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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구 Jan 21. 2024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며

해양과 대륙의 요충지에서

동양과 서양의 대륙이 만나는 지점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대양은 동서를 나눈 대륙의 위아래로 이어져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고 있는데 한눈에 봐도

해양과 대륙의 요충지임을 알게 한다. 두 대륙 사이의 해협을 따라 배가 움직이는데 바다의 폭은 몇 킬로 남짓 안돼 보이면서도 수심은 상당히 깊었다. 일상 교통수단인 출퇴근용선박에서 관광용 선박 및 초대형 호화 유람선에 이르는 다양한 배들이 운항 중이다. 대형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용 선박들은 지중해와 흑해를 오가며 물자를 실어 날랐다. 해안가 주변에는 고대 전통양식을 간직한 호화로운 저택과 궁전들이 즐비했다. 동양은 서양을 침범하기 위해 해안가에 성을 쌓았고 서양은 대륙을 지키고 다시 동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성벽을 높였다. 시대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고색창연한 건축물들이 여전한 위용을 뽐내는 듯했다.  


드디어 이스탄불의  상징인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의 양대산맥이 우뚝 선 언덕이 나타났다.

바다 위 배에서 바라본 옛 콘스탄티노플은 언덕 위에 자리한 찬란한 문화유산의 도시였다.  나는 늘 동로마제국의 상징인 콘스탄티노플에 가보고 싶었다. 거룩한 지혜란 뜻을 지닌 ‘아야소피아’ 성당이 어떻게 모스크로 바뀌어 있는지 궁금했다.


아야소피아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건설되어 537년 12월 27일 축성된

성당으로 정교회의 총본산 역할을 하였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군주 메흐메트 2세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아야 소피아에서 금요 예배를 거행한 이래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  – 나무위키 –

해협의 대륙부에 세워진 성과 성벽
아야 소피아

공교롭게도 2024년 1월 15일 부로 아야소피아의 관람을 위한 입장료를 징수되었다. 하루하루 물가가 치솟는 튀르키예 경제와 정부의 재정이 이를 부추겼는지 우리를 안내하던 가이드도 매일 바뀌는 상황에 당황했다. 일단 입장료를 끊고 아야소피아로 들어섰다.  이 웅장한 건축물을 6세기에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철근도 없던 시절에 대리석으로 기둥을 만들고 상부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여러 개의 돔모양으로 지붕을 덮어 높은 공간을 창출해 낸 기술력에 감탄한다.

6세기 로마시대에 축성한 기독교 건축물에 대항해서 16세기에 오스만제국이 만든 이슬람의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블루모스크)의 상징성도 대단하지만 블루모스크의 두껍고 육중한 코끼리다리 모양의 기둥은 아야소피아의 세련미를 따라가지 못하는 듯 보였다.  


층계 없는 경사로를 따라 이층으로 오르니  황후의 로지아라는 공간이 나오는데 여인들은 이곳에서 아래 1층을 바라볼 수 있는 로얄석 같은 위치이다. 이곳에 서니 소피아성당 내부의 모든 공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장엄하고 격조 높은 위엄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는 귀족 상류층은 가마를 타고 이층에 내렸던 터라 가마꾼들의 이동에 무리가 없고 승차감에도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층에서 건물의 중심을 바라보니 예배당의 중심부(미흐라브가 놓인 곳)가 약간 우측으로 틀어져 있었다.  


미흐라브 : 모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교도가 기도를 할 때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이슬람교의 신성한 순례지인 메카 쪽을 향하도록 배치함


애초의 설계에는 없었던 후에 만들어져서 뭔가 어색하게 돌려진 기도처는 모스크로 바꾸면서 그 머리가 메카를 향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국이 바뀌고 지배자가 달라짐에 따라 신앙도 변했다. 건축물의 용도가 변해서 하나님과 예수를 경배키 위해 화려하게 수놓았던 벽화는 회칠해서 덮였다.  예배당의 벽면에는 알라와 그의 제자의 이름을 새긴 원판 캘러그래피가 대신해서 세워졌다.  

한쪽 벽면의 회칠을 벗겨내 원형을 복원해 놓은 부분에는 중앙에 예수가 왼편엔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오른편의 세례요한이 모자이크로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 위쪽에도 겨우 한 부분만이 복원되어 나타난 천사가 보일 뿐이었다. 상상해 보건대 이 공간은 성시스티나 성당의 천장과 벽을 장식한 천지창조급의 찬란한 회화는 아닐지언정 그에 준하는 걸작의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었을 텐데 그 원형을 맛볼 수 없음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예배당 안의 엄숙한 조명과 공감각이 자아내는 경외감을 느끼며 아야소피아를 빠져나왔다. 더 많은 공간으로 둘러보려 했지만, 입장료를 받으면서도 접근을 제한한 구역이 늘어서 가이드도 잔뜩 화를 내며 현지 튀르키예 관계자들에게 항의했다. 현재의 관리자들이며 이 땅의 주인인 그들의 방침이고 결정이니 뭐 어쩔 도리는 없지만 말이다.  


튀르키예의 잦은 지진에 의해서 건물이 몇 차례 파손되고 개보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어온 것이지만

동로마 제국의 건축술과 신에 대한 외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까이서는 이 웅장한 건축물을 한 앵글에 담아낼 수 없음을 인정하며 멀리 물러나서 그 모습을 담아본다.  

이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 사이에 커다란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데 기원전 5세기때의 것이라고 한다. 그 역사의 깊이에 놀랐는데 이 자리가 10만을 수용하는 전차 경기장의 중앙부였다는 설명에 한 번 더 놀란다.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든 고대 로마시대의 불가사의한 건축물들.

혼자서라도 에둘러 이스탄불에 왔다는 사실이 대견했고, 또 밟아 나갈 장소들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창

마음이 들떠 오기 시작했다.  

아야소피아의 내부
중앙의 예수와 좌편의 마리아 우편의 요한


표지: 보스포로스 해혐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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