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가 익는 가을에 한 끼를 생각한다
건물 내 사내식당이 문을 열면 제일 먼저 입장하는 어르신이 계시다. 직장인들이 몰리는 12시 보다 이른 11시 30분에 미리 자리를 잡고 식사하시는데, 음식을 양껏 담아서 여유롭게 드신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왁자지껄 혼잡해지기 전이라 테이블을 혼자 차지하고 있어도 덜 미안하다. 후식으로 과일까지 들고 나서 자리를 떠도 12시가 넘지 않는다.
스포츠 모자를 눌러써서 뒤에서 보면 젊은 스타일이지만, 돋보기안경의 두께와 얼굴의 주름을 확인하면 일흔은 훌쩍 넘은 어르신임을 한눈에 알게 된다. 오전 10시경이면 이미 사내식당 주변을 활보하시는 데 공원 벤치에 앉아 계시거나 편의점 앞 또는 근처 회사 건물들 사이의 휴게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분은 이 점심 식사 한 끼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의복을 잘 차려입고 나와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다.
어떤 때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남은 음식을 비닐봉지에 담아 자리를 뜨시는데 이것이 남은 하루를 지탱하는데 쓰일 양식일런 지도 모른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오시는 지, 저녁은 잘 차려 드시는지 이것이 유일한 하루의 한 끼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용을 지불하고 사 먹는 이 음식이 그분을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원천임은 분명하다.
늘 혼자이신 것을 보면 아내와 사별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아픈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오후 5시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기다란 줄이 늘어선다. 오후 4시면 벌써 길 위에 가방과 돗자리 종이박스가 일열로 늘어서 사람을 대신해 나레비를 서는데 이는 무료급식을 위한 표시다. 배식을 기다리는 분의 대게 연세가 지긋하신 남녀 어르신이고 간혹 젊은 사람들과 노숙인 행색의 추레한 사람들이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양식을 취해야 하는 것은 가진 사람이나 없는 사람 모두에게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과제지만 이분들에겐 한 끼가 절실하다. 불행하게도 급식이 자신의 앞에서 바닥을 드러낸다면 이보다 더 난처하고 당황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줄을 서는 것에 민감하고, 새치기는 용납이 안되며 밥줄에 관련된 일이라면 사생결단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밥심으로 살아간다. 나이 들어 몸이 쇠약해지고 식사량이 줄어들수록 역설적이게도 한 끼의 식사는 더 큰 의미와 무게감을 갖는다. 가족과 더불어 밥상을 나누었던 추억은 따스한 기억이면서 동시에 아스라이 사라지는 존엄함의 상실이다. 가난했지만 풍성하고도 복작거렸던 온기의 밥상이 세월 속에서 풍요롭지만 고독한 단절의 시간으로 바뀌는 것 같으니 말이다.
예전에 담았던 밥그릇은 요즘의 밥공기와 크기 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다. 전에는 찬이 변변치 않고 간식거리가 부족해서였는지 밥공기가 크고, 고봉밥으로 수북하게 담아 줬는데 지금은 크기도 확 줄었을 뿐 아니라 밥을 적게 먹는다. 건강을 생각하느라, 다이어트하느라, 이런저런 이유로 밥의 소비는 줄었다.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은 양을 줄이고,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양을 확보해야 한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써의 밥과 , 인간의 존엄을 나타내는 의식,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회적 책임 사이 어디에선가에서 우리의 한 끼 밥상이 존재한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니 들녘의 벼가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가을날의 황금 들판에 잔잔한 바람이 불면 그 일렁이는 물결에 풍요로움이 넘친다. 6개월 간의 비바람과 햇살을 견뎌낸 그 알곡의 힘으로 우리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사내식당을 향하는 그 어르신의 발걸음을 떠올린다. 부디 건강을 잃지 않고, 두 발로 스스로 걸으며, 그 한 끼를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오래 지속되기를. 밥상이 단순히 생존의 자리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삶의 질을 풍요롭게 가꾸는 장이 되기를.
다가올 추석을 앞두고, 며칠 먼저 달님께 조용히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