계를 내세웠지만, 상당 부분은 낯섦을 즐기겠다는 속셈이 있었다. 문을 열어도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 와서 하루를 보냈다. 좀 멍한 상태로 열흘을 보냈고, 한 달을 보냈다. 싱싱한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청량감이 확 밀려왔다.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계절이 몇 번 바뀔 즈음에는 무엇인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외롭지는 않았어도 혼자 걷는 산길은 제법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느리게는 걸을지라도 비틀걸음은 걷지 않아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걸신들린 것처럼 책을 읽었다. 남독이었다. 서가에 꽂아 놓기만 했지 읽지 않은 책들이 참 많았다. 그때 박웅현의 『여덟 단어』를 읽었다. 마지막 ‘인생’이란 페이지에서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다가 돌아보면 펼쳐져 있는 게 인생’이라는 한 줄에 매몰되었다. 돌아보니 내 뒤에는 아무것도 펼쳐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인생이 없이 살아오고 있다는 말인데.
조각난 마음일지라도 모아두어야 할 것 같았다. 모아두어야 조금이라도 펼쳐놓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무뎌진 눈일지라도 보이는 것들에게 이름표는 달아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는 삶의 그림이 깊이가 있고, 내가 세상으로 내딛는 걸음에도 의미가 담겨 있다고 우기고 싶었다. 열어 놓은 노트북 안에 무엇인가 펼쳐놓아야 할 것 같다, 이제서라도.
무대의 막은 올랐다. 고도는 오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고도는 기다려야 한다. 글을 쓰다가 울고, 가늘어지는 눈으로 울어대다가 집어 올린 메마른 글감이라도 풀어놓아야 한다. 폭풍과 해일의 바닷가에서도 펜은 들어야 한다. 혼자라서 외로울지라도, 눈을 뜨고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