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주도하는 삶이 살고 싶어졌다.
건강증진 사업부서에서 두 번째로 맡게 된 팀장 자리는 지난번 팀과 비슷한 성격으로 주로 어르신의 건강관리를 담당하는 사업을 추진하는 위치다.
아무래도 의사 집단행동과 재난 등 여러 비상 업무를 겪은 나를 배려 차원에서 이쪽으로 보내 준 것 같은데, 문제는 사업팀이라는 것. 일단은 배려에 감사는 하나 잘 모르는 분야는 사람을 위축시키기 마련이다.
"여기 일 많지 않아. 거기서 고생 많이 했는데, 쉬어가는 의미로 생각해."라는 전임 팀장님의 말과 함께 인수인계를 1시간 만에 가볍게 끝냈다.
그렇게 전보 후 일주일이 조용히 지나가고 소장님 주재 회의 시간이었다.
"우리 보건소의 올해 역점 사업은 ○○사업이야."
'...... 네? 저희 팀이요? 왜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터.
어떻게 하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관심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며 늘 한쪽 구석으로 숨기 바쁜 내향인인지라 부서장의 선언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새로운 업무에 적응을 해가고 있는 어느 날 소장님이 부르셨다.
"다른 보건소에는 이 시설이 있는데 우리만 없잖아. 물론 장소가 좁고 마땅치 않긴 하지. 이거 설치 관련해서 보고 자료 좀 만들어봐."
복지부 5개년 계획서를 찾아내어 당면한 과제를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여 조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관련 시설은 필요하다고...
해당 실무를 맡았던 팀장님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소장님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지라 별다른 대안 없이 부정적인 내용을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은 매우 난감했을 것이다.
여기에 이제 막 업무를 맡아 현장 상황은 아직 겪어보지 않은 채 문서로만 파악한 팀장이 만든 보고자료는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고 그 내용은 그 누군가에게 보고하기에 적절했을 것이다.
몰랐다. 별생각 없이 숙제하듯 의도적으로 제시한 방향이 내가 납득하지 못할 일이 될 줄은...
조직사회는 지시가 있기 마련이다. 지시를 하는 그 누군가는 내부인 일수도, 외부인 일수도 있다. 누가 되었든 그 사람의 배경엔 권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조직원들은 지시를 받으면 당연히 검토를 해야 하고 큰 문제가 없다면 진행하고 그렇지 않다면 다른 대안을 제시해야 하기도 한다. 지시자가 만족하고 수긍할 수 있을 내용으로.
조직생활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지시를 받는 것에 익숙해진다. 더도 덜도 말고 시킨 만큼만 딱 내가 할 도리만큼만 하자는 조직원이 있는 반면, 좀 더 적극적인 조직원은 지시사항에 더해 창의성을 발휘하여 그럴듯하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사업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내여 놓기도 한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작은 팀장직도 버겁고 출세(승진)에 대한 욕망도 없는 전자에 속하는 부류다.
일단은 지시자가 원하는 내용으로 검토 결과를 내어 놓고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어필하면 쉽게 넘어갈 줄로만 알았던 나는 역시나 초보티를 벗지 못한 생각이 짧은 팀장이었고, 근속기간이 20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말 못 할 속사정은 모르고 있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업무를 좀 더 깊게 파고들며 다각도로 파악해 갈수록 이 건은 현실적인 상황도 여의치 않았거니와 사업의 실효성에도 점점 의문이 커져갔다.
'일단 장소가 없지. 하지만 마련한다 쳐, 운영할 인력도 예산도 없지. 이것도 어떻게든 마련한다 쳐, 운영하는 입장에서 어려운 점은 없을까? 이 시설을 이용하는 분들이 만족할까? 투입된 예산만큼의 가치가 있는 걸까?'
일을 진행시킬수록 정녕 누구를 위한 일인가에 대한 물음표가 커져갔다. 실속보다는 겉치레를, 공적 가치보다 그 배후에 숨은 야욕이 느껴지는 건 나만 그랬던 걸까?
다행인지 아닌지, 진행상황은 순조롭지 못했다. 협조를 받아야 할 부서에서 모두 거절당했다.
다양한 문제에 부딪혀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알리고 설득하여 중단되길 바랐으나 바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고 몇 달이 더 지나고 나서야 종국엔 보류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연초부터 추진하여 총 10개월 만의 성과로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없어 다소 허탈하긴 했지만 추진과정을 생각해 보면 후련하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편적이며 비뚤어진 생각에 비약일 수도 있겠으나, 이 일을 진행하며 느낀 점이 있다.
(물론 깊고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고 짐작만 할 뿐, 눈감고 코끼리 다리 만지는 격으로 그저 내가 주관적으로 극히 일부분만 보고 판단한 것이니 오해는 없길......)
상명하복에 충실한 예스맨은 대체로 권력에 꼼짝 못 한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한낱 조직원은 그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 혹은 도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일에 대한 사명감은 물론 봉사정신도 없지, 업무에 대한 애정이나 열정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발등에 떨어진 시급한 문제 해결하기에 바쁘고 지금의 위치조차 버거운 한낱 개미 같은 조직원이다.
그뿐인가 납득할 수 없는 지시사항 앞에서 반박이나 설득은커녕 필요한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하는 인간으로 뒤돌아서는 불평만 늘어놓다가 또 그럴듯한 보고서를 내밀고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목소리 없는 회색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테지.
눈앞에 나의 미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원치 않음에도 불구, 말도 못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시키는 일이나 하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울고 있었고, 충신의 모습 뒤엔 불만의 기운이 가득했다.
그 양극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전전긍긍하며 위태로워 보였다.
행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저게 나라고?