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첫째 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름 날씨에 몸이 곤죽이 되는 시기를 지났다. 폭염으로 에어컨 없이 지낸다는 건 불가능했고 비는 내렸다 하면 하늘이 뚫린 듯 퍼부어 댔다. 폭우와 폭염을 번갈아 맞이하는 여름휴가 시즌을 보낸 셈이다. 7월 말과 8월 초에 맞춰진 피크 휴가 기간에 우리도 편승했다. 직장이 한꺼번에 쉼을 갖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에 맞춰야 했는데, 문제는 대게 이 시기에 휴가가 집중돼서 곳곳마다 사람은 붐벼 대고 비용은 치솟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부지런 떨어 외국에서 보낼 계획을 세워 두었던 것도 아니고 국내 숙박시설을 예약한 것도 아니니, 집에서 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주말을 낀 5일간의 시간이라 그리 긴 것도 아니지만 일정을 잡고 보니 하루하루 꽉 찬 스케줄을 이었다.
외국에 사는 친구 가족이 몇 년 만에 한국을 찾았고, 주재원으로 나가 있는 동생 가족이 방학 동안 고국을 방문한 터라, 이 기간에 만나고 집으로 초대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여유에서 나오는 힘이니 아내는 이 시기를 기꺼이 할애했다. 일단, 장을 봐서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평소에는 주저하던 품목들을 과감하게 집어 들었다. 커다란 수박 한 통과 값이 좀 나가는 간장게장을 구매하고 반찬으로 배추김치와 총각무 김치를 샀다. 깻잎과 낙지 젓갈류에 마른반찬을 마구 사들인 것은 소비쿠폰의 힘이 컸다. 휴가와 손님 대접이 겹치니 장 볼거리가 많아 고기는 물론이고 아이스크림 후식까지 마련하느라 짐이 무거워졌다.
휴가의 첫날, 한국을 방문한 아내 친구 가족의 아이들과 우리 집 아이를 일찌감치 차에 태워 워터파크에 떨궈주었고, 어른들은 근교로 나가 점심을 먹었다. 새로 개장한 숲 속 휴양림에 위치한 식당은 차분하게 손님을 맞아 주었다. 휴양림에서 숙박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당이라 외부사람들에게는 점심 시간대만 개방하는 곳이었다. 아내의 친구들은 식사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밤에도 외국에서 온 동창을 맞아 서촌의 한옥을 빌려 하루를 숙식하며 밀린 얘기를 나눴다는데 그 대화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자들의 대단한 우정을 부러워하며 서로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여유로운 점심을 나눴다.
수락휴는 우리 집의 반대편에 접한 수락산 자락이라 처음 발걸음한 곳이다. 당고개 옆 산으로 접어드는 곳으로 국궁장과 유서 깊은 절이 자리한 곳이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데크를 따라 산책하듯 숲길을 거닐었다. 나는 딸과 보조를 맞춰 발을 옮겼고 30년 지기인 아내의 대학 동창 셋은 소녀들처럼 재잘거리며 숲길을 걸었다. 그들의 우정은 대를 이어 자녀들까지 서로 친하니,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려 물놀이를 즐기러 간 것이다.
식사 후에 산책까지 마쳤지만, 아직 두시라 차를 마실 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차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나오니 너른 잔디 마당이 펼쳐진 커피숍이다. 야외는 나무와 꽃으로 가꾼 잔디밭으로 드넓었지만 한낮의 더위는 사람들을 실내의 에어컨 바람 앞에 머물게 했다. 한 사람의 이야기에 반응하며 실타래를 풀어가듯 낚아채서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여자들의 화법이 놀라웠다. 대단치 않은 것 같은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감과 나눔을 지치지 않게 풀어내는 중이었다.
아침부터 아이들을 물놀이장에 데려다주고 아내 친구들을 태워서 이곳저곳을 이동하느라 피곤해진 나는 커피숍을 빠져나와서 잠시 집에서 홀로 쉬기로 했다. 친구들끼리의 대화가 끝나면 다시 픽업하러 오겠노라 했고 오후 5시에 와달라고 연락이 왔다. 아내와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 놓고 대략 6시쯤엔 워터파크에서 나올 아이들을 기다리러 갔다. 오후 5~6시 사이에 만나자고 말했는데, 전화기를 라커룸에 두었던 터라 연락이 안 됐다.
나는 당연히 재미있게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거라 연락이 안 될 것을 짐작했지만 염려 가득한 엄마들은 혹시라도 뭔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가서 방송이라도 하라고 안달이어서 어쩔 수 없이 미리 와 서성이는 중이었다.
저녁 6시를 넘기면 배고파서라도 나올 거라 생각하며 탈의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는다. 그 와중에 저녁권을 끊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는데, 수영을 마치고 퇴장하는 사람들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일곱 시 반쯤이 되니 이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다며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들과 같이 간 두 아이들은 영어가 편한 아이들이고 한국에 잠시 방문한 입장이라 달리 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에서 나온 세명의 아이들은 얼굴이 하얗다. 실내외 풀에서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느냐며 오히려 반문을 한다. 사람은 많았지만 슬라이드와 워터풀에서 노는 게 재미있었다며 한국의 워터파크에 엄지 손가락을 척 올려 보였다.
이제야 심한 허기를 느낀 20대와 10대 아이들 셋을 태워 집으로 돌아오니 피자와 치킨이 한 상 차려져 있다. 허겁지겁 뼈를 발라내며 피자와 수박을 번갈아 먹어치운 아이들을 보니 엄마들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흘러넘친다. 이제 다시 자신들의 비엔비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아내의 친구와 아이들을 또 다른 친구가 자신의 차에 태워가겠다며 나섰다.
아쉽게 작별은 고하니 대략 밤 열 시가 되었다.
우리의 휴가 첫날은 이렇게 저물고 있었고 그다음 날은 동생네 가족을 맞기로 했고 그다음은 장모님을 모시고 장인의 묘소에 가기로 했는데……
우리는 휴가를 맞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건지, 밀린 과제를 처리하고 있는 건지, 나름의 수고를 감사히 즐기고 있는 건지, 알쏭달쏭했다. 그래도 모두가 즐겁고, 맛있게 음식을 즐겼으며, 여유를 느꼈다면 뭐 그런대로 알찬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몸을 눕혔다.
잘 쉬면서 또 내일의 휴가를 누리면 되겠지.
표지 : 수락산휴양림 "수락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