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만기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과 전세금을 받으면 결혼 20년 만에 내 집을 살 수 있었다.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급매로 로열동의 아파트가 나왔으니 다른 사람이 계약하기 전에 빨리 계약금 먼저 걸라고 했다. 시세보다 3천만 원이나 쌌다. 11층의 집은 환하고 깨끗하고 전망이 좋았다. 오늘 계약하지 않으면 집이 없어질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적금을 깨고 계약금을 걸었다. 그런데, 전세가 안 나갔다. 잔금을 치러야 하는 시기는 다가오는데, 전세자금은 받지 못하는 상황이 오자, 남편은 집도 안 빼고 계약한 나를 원망했다. 돈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나는 결국 친정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나 이사하는데, 전세금을 못 받았어. 엄마 돈 있지? 좀 빌려줘.”
“내가 돈이 어딨어? 돈 버는 너희가 줘야지”
“엄마, 통장에 돈 있잖아. 그거 빼서 꿔줘. 내가 이자 쳐서 줄게”
“됐어, 너한테 돈 꿔 주고받은 적 없다.”
“내가 언제 엄마 돈을 가져갔어? 아들만 자식이야?”
오빠에게 얼마 전 수원 중심가에 있는 알짜배기 건물을 상속한 사실을 알고 속상했던 나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됐다, 그건 오빠 걸로 진작에 사 논거야, 돈 얘기하려면, 가”
“엄마!”
그렇게 빈손으로 되돌아와서는 속상해서 한동안 엄마 집에 가지 않았다.
작은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너 엄마한테 돈 빌려달라고 그랬어? ”
“응, 이사해야 하는데, 전세금을 못 받았어. 입주는 해야 하고…. 어떻게 알았어?”
“나도 이번에 2천만 원 빌리려고 엄마한테 갔더니, 엄마가 딸년들은 다 도둑년이라면서 현금 남은 거 다 오빠한테 보냈다고 통장 보여주더라! 나는 이제는 엄마 안 보련다.”
속이 부글거렸다. 엄마는! 진짜 해도 너무 한다. 얼마 전에 선산에 도로가 나면서 1억이 넘는 돈을 보상받은 돈도 다 오빠한테 주고도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 잘난 오빠랑 자알~ 살라고 해!’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오빠는 금쪽이, 딸년은 도둑년, 시집갔으면 딸년은 남의 식구.
친구들이 친정식구들과 가족여행을 가거나 엄마랑 사이좋게 쇼핑도 하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모습을 볼 때면 부럽고 서글펐다. 우리는 돈 때문에 서운하고 얼굴을 붉히고 원망을 하다가도 돈이 급하면 찾아가서 사정을 하는 사이였다.
'그래도 나는 비빌언덕은 있잖아. 내가 엄마한테 뭐 보태주는 것도 아니면서. 감사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가만히 있던 오빠한테 2천만 원이 갔다고 생각하니, 엄마에 대한 미움이 올라왔다.
‘나도 당분간은 안 보련다.’ 잘해보려다가도 엄마에 대한 작심은 고작 이런 계산적인 맘뿐이었다.
나는 못 받은 전세금을 받으랴, 부족한 돈 구하랴, 이사준비에 정신이 없어 한동안 엄마 집에 못 갔다.
아니 안 갔다. 그런데, 옆집 사는 통닭집 아줌마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집에 한 번 다녀가라, 네 엄마가 요즘 이상해. 아니 가까운데 살면서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이냐?”
“네, 조만간 갈게요.”
통닭집에서 전화할 정도로 무심했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앙금이 다 풀리진 않았지만,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 집을 나왔는데 가스 불을 켜고 나온 것처럼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